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61
61화 ep22. 시대를 대하는 모험가의 자세 (4)
순례단에서 재촉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순례자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홉 신이 그대의 여정을 가호하기를.”
“저기, 별의 자손.”
뒤를 돌아 발걸음을 서두르던 순례자를 서지아가 불렀다.
“이름이 뭐죠?”
“비바치시모.”
“그건 성이잖아. 풀 네임이?”
“별의 자손은 개인의 이름을 갖지 않습니다. 신에게 헌신하는 자들이니까요.”
“당신은 있을 텐데. 지배자의 가문이니까.”
서지아의 눈빛이 꽤 예리했다.
순례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아는 게 많네요. 은거하는 종족이실 텐데. 성격도…… 엘프답지 않고.”
“엘프치고는 싸돌아다닌 기간이 길어서. 많이 부딪치면 낡는 법이잖아.”
“방랑자의 상을 계승 받은 엘프가 당신인가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우리 셋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지배자입니까? 그렇다면, 혹시 엘 로크라 벨라를 울린 일행인 겁니까?”
서지아가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순례자는 떠날 채비를 하는 동료들을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별과 은하의 움직임이 빨라진 기분도 들었다.
“이걸 받아 주세요.”
그녀는 내게 펜던트 하나를 내밀었다.
“운데라의 가호가 담긴 부적입니다. 그대의 여정에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왜 이걸 나한테?”
“당신들이 왕좌를 향한다면, 제 자매가 짊어진 짐이 조금 더 가벼워질 테니까요.”
펜던트를 받아 들었다. 살짝 스친 손끝이 생각보다 뜨거워서 놀랐다.
“왕좌로 향하는 당신의 여정에 부디 가호가 있기를.”
순례자는 뒤를 돌아서 동료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에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제 이름은 엘리, 엘리 비바치시모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서지아가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말했지? 모든 지배자가 왕좌를 원하는 건 아닐 거라고.”
“흠. 골치 아플 일이 생각보다 없을 거라고 이해해도 되나?”
“뭐, 그렇지. 거기로 가는 길이 경쟁이 아닐 수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와닿는 건 별로 없다. 이계인들의 사정, 굳이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은빛 금속 재질의 부적.
목에 걸고는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슴에서 살짝 차가움이 느껴졌다.
* * *
렐릭시나의 등에 올린 안장을 점검했다. 달리다가 떨어지면 낭패니까. 이런 건 안전을 위해서라도 몇 번이고 확인해야 한다.
준비가 끝날 시점에서 누군가 오두막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선후 씨! 우리 꽤 오랜만 아닌가요!”
OWIC의 열정 괴짜 연구원, 진서연이었다. 똥머리를 한 채 달려오는 걸 보니 며칠 퇴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ㅌ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북쪽 가신다면서요? 하루 이틀거리가 아니라는데?”
“역시 알고 계시네요.”
“비밀이었다면 사과할게요. 우리 회사 원래 좀 지저분한 거 이미 아실 테니깐.”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OWIC은 이미 충분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저 이제 출발할 건데, 구경 왔어요?”
“구경…… 할 게 없진 않네요. 이게 뭐야. 미친.”
진서연은 렐릭시나를 보면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 백이십 퍼센트인데, 이성 잡고 이야기할게요. 의뢰예요.”
“개인적인, 아니면 회사의?”
“개인적인! 나 회사에 정떨어지는 중이니까요. 직원을 속이는 회사를 어떻게 믿어요? 그렇죠?”
동쪽 장벽에 대해서 직원마저 속이고 있다는 상황에 꽤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진서연은 흥분된 표정이었다.
“이번에 북쪽으로 가신다니……. 이거 보세요.”
진서연이 지도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뭐예요?”
“차원문이 처음 열렸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북쪽으로 장거리 탐사대를 보냈어요.”
“겁이 없었을 때였네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다들 돌아왔어요. 잔뜩 다쳐서요. 그 뒤로 북쪽 장거리 탐사는 중지된 상황이에요. 회사에 이득이 없으니까요.”
“그래서요?”
“이게 그때 만든 약식 보고서거든요?”
진서연은 이제 눈이 돌아가서 회사 기밀을 아무렇게나 던져 댔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뭐 어때? 내 알 바 아니고, 진서연도 꽤 즐거워 보였다.
그녀가 내민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약식으로 그려진 지도가 있었는데, 북쪽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 너머에 거대한 평야가 검게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는 고열 지대, 땅이 검은 점액질처럼 끓는 곳이래요.”
들은 이야기다.
“조사대가 여기까지 갔다가 철수했는데, 거기에서 소리를 녹음해 왔거든요?”
“소리요?”
“네. 고열 지대 중앙에서 거센 불길이 퍼져 나오는데…….”
이번에는 녹음기까지 꺼냈다.
“제가 듣기에는 분명 이상한 게 섞여 있어요.”
“이상한 거?”
“들어 보세요.”
진서연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 쿠아아아앙! 콰아아아악!
어마어마한 굉음이 그 안에서 들려온다. 최대 볼륨인 탓에 리리가 저 뒤에서 지루해하다가 펄쩍 뛸 정도였다.
“……이상하긴 하네요. 스피커 찢어졌어요?”
“아뇨! 잘 들어 보세요.”
이미 한 번 녹음된 소리는 그 음질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소리 구분에 능하다고 자신하는 나마저도 한 방에 무언가를 듣진 못했다.
하지만, 진서연은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러보았다.
— 쿠아아아아앙!
하는 소리 안에서.
『%$&#%……!』
무언가 들렸다.
“어?”
“들리죠?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내 반응을 보고 진서연이 한층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거 분명 뭔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믿었다고! 역시 내 말이 맞았어! 그렇죠?”
“잠깐, 아직 흥분하긴 이르니까 한 번 더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거대한 파열음. 아마도 폭풍을 정면으로 맞은 탓에 마이크가 한계를 넘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무슨 소리가 섞여 있었다.
우렁차고, 청명하고…… 의미를 가진.
“…….”
나는 생각에 잠겼고, 진서연은 나를 배려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추락한 태양의 신이 이 아래 잠들어 있으니…… 다시 재생.”
진서연은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건 분명 말소리다. 분명한 의미가 있는 말소리.
한 번 인지하고 나니 그 의미가 똑똑하게 들렸다.
“추락한 태양의 신이 이 아래 잠들어 있으니, 자격 없는 자 그 무덤을 넘보지 말지어다.”
“들려요? 확실해요? 확실한 거죠?”
“……룬 언어네요.”
“역시!”
진서연은 이제 그냥 펄쩍펄쩍 뛸 기세였다.
“선후 씨가 룬 언어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번에 보여 준 게 룬 언어가 맞았네요!”
“흠…….”
“이거, 분명히 이 아래에 뭔가 있는 거죠? 안 그래도 이상했어요. 땅 자체가 펄펄 끓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거, 지구식 편견이야.”
“아무튼요! 이계도 상식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서지아의 일갈에 눈도 깜짝 안 하는 진서연.
“이게 의뢰 내용이에요.”
“이게요?”
“이게 뭔지, 가능하다면 알아 와주세요.”
“그게 다예요? 의뢰가?”
“이거 말고 뭐가 중요한데요?”
진서연이 이전에 내게 협조한다고 말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 이유가 그저 ‘이계에 대한 로망’이라고 했었지.
평소에는 피곤해 보이고, 어떨 때는 냉철해 보이기까지 한 이 연구원을 움직이는 동력이 아이러니하게도 감성이었던 거다.
“……신기한 사람이네.”
“내가 널 볼 때랑 비슷한 감상이야. 그거.”
서지아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좋아요. 이건 나도 궁금하네. 무조건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가능하다면 알아 올게요.”
“고마워요! 혹시, 혹시 더 여유가 되면 샘플 몇 개만 수집해 오면 더 고맙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어느새 모든 점검을 끝마치고 렐릭시나의 고삐를 붙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가면서 해 주면 되겠지.
“응원할게요, 선후 씨.”
“걱정은 안 한다만, 거기에서 죽으면 개죽음인 거 알지?”
서지아는 못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네가 내 활을 가지고 있잖아. 그걸 왜 건넸는지 생각해 봐.”
지배자들은 숙명을 지긋지긋해한다. 서지아를 보니까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소한 서지아는, 평범한 엘프의 삶을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렐릭시나에 올라탔다. 안장의 푹신함이 느껴졌다. 오래 달려도 다리가 결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뒷좌석을 두드리자, 리리도 폴짝 뛰어서 앉은 뒤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푸르릉—!”
렐릭시나의 불타는 갈기를 어루만졌다.
신기하게도 털의 촉감이 느껴졌다. 불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차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건 말에 들어간 백호의 영혼입니다. 강대한 정기가 그릇에서 넘쳐 새어 나왔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거예요.」
셀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아와 진서연을 잠깐 보다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들도 내게 손바닥을 들었다.
“잘 갔다 와요. 기다릴게.”
뒤에서 내 옷깃을 잡는 리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거기 손잡이 있을 텐데.
뭐, 모르지는 않겠지.
나는 렐릭시나의 허리를 찼고.
“크르릉—!”
파악—
렐릭시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 *
북쪽으로 나아가는 평야를 가로질렀다. 렐릭시나의 푸른 발자국이 땅에 선명하게 찍혔다가 사라졌다.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와일드 헌트의 사냥마라는 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주 임무라서 땅을 달리는 데 큰 이점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을 완전히 접기로 했다.
“리리.”
“응.”
바로 뒤에 있긴 했지만 리리와 대화가 가능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승차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승차감이란 단어는 너무 존중이 없나?
“멀미하면 말해.”
“괜한 걱정이야.”
우리는 그대로 북쪽의 평야를 내달렸다. 서쪽에서 이어지는 황무지가 이곳으로도 펼쳐져 있었지만, 30분도 지나지 않아 ‘미명강’이라는 북쪽에서 흐르는 강을 만날 수 있었다.
OWIC의 직원이 배를 대기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배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뗏목이라도 만들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하루 번 셈이다.
“이 너머는 우리가 밟아 본 적이 없는 땅입니다. 공식적으로는요. 조심하십시오.”
OWIC 직원의 배웅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 북쪽으로 내달렸다.
밤에는 야영하고 낮에는 달리는 여정을 며칠 반복했다.
그렇게 대략 일주일이 지난 시점.
아주 미세하게나마 전방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저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산맥은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산과 지금 내 위치 사이에 뭐가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계속 달렸고, 우리는 그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타르, 혹은 현무암이 연상되는 새까만 땅이 반쯤 녹아 있었다.
끈적하게 끓고 있는 그곳의 열기에 벌써부터 얼굴에서 화끈함이 느껴졌다.
‘퐁, 퐁’하고 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
이게 바로 고열 지대.
진서연과 순례자들이 말한 바로 그곳이었다.
“끝이 안 보여.”
리리의 말대로 이 영역은 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열에 증발한 수증기가 구름을 형성해서 상습적인 비를 내리는 모양이었다.
“푸르릉—!”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이곳을 넘을 수 있다는 거다.
지금 당장 렐릭시나가 그 땅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있었으니까. 발굽을 감싼 푸른 불길이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리리.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태양신은 원래 넷이었어?”
“아니. 아홉 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홉 신이었어. 그중에서 태양은 세 개뿐이야.”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은 왜 자기가 추락한 태양신이라고 주장하는 걸까?”
“……?”
리리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태양신이라고 주장한다고?”
“이 고열 지대에서 어떤 룬 언어가 들린다는데…….”
「추락한 태양의 신이 이 아래 잠들어 있으니, 자격 없는 자 그 무덤을 넘보지 말지어다.」
사실 진서연에게는 여기까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걸 들었다. 이게 확실하지 않아서 딱히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나는 반드시 자격자를 통해 제자리를 찾을지어다.”
“……추락한 태양신……. 들어 본 적 있어.”
“아는 걸 얘기해 줘.”
리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우리는 지금 시대를 풍화의 시대라고 불러. 세상이 열정을 잃었다는 의미인데…… 꽤 모욕적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거든.”
“계속해.”
“황금의 시대가 끝나고 기나긴 풍화의 시대 초입부, 이 시대에 불만이 많았던 마법사가 있었대. 그가 자칭 네 번째 태양.”
“사이비 종교라는 거네?”
“응.”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대한 탑을 쌓기 시작했어. 하늘에 올라가기만 하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거야. 신도들에게는 승천을 약속했지. 성좌의 자리를 하나씩 주겠다고.”
“음…….”
매번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전혀 다른 세계라 해도 사람이 하는 짓은 비슷비슷하구나 하는 생각.
“세 개의 태양이 그자의 행동에 분노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겠지.”
“그래서, 혹시 땅에 묻었나?”
“응…….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인데.”
그 순간.
「라 솔타니아———!」
거대한 외침이 들렸다.
녹음기에서 들은 바로 그 말.
「추락한 태양의 신이 이 아래 잠들어 있으니, 자격 없는 자 그 무덤을 넘보지 말지어다!」
쿠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열기가 이곳으로 뿜어져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개빡쳐 있네?”
“어떻게 할 거야? 이거 건널 수는…….”
리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건널 거야?”
나는 이미 렐릭시나의 등에 다시 올라탄 상황이었다.
“할 만할 거 같은데?”
“……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
“리리, 가방 들어. 이거 불에 탈 수도 있으니까.”
리리가 곧이곧대로 가방을 멘 채 내게 딱 붙었다.
나는 미리 꺼내둔 백옥처럼 새하얀 천 뭉치를 들어 올렸다.
“렐릭시나.”
“크르릉—!”
“가자!”
박차를 가했고, 렐릭시나는 땅이 부서질 듯 걷어차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무덤을 넘보지 말지어다!」
다시 몰려오는 고열의 폭풍.
나는 두 벌이나 되는 백색의 망토를 펼쳐 리리와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싼 상태였다.
차태식 씨는 이렇게 불렀지.
“천잠사의 망토.”
콰아아악—!
고열은 렐릭시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 갈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불길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거대한 힘에도 기죽지 않는 범의 기상이 느껴지는 듯했다.
열기는 망토의 표면을 타고 흘러 지나갔다.
숲의 기생체가 외부의 화학적 반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드는 천.
그 천의 위력은 이미 오래전 몇 번이나 경험해 봤었다.
그때는 내 적을 지키는 장애물이었으나, 이제는 나를 지키는 방패다.
몇 번이나 몰려오는 고열의 돌풍을 맞아 가며 렐릭시나는 빠르게, 더 빠르게 달렸다. 리리가 옷깃을 잡는 손아귀의 힘이 느껴졌다. 겁에 질린 모양이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나가다 보니 가라앉은 빙산의 일각처럼 보이는 원뿔 형태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반쯤 기울어져 있었고, 밤하늘처럼 새까맸다.
측면에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창문이 뚫려 있었다.
고열은 그 건물의 꼭대기의 붉게 빛나는 수정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로 근접하니 열기가 망토를 뚫고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렐릭시나.”
“크릉—!”
“저 건물에 근접해.”
렐릭시나는 잔뜩 흥분한 채 고개를 휘저었고.
“뭐?”
리리는 당황했다.
“저, 저기를 들어가겠다고?”
“저걸 지나치겠다고?”
“미친놈아!”
내달리는 말 위, 고열의 폭풍과 끓는 땅, 내려치는 빗발, 그 굉음 사이에서 리리는 명확히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소리를 꽥 질렀다.
“안 들려!”
“야!”
“뭐라고? 안 들려!”
“다 들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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