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88
88화 ep29.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 (4)
리리는 방호벽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선후도, 심지어 리리 본인도 지배자의 상을 타고났기에 그랬다. 고대의 절대 방어라도 지배자의 상이 방문한다면 기꺼이 그 문을 열어 줬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저들 중에서도 지배자가 있는 걸까?’
도적들은 분명 통행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하고 생각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배자의 상을 발현하는 것 외에 고대 유적을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배자가 있다는 뜻인데.
여기까지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답이 나올 정도로 충분한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닻을 내려요!”
이 미친놈이 다시 미친 명령을 내렸으니까.
리리의 얼굴이 하얘졌고, 그 명령을 들은 베두헨들도 굳어 버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신난 건 강선후와 저 램프의 정령뿐이었다.
「뭣들 하느냐! 닻을 내려라!」
베두헨들이 멈칫한 건 그저 찰나의 순간뿐, 무력하게 약탈을 당하던 이들일지라도 숙련된 사막의 뱃사람인 건 변하지 않았다.
명령을 들으면, 그게 사지로 뛰어드는 일처럼 느껴질지라도 판단하지 않고 따른다. 명령을 받고 주저하는 건 잘못된 명령보다 더 최악이었으니까.
촤르르르르—
닻이 내려갔고, 곧이어 쿵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이 다음에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꽉 잡아요!”
뱀파이어가 외치며 몸을 낮추고, 난간을 부여잡았다.
쿵—!
“으아아아—!”
생각보다 거대한 충격, 직진 운동은 그대로 회전 운동으로 바뀌었고, 그 관성은 거대한 충격이 되었다. 돛이 넘어질듯 출렁거렸다. 이대로라면 부러질 거 같았다.
조범수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도끼를 들어 돛을 지탱하는 밧줄을 끊어 내었다.
돛이 접혔고, 기둥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들며 안정화되었다. 저항이 사라지며 회전은 더욱 빨라졌다.
갑판 위로 사람이 굴렀다.
속수무책으로 굴러가는 풋내기 선원을 리리가 한쪽 팔을 뻗어 붙잡았다.
“꽉 잡아요! 놓치면 나도 몰라!”
“으아아…….”
베두헨의 손등에는 가시가 있었다. 리리는 인상을 쓰면서도 그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배가 제자리에서 회전했고, 곧 측면이 정확하게 도적 떼를 향한 그 순간.
“사격!”
젖 먹던 힘으로 포탑을 부여잡고 있었던 선원들은 미리 준비해 둔 불씨로 화포에 불을 붙였다.
콰가가광—!
발사된 건 단순한 금속 포탄 네 발이 아니었다.
강선후가 미리 세팅해 둔, 산탄 형태로 발사되는 수십 개의 급조 고폭탄들.
그의 연금술이 이토록이나 수준 높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리리마저도.
천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작은 폭탄들이 도적 떼를 향해 날아가 불꽃과 파편, 그리고 굉음이 혼란의 무대를 만들어 냈다.
“부, 불이야! 불이다!”
“무, 물 가져와!”
“여기에 물이 어디 있어!”
도적들이 막무가내로 만든 목재 구조물들은 속수무책으로 타올랐다. 단 한 번의 사격으로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하기엔 너무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혼란스러운 건 해적선 위도 마찬가지였다.
화포의 반동으로도 배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는 그대로 항만 안쪽까지 들어갔다.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지만 충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것까지 계산했을까?
리리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뱃머리 장식을 붙잡으며 떨어지지 않게 몸을 고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알았다. 이걸 예상한 게 아니라는 걸.
강선후는 의외로, 모든 상황을 예상하진 않는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
그저 그 상황에 맞춰서 행동할 선택지를 남겨 놓을 뿐.
지금이 딱 그랬다.
“함부로 예상하면, 변덕에 휘말렸을 때 대처하지 못해.”
강선후가 플랜을 세울 때마다 간혹 하는 말이었다.
강선후는 뱃머리 위로 다시 올라왔다. 항구를 바라보며 외쳤다. 거대한 소음과 흩날리는 모래 때문에 제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모두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충격에 대비!”
「뭘 할 생각이냐!」
“해적은 계획 따위 없다면서요! 그건 왜 물어!”
「뭘 하고 싶으냐!」
강선후는 웃었다. 그러고는 쿠크리를 뽑아 들어 높이 치켜세웠다.
“충돌하면! 다들 뛰어내려요!”
「약탈의 꽃! 네놈이 점점 마음에 드는구만!」
에드워드는 듬성듬성한 앞니를 보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호이! 백병전을 준비하라! 등 보이는 놈들은 즉결 처형이다!」
“……전투 준비! 다들 꽉 잡아!”
하무디를 시작으로 상단원들은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곡도를 빼 들었다.
“네 명은 남아서 포탄 재장전해요! 옆에 준비해 뒀으니까!”
“아이, 아이!”
포수들은 원심력 때문에 이리저리 밀려나는 화포를 억지로 받치면서 이 악물고 외쳤다.
리리는 이런 거친 상황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다. 가문에서 받은 훈련이 아무리 거칠더라도 어디까지나 훈련 상황만을 겪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느꼈다.
「약탈으을! 시- 작한다-!」
에드워드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쾅—!
배의 측면이 항구에 그대로 부딪혔다.
모래가 턱을 넘어가며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도적들을 덮쳤다.
바다였다면 그저 소금물의 폭포였겠지만, 지금 항구를 덮친 건 십수 톤의 모래였고 그 자체로 치명적인 습격이었다.
“으아아악—!”
“피해!”
어인 둘이 그 자리에서 모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항구에 부딪힌 배는 그대로 쓰러질듯 기울었다.
쿵! 쿵! 쿵! 쿵!
뒤로 밀렸던 화포들이 다시 앞으로 강하게 부딪치며 포문으로 주둥이를 내밀었다. 포수들은 휘청이는 와중에도 화포의 약실을 개방해 장전했다.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미끄러지던 상단원들은 그대로 박차고 뛰어내려 항구 위에 넘어지듯 착지했다.
리리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공중에서 회전한 뒤 착지하자마자 도적 하나를 거칠게 베어 냈다. 리리가 평소의 쓰는 검술과는 조금 달랐다.
‘진정이 되지 않아.’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막아!”
“못 내려오게 해!”
첫 합이 벌어졌다. 누가 봐도 상단 쪽이 조금 더 우세했다.
여기서 리리를 놀라게 한 건.
「으하하! 에드워드 일당의 분노 앞에 몸서리쳐라!」
램프에 묶여 있기만 했던 에드워드가 바람처럼 도적 사이를 휘저으며 어인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리리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달려드는 어인과 합을 나눈 뒤 뒤로 도약했다. 정면 힘 싸움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몇 어인들이 슬링을 휘두르며 이곳을 조준하고 있었다.
몸을 피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강선후는?’
강선후는 뱃머리 장식 위에 없었다.
위를 올려 보니 배가 항구에 부딪힌 관성을 이용하여, 강선후는 높이 뛰어오른 상황이었다.
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강선후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고, 룬 문자가 날아와 바닥에 새겨졌다.
“……이건.”
타고 온 배만큼이나 거대한 룬 문자가 이 땅 위에 새겨졌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지만, 리리는 이게 뭔지 추측할 수 있었다.
골렘, 룬 문자의 변형.
강선후는 이제 룬 문자를 자체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룬 문자를 해석하는 능력만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건만, 아직도 그는 성장하고 있었다.
리리는 그 가운데에 손바닥을 놓고 외었다.
“카츠kaahz.”
항구 위에 흩뿌려졌던 다량의 모래가 소용돌이치며 한데 모이고, 솟아올랐다.
그렇게.
그어어어—
모래로 이루어진 거인의 상반신이 되었다.
골렘 룬 언어의 변형, 아주 미세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룬 창조물이었다.
“어, 어어……?”
“말도, 안 돼…….”
“비켜! 나는 도망…….”
모래 거인이 비대해진 주먹을 치켜올리더니, 2층에서 슬링을 휘두르던 어인들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골렘 자신이 폭발하여 무너져 버릴 정도의 강타.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이었다.
어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나름대로 대처한답시고 짜놓은 진열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괴멸되었다.
특히 저 마법, 룬 마법.
장벽을 넘어온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속임수를 썼겠거니 하고 쉽게 했다.
실제로 마주친 순간, 마법사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인 걸 보고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그저, 인간이라는 나약한 종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손짓만으로 룬 문자를 창조해 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룬 문자는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창조된 존재는 어떤 룬으로 만들어졌는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발칸은 열 남짓 되는 부하들의 인도를 받아 안쪽으로 대피했다. 배워 먹지 못하고 의리조차 없는 도적들이었지만, 이들은 발칸에게만큼은 깍듯하게 대했다.
이 유적을 작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였으니 그랬다.
그리고, 이들은 발칸에게 여전히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미친놈들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귀상어를 닮은 어인 하나가 씹어 대듯 뱉었다. 이곳은 유적 2층 중앙에 있는 작은 성안.
“방벽이 뚫렸으니, 여기라고 안전할 보장이 없는데.”
눈이 한쪽으로 몰려 있는 어인이 넙데데한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들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좋게 생각하자고, 발칸 님. 포식자로서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 줄 때가 된 게 아니겠습니까?”
발칸은 죽은 형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백상아리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발칸이 어떤 역량을 타고 났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담력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음.”
발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금속의 구(球)를 꺼내 들었다. 단순한 쇠구슬이 아니라, 복잡한 형태의 기계 장치였다.
이 유적지에서 찾아낸 고대의 장치.
포식자의 상을 타고난 그만이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지배자의 절대적인 상징.
이거라면 침략자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이들은 깨달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쾅—!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을 때렸다. 그 앞에는 나무판자를 방패처럼 들고 있는 두 명의 상단원이 있었다. 화살의 습격을 대비한 철저한 방지책이었다.
그들은 안쪽에 이렇다 할 위협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인간이 걸어 나왔다.
“야.”
“…….”
“니들 대장 튀어나와.”
맨 처음 이곳을 습격했을 때는 유쾌한 일면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뒤쪽에 서 있던 뱀파이어의 붉은 눈동자가 남자의 머리 위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표정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걸까?
“……니들 사람 먹었더라?”
이 인간의 분노가 어째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사막은 척박한 곳이었고, 어인들은 쉽게 유혹에 빠져들었다.
어인들은 이곳에서 작물을 수확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빼앗는 것에 더 익숙한 이들이었으니까.
인간은 성큼성큼, 혼자서 어인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이때다 판단한 발칸이 구를 인간에게 집어던졌다.
기기기긱—!
공중으로 날아온 구는 인간에게 날아가며, 복잡하고 신묘한 움직임으로 넓은 그물의 형태가 되었다.
그렇게 인간을 덮쳤다.
그리고.
파지지직—!
전류를 뿜어냈다.
어인들은 이게 전류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그것이 생물을 마비시킨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었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뒤쪽에서 놀란 상단원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함부로 움직이면, 저 인간은 죽는다!”
어인들은 허풍을 떨었다.
죽일 방법은 딱히 없었지만, 미지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저건, 우리 지배자께서 직접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풀 수 없는 그물이다! 신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
믿기 힘든 상황이 펼쳐진 건 지금부터였다.
인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파지지직—
그물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텐데, 인간은 천천히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인간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야. 물고기 대가리.”
“어떻게 버티는 거야…….”
인간은 그물을 손에 쥐었다.
“익숙하니까.”
어인들은 하마터면 뒤로 물러날 뻔했다. 하지만 곧 기세를 되찾았다.
버티는 건 둘째치더라도, 풀 수는 없으리라.
지배자의 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만이 조작할 수 있는 물건이니.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촤르르르륵—.
그물을 쥔 그 손으로 다시 뭉치며, 구로 돌아가는 고대 유물.
발칸을 제외한 어인들은 놀랐다.
그 손등에서 빛나는 주홍빛의 송곳니 문신을 보았기에.
놀라지 않은 건 발칸뿐이었다.
그 손등의 문신을 방호벽을 뚫는 모습에서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발칸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스릉—
인간은 품속에서 검을 뽑아냈다. 아직 피가 다 마르지도 않은 쿠크리였다.
“네가 포식자라고 했지? 한 번 확인해 볼까?”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발칸은 지금 절망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