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7
77화 ep26. 여정, 하늘로 (4)
왕의 언어.
필멸자에게는 듣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언어.
어느새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보고 있는 불멸자는 그 언어를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 길을 열지어다.
저 인간이 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아니, 저 언어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용은 처음으로,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애써 봤다.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황금의 영광과 그 시대에 불었던 바람을 떠올리기 위해 마음속 책장에 덮인 두꺼운 먼지를 쓸어내렸다.
당연히 헛수고였다.
셀 수조차 없는 오랜 시간 속에서 불멸자 역시 풍화를 피할 수 없었다.
기억의 단편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토록이나 크게 원망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들어진 양문. 그 표면에 그려진 룬 문자는 잠에서 깨어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움직였다.
드드드드—
원형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룬 문자는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쿠웅…….
새로운 문자가 되었다.
하나의 문자가 다시 그려지지 않고 위치만 바꾸어 새로운 문자가 된다.
고대의 존재만이 가능한 고수준의 응용 능력.
인간은 그 모습에 감탄이라도 하는 듯 그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완성된 룬 문자가 분명함에도, 인간은 시동어를 외지 않고 그저 보고 있기만 했다.
용의 시선은 여전히 인간을 향해 있었다.
“당신의 이름이 키호테인가요?”
인간은 그렇게 물었다. 키호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은 끝까지 시동어를 외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줘서 문을 밀어붙일 뿐이었다.
고작 저런 문을 열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약한 종족. 눈앞의 인간은 속까지 인간일 뿐이었다.
간혹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뜨거운 빛을 여전히 쫓는 이가 이 시대에도 남아 있다면, 그의 종족은 무엇일까.
인간을 상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드드드드—
천천히 문이 밀리며 건너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곳에 있는 건 기다란 복도였다.
“…….”
얇은 벽에 달린 문 안에는 그 끝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긴 복도가 있었다.
고대의 신비는 이곳에도 남아 있었다.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천공섬임에도 이 문 너머만은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희미한 바람이 불어왔다.
미풍이었으나 아직까지도 황금의 영광을 품고 있는 바람이었다.
인간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저 끝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그저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키호테는 그 등밖에는 바라볼 수 없었다.
인간이 입을 열었다.
“왕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나요?”
「기억하지 못한다.」
“왜요? 당신은 그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불멸자잖아요.”
「……로크 벨라에 대해서 아느냐?」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뱀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로크 벨라는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천 년마다 한 번씩 울리는 종입니다.”
「반만 맞았다. 풋내기들이여.」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로크 벨라는 시대를 격리하기 위해서 울린다.」
“……무엇으로부터 격리하죠?”
「새로 시작할 시대를 이전 시대로부터 격리하기 위해서 울린다.」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고의 존재여.”
용은 다시 자리에 편하게 앉았다.
그 목소리는 어느새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초기의 위협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필멸자는 어차피 죽는다. 장생종이어도 말이다. 그렇기에 내버려 둬도 한 시대 이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불멸자.
아무런 사건이 없다면, 모든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로크 벨라가 울린다. 그것이 울릴 때마다 이전 시대에 대한 불멸자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렇게, 이전 시대를 온전히 기억하는 이는 남지 않게 된다.」
“……이유가 뭡니까?”
「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지. 신의 결정에는 이유가 없다.」
용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으나, 눈빛은 감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깊었다.
「내 기억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것도 파편뿐이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변질된 것인지도 모르지. 지금 한 말도 거짓일 수 있고.」
“영감님이 이곳을 이제까지 지킨 이유가 친구의 부탁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맞다.」
“기억을 잃는 와중에서도 그건 기억하신 건가요?”
「친구의 부탁이니까.」
“그 기억이 착각일 수도 있잖아요? 제대로 기억도 못 하시는데.”
「부탁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이상 나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그게 내 착각이더라도.」
“…….”
인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문 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용은 그 행동에서 의문을 품었다.
「뭣 하느냐?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썩 돌아가라. 이제 좀 쉬어야겠으니.」
“이 문을 열었으니, 영감님은 자유로워진 건가요?”
그게 중요한가?
아까부터 보여 주는 이 인간의 행동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눈앞에 고대 왕의 보물이 있는데, 고작 그딴 게 중요한가?
「그건 왜 계속 묻느냐? 귀찮은 녀석이구나! 하여간,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이구만.」
“용이 나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요.”
남자는 뒤를 돌아 용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롱이나 모욕의 언사가 아니라는 걸 용은 깨달았다.
이 인간은 지금 진심이었다.
「……그 미약한 정신의 짧은 유통 기한이 벌써 다 되어가는 모양인데. 그 기행에 흥미가 느껴지니 대답하자면, 자유로워진 건 맞다. 하지만, 날진 못하겠구나.」
이 말을 내뱉으며 용 자신도 가슴에 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모든 용이 마음에 품은 고향은 하늘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날면서 자유가 뭔지 깨달았다.
용은 자신의 날개를 힐끗 바라보았다.
불멸자조차 이 시대를 휩쓴 풍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날개막은 볼품없이 찢어졌고,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유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이 시대의 마지막 용은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인간은 그 말을 듣고 복도를 걸어 그 끝에 놓인 물건을 가지고 왔다.
그건 두 개의 태양 빛을 산란시켜, 마치 스스로 빛나는 것 같은 다면체였다.
수많은 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면체였는데, 그 각이 너무 많아 사실상 구의 형태에 가까운 수정 구슬이었다.
키호테는 이게 뭔지 몰랐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데, 이 인간은 마치 이게 뭔지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여의주.”
「…….」
“그 자체로 용의 영혼이나 다름없는 힘을 가진 보물이에요. 동방의 용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라네요. 필멸자가 사용하면, 용에 버금가는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은 고개를 들어 키호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지금 웃고 있었다.
“풍화된 용이 사용하면, 전성기로 돌아올 수 있는 물건이에요.”
인간은 다시 눈을 내려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 시선에 탐욕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간이 그 물건을 자신에게 내밀 때까지는.
“자요.”
「……무슨 생각이냐. 진짜 수명이 다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거냐?」
“이곳에 잠들어 있던 보물은 방문자를 위한 게 아니었어요. 당신을 위한 거였지.”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아느냐?」
“문에 적혀 있는 룬 문자는 이런 내용이었어요.”
용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인간을 바라보았다.
“—네가 세상에 남은 최후의 용이 될 터이니, 황금의 시대가 다시 열릴 때 용의 귀환을 지휘할 수 있으리라. 이 보물로 네 힘을 돌려받아 역할을 다해 주어라.”
“—견뎌 주어서 고맙다. 나의 오랜 친구 키호테.”
이게 왕이 용에게 남긴 진실된 임무였다.
고작 한 필멸자를 위해서 보물을 지키는 게 아닌, 새로 재림할 황금의 시대에 용의 귀환을 지휘할, 용족 최후의 희망.
왕이 키호테에게 맡긴 임무는 신화의 재림이었다.
왕은 불멸자에게 숭고한 역할을 기꺼이 맡겼다.
용이 친구를 믿은 만큼, 왕도 친구를 믿었기에.
키호테는 순간적으로 허탈함을 느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곳을 이제까지 지킨 의미가 없지 않느냐. 원래 내 것이었다면 굳이 지킬 이유가 어디 있느냐.」
“지켜 달라는 부탁이 없었다면, 당신이 떠났을 테니까요.”
키호테는 인간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나긴 풍화의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당신이 떠났을 테니까요. 왕은 당신이 이 세상에 남기를 바랐던 거예요.”
「……어째서.」
“끝내 황금의 시대가 다시 열렸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가 말했다.
뒤를 바라보았다.
“풍화의 시대를 견디지 못했다면, 황금의 시대 재림도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용이 귀환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겠지요. 당신은 황금의 시대가 재림하는 순간을 목격할 최초의 용입니다.”
“자요. 영감님 거예요.”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 풋내기.」
인간은 잠자코 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네가 사실을 숨기고 이곳에서 떠났다면, 구슬 안에 담겨 있다는 용의 영혼은 너의 것이 될 터였다.」
“그렇죠?”
「그렇다면 너는 불멸자가 될 수 있었다. 그건 성좌로 승천하는 것과 버금가는 영광일 터, 왜 굳이 그 모든 사실을 밝혔느냐? 노쇠한 내 모습을 보고 불멸자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냐?」
인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고뇌가 아니었다.
‘왜 이걸 굳이 설명해야 할까.’라는 의문에 가까웠다.
“그래서 뭐 해요? 영원히 살면서 심심할 때마다 세상을 들쑤셔요?”
「…….」
“그게 재미없진 않겠는데, 저는 개미집을 들쑤시면서 즐거움을 느끼느니, 하늘에서 용이 귀환하는 순간을 기다릴 거예요.”
「정말 그뿐이냐? 그게 네놈의 진심이냐?」
“이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요?”
「영원히 살고 싶지 않느냐?」
“당신이 영원히 기억해 주세요. 언젠가, 기꺼이 여의주를 넘겨준 한 인간이 있었다고.”
「……로크 벨라가 울리면 내 기억도 사라진다.」
“그런데도 오랜 친구의 부탁은 기억해 줬잖아요?”
키호테는 이 인간의 눈빛에서 한 줌의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키호테는 긴 시간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필멸자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용은 그 목을 크게 움직여 다가왔다.
「너는 빛과 명예를 아는 이로구나.」
오래된 용은 여의주를 물었다.
바람이 멈췄다.
산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마저 잠시 숨을 죽였다.
숲은 고개를 숙였다.
이 순간, 세상에 움직이는 건 태양과 그 뒤편에 가려져 있을 달 뿐.
신의 피조물은 첫 번째 자손의 귀환을 맞이했다.
여의주가 깨졌다.
그 수천의 조각이 흩날려, 용을 감싸기 시작했다. 영광의 시대를 기억하는 산은 중후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옛 노래를 불렀다.
황금빛 광채가 용을 감싸 안았다. 용은 고개를 들고 다리를 뻗어 오래 웅크렸던 거체를 펼쳤다.
리리는 강선후의 뒤에 저도 모르게 몸을 감추었다.
강선후는 그 모습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산의 노래가 멈추고, 정기의 침묵이 조심스럽게 사라지며, 숲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으윽……!”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열기의 폭풍이 느껴졌다. 강선후는 재킷을 펼쳐 리리를 보호했다.
그 성 한가운데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늙은 회색의 용이 아니었다.
옛 천공섬의 지배자.
붉은 분노와 불꽃을 품은 군주, 키호테.
키호테는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이 성 바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에서는 거체를 깃털처럼 띄울 수 있는 힘이 느껴졌다.
키호테는 잠시 위를 바라보았다. 뻥 뚫린 천장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키호테는 날개를 되찾았다.
키호테는 자유를 되찾았다.
마음의 고향이 바로 저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제심을 발휘했다. 고개를 내려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았다.
「필멸자가 명예를 보였으니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원하는 게 있느냐? 내 힘의 일부를 너를 위해 쓰리라. 원한도, 증오도, 부와 명예도, 모든 건 내 날개 아래에 있으니!」
강선후는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지평선과 산맥이 저 아래 펼쳐져 있었다.
저곳 어딘가에는 그의 집이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다음 여정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태워 주실래요?”
「……네놈은 철이 덜 든 건지 유통기한이 다 된 건지 모르겠구나.」
“누가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아보겠어요? 그렇지? 리리.”
“……하아…….”
인간은 웃음을 터트렸다.
키호테는 생각했다. 대체, 누가 불멸자 앞에서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용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인간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문만을 품게 만들었으니까.
용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자유.
용의 자유는 하늘에 있었다.
키호테는 날개를 뻗었다. 용의 귀환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오래 기다린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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