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6
76화 ep26. 여정, 하늘로 (3)
바람이 불어왔다. 이 높이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모래 먼지가 섞인 바람이었다.
고대 왕국의 유적을 많이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게 낡은 느낌이 들었다.
당장 종을 울린 그 유적만 하더라도, 시간이 체감되었을 뿐 파손이나 풍화의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니까.
“왜 이곳만 이럴까.”
리리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제까지 마주쳤던 유적들은 낡긴 했어도 이렇게 파손이 심각하진 않았어. 여기는……. 거의 폐허잖아.”
리리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불안한 눈빛으로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 성에 산 용이 난동을 부린 게 아닐까?”
“음.”
리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제까지 만난 유적과 이 유적의 차이는, 저 용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남겨진 곳과 버려진 곳의 차이야.”
이제까지의 유적은 남겨진 곳이다. 고대인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곳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버려진 곳이다.
용들이 살던 도시.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들이 떠난 뒤 버려진 도시, 그게 천공섬의 정체였다.
“중요한 건 모두가 이곳을 떠날 때, 누군가는 최후까지 여기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야.”
그 존재는 저 성에 남아 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리리는 이게 예언자의 유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예언의 서(書) 정도로 부르면 되려나?
이 물건의 효과는 알 것 같았다.
어떤 특정 시간대의 상황을 기록해서, 언제든지 그 모습을 재생할 수 있는 일종의 녹화 장치라고 하면 되려나.
내가 애초에 천공섬에 온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용을 봤는데, 그냥 내려갈 수 있어?”
“나는 그럴 수 있는데…….”
리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은 안 되잖아.”
“그렇지.”
이제 슬슬 리리가 체념하는 모습이 왠지 뿌듯했다.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용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건, 모두가 떠난 뒤에도 남은 단 하나의 용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불안하니까 한 번만 확실하게 다시 말할게. 동화 속에서 용은 항상 용사들의 대적자였어.”
“대적자?”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 용사를 최후에 막아선 건 항상 용이었으니까.”
“어느 세상이나 다 똑같나 보네.”
“당신네 마을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어?”
많았지.
용은 전통적으로 최종 보스잖아. 게임에서든, 판타지 영화에서든.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모두가 떠났을 때 홀로 남은 이가 고작 그런 역할일까?
근거는 없지만, 믿음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이게 성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깥에서 봤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지만, 안에 들어오고 나서 더 확실하게 느꼈다.
이건 성이 아니었다.
“이건 창고네.”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금화들, 그리고 장식용 검, 왕관, 목걸이, 검은 나무 상자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반지.
온갖 금은보화들이 이곳에 가득 차 있었다.
“……세상에.”
건물의 무너진 잔해가 뒤섞인 보물들은 무질서하게 이곳에 쌓여 있었다.
누군가 놓고 간 물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둔 듯한 모습이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완전히 막혀 있지 않았다. 맨 위부터 아래까지 거대하게 뚫려 있었다. 붕괴된 흔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탓이었다.
“……이유가 뭘까?”
“계단을 쓸 필요가 없는 종족이었으니까.”
인간형으로 존재할 수 있는 듯했지만, 용의 형태로만 살아가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지.
이 성은 인간 형태의 용이 아닌, 순수한 용 그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 테라스로 통하는 거대한 창문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용이 있는 곳.
고민은 길지 않았다. 미지의 공포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서 감정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편이 오히려 감정을 통제하기 쉬우니까.
오랜 기간을 겪으면서 배운 사실이다.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쥐어진 녹색 보석은 찰나의 순간 빛을 뿜어내고, 은은한 금빛이 도는 활이 손에 쥐어진다. 밧줄 화살을 소환해서 위로 쏘아 올렸다.
언제나처럼, 단단히 고정되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다.
“리리. 여기 있을래? 겁나면 안 따라와도 돼.”
“따라갈래.”
그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렐릭시나는 뒤에서 가만히 있다가 푸르르 입술을 한 번 떨며 고개를 휘저었다.
나와 리리는 밧줄을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벽에 발을 디딜 만한 틈이 많아서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맨 위로 도착했을 때.
「크르르…….」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입구에 딱 달라붙었다. 척 봐도 몬스터 트럭 하나는 거뜬히 통과하고도 남을 크기. 이 문 건너편에 용의 거체가 있겠지.
하지만 창 밖으로 바로 눈을 내밀 수는 없었다. 괜히 고개 내밀었다가 브레스 맞고 훈연 고기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탐-탓사Tham-tatha.”
눈을 감고 고요하게 외쳤다.
“뭐가 좀 보여?”
리리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눈을 떴다.
“여기에는 사는 생물이 없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새가 날아다니기에도 부담스러운 높이니까.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다. 반사경을 꺼내 들었다.
“……당신 무슨 암살자들 장비를 들고 다녀.”
“암살자가 이런 장비도 써?”
“동방의 한 나라에서 그런 전통이 있대.”
이계의 암살자들은 이런 거 들고 다니나 보네.
우리는 총 한 자루면 끝인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반사경으로 반대편을 보았다.
거대한 헬기 착륙장, 아니면 짧은 활주로가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야외는 아니었다. 반대편에도 벽이 있었고, 그곳에는 아주 거대한 문이 달려 있었다.
용들의 삶이 어땠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광경이었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내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리리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뭔가 있어?”
“리리.”
“응.”
“나 눈 마주쳤는데?”
“……뭐라고?”
“저 용이 이 반사경 보고 있어. 눈빛 되게 매섭다 야. 너랑 비슷해.”
“…….”
리리의 얼굴에서는 아마 핏기가 다 빠져나갔을 거다.
……나는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 묶여 있었던 천잠사의 망토를 풀어냈다.
저 용의 입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거든.
그렇게 생각했는데.
「썩 안 나오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리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나도 살짝 인상을 써야 할 정도였다.
「요즘 필멸자 놈들은…… 불멸자에 대한 예의가 없어! 예의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에잉! 쯧…….」
“……리리.”
“응?”
“용들이 좀…… 그 유교 사상 같은 거 믿고 그러나?”
“유교가 뭐야. 동방 쪽 사상이야?”
나도 잠깐 정신이 없었다.
“그런 게 있어.”
반사경을 접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저 용이 우리를 한 끼 식사 취급할까?
이 고민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그러려고 했으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말하는 것도 좀 꼽을 주긴 하지만, 완전히 적대는 또 아닌 거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생존하면서 그런 감은 확실하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날카로워졌으니까.
나와 리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사실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용은 이 넓은 공간 가운데에 편하게 엎드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잿빛의 거체, 바위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탄 듯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용에게서 나는 냄새일까? 그 입이 불꽃을 물었던 순간을 기억했다.
비늘과 뿔, 그 파충류의 피부 아래 있을 단단한 근육이 엿보였다.
뿔 하나는 잘려 있었고, 접힌 그 날개의 피막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얼마나 오랜 기간 살아온 걸까?
셀 수 없는 시간이 지고의 거체에 나이테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 용체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숭고한 느낌을 자아냈다. 리리가 본다는 영혼의 상이 이런 인상을 가지고 있을까?
리리의 얼굴에 덧씌워진 두려움, 그 뒤에 있는 경외심이 엿보였다.
「눈을 감았으나 완전히 죽지는 않은 이들의 시대의 불명예스런 풋내기들이여, 이 미답의 영역에 감히 발길을 들이민 이유가 무엇이냐?」
“……?”
나는 리리를 바라보았다.
“뭐라는 거야?”
“……모르겠어.”
리리도 고개를 가로젓자, 용이 소리를 꽥 질렀다.
「요즘 것들은……. 풍류도 없고……. 거, 예의도 없고……. 지금 너희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뭔지 알기는 하는 것이냐!」
뭔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싶은데 내가 안 받아 주는 게 영 시원찮은 모양이었다.
근데 매번 그렇듯 난 저런 거 하나도 할 줄 모른다. 이런 부분에서는 나보다 리리가 훨씬 더 잘 안다.
하지만 리리도 용을 만나는 건 처음인 모양이었다.
“저, 음……. 필멸자가 지고의 불멸자를 감히 마주해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래, 거 뱀파이어 꼬맹이는 좀 예의가 뭔지 아는 녀석이구만. 그런 너! 너……. 응?」
쿠그그그—
용이 그 긴 목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굳은 비늘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자가 아니라고?」
용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닌데, 예언에 따르면…… 거 뭐시기, 인간이 아니라……. 그 누구였드라? 왕의 후손이 여기로 오기로 했는데.」
내가 물었다.
“그, 영감님? 영감님은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영감!?」
쿠그그그—
용이 소리를 꽥 지르자 이곳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기세는 멋진데, 무너지는 거 아냐?
「네놈은 예의를 트롤 가마솥에 처박고 왔느냐!」
“하지만요. 저는 불멸자 그런 건 잘 몰라서요. 예의를 지키고 싶지 않은 건 아닌데…….”
「불멸자고 뭐고 연장자에 대한 예의도 없냐!」
“아, 음. 죄송합니다. 여기에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용은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대답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치 오랜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는 것처럼.
「친구의 약속을 지키고 있지.」
“약속이요?”
용은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저 문을 지켜 달라 했다. 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가 올 때까지.」
“뭐가 있는데요?”
「몰라. 이 싹바가지 없는 녀석아.」
“뭔지 모르는데도 지키는 거예요?”
「친구가 부탁한 거니까.」
“……당신 동족들이 이곳을 다 떠났잖아요?”
용은 다시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맹수의 그것을 타고났다. 나는 그것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 용이 호전적이고 난폭한 성격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불멸자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를 거부하는 종족이다. 황금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 그 시대를 물려받은 너희가 만든 변화가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아느냐.」
용의 마음속에 담은 응어리가 느껴졌다. 그는 입에 불을 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호전적이고 난폭한 천성을 타고났는데도.
「그렇기에 우리 동족은 떠났다. 이 시대가 싫었기 때문이지.」
“……근데 당신은 왜 남았어요?”
「친구가 부탁했으니까.」
그 눈빛에는 울림이 담겨 있었다.
“……화는 왜 참고 있어요?”
용은 여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용의 얼굴에 표정이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확실한 건 그 눈동자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이었다.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한테 꼬치꼬치 캐묻는 습성은 뉘집에서 배웠느냐? 인간 주제에 꽤 잘 버티는 그 모습에 호기심이 느껴져 조금 맞춰 주었다. 별의 자손도 불멸자의 영혼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데.」
용이 놀란 이유는 내가 던진 질문 탓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 태도 탓인 것 같았다.
「……여기에는 왜 왔느냐? 돌아가라. 버림받은 종족을 위한 자리는 아니니까.」
나는 용 뒤편,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저걸 지키기 위해서 남았다면, 저 문을 열면 영감님은 자유로워지나요?”
「보물이 탐나느냐? 내가 만 년만 젊었어도 이 자리에서 네놈을 구워 먹었으리라.」
“당신이, 자유로워지나요?”
「…….」
문에는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말이다.
* * *
용은 지배자였다.
필멸자의 위에 군림하도록 창조된 종족.
지금은 죽어 대지가 되어 버린 창조의 신은 용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용은 만들어진 대로 충실하게 행동했다.
용들은 폭정을 일삼았다. 필멸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불멸자의 지혜로 교정했다.
자신들은 세상을 제대로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이 나타나 세상을 규합하기 전까지는.
가장 나이가 많은 용은 왕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싸움만을 반복했던 모든 종족들에게 화합과 동행의 길을 알려 주었다.
모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갈등이 아닌 향상심으로 이끌어 냈다.
황금의 시대에는 뜨거운 빛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용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용들은 그 시대의 끝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떠났다.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어쩌면 밤하늘을 뒤덮는 어둠 저편으로.
하지만 왕의 친우, 키호테는 그러지 않았다.
친구의 부탁이었으니까.
그 뒤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이 모든 기억이 흐려지고 ‘약속’ 하나만이 유일하게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끝에 종이 울렸다. 키호테는 이 인내의 끝이 다하기를 기대했다.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대했다.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용의 고향,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배자의 자격이 있는 이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키호테는 알고 있었다. 이 시대의 모든 존재들은 열정과 신념을 잃은 지 오래라는 사실을.
지배자들은 더 이상 왕좌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키호테 앞에 한 인간이 찾아왔다.
모든 신에게 버림 받은, 이기적이고 혐오스러운 종족.
친구의 가르침과 오랜 기간에 걸친 깨달음 이전의 나였다면, 벌레 취급도 아까워했을 그런 종족.
그런 인간이 지금 문에 다가가고 있었다.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내뱉었다.
“—엘 라 돈 베르니카EL LA DON BERNIKA.”
오랜 친구의 언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