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2
92화 ep30. 천공의 기사 (2)
「번쩍번쩍한 갑옷만 입으면 다냐? 멍청한 녀석 같으니.」
산을 내려가는 내내 에드워드는 천공의 기사를 씹어 대기 바빴다.
“천공의 기사랑 선장님은 구면인가 보네요.”
「저 녀석이 지킨다고 난리 치던 그 꼬마가 날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근데 천공의 기사는 패배했고, 꼬마애는 죽었고? 그 때문에 낙담해서 나락으로 검을 버렸던 거구나?”
대충 알 것 같았다.
천공의 기사는 정의를 집행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계인들이 여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 ‘숙명’ 말이다.
리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천공의 기사의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공의 기사는 자신이 지키지 못한 소년을 잊지 못한 거야.”
「멍청하고 우둔한 새끼.」
나는 오히려 에드워드가 더 신경 쓰였다.
평소와 같았지만, 에드워드는 과하게 격앙되어 있었다.
천공의 기사가 저러지 않기를 바라는 거 같은데, 말주변이 부족하여 오히려 화를 내는 느낌마저 들었다.
“당신, 정말 괜찮겠어?”
“신경 쓰이는 게 있어?”
리리는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베두헨 기사가 그랬잖아. 천공의 기사가 크라켄을 잡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그런데, 설득 안 하고 이대로 내려가도 괜찮겠어?”
“설득이 될 거 같았어?”
“그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싸움을 시작하면, 천공의 기사는 내려올 거야.”
뒤를 바라보던 리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확신해?”
“확신하는 건 아니야.”
설산 정상에서, 천공의 기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천공의 기사는 절벽 너머, 지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련이 남았겠지.
“오지 않을까?”
“이유도 없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 직감이 틀리는 거 본 적 있냐?”
“아니, 없어서 짜증 나네. 보통은 몇 번 틀려야 하는 거 아냐?”
설산의 강추위도 익숙해지자 헛웃음을 지을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다. 사막의 무더위 속에 있다가 한순간에 방한복을 입고 다니자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거든.
반나절 정도 내려간 끝에 이전의 텐트를 찾아냈다.
“크르르…….”
렐릭시나는 위협적인 태도로 텐트 안쪽을 바라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 났나 싶어서 다가가 보니.
“뭐, 뭐야 이 괴물은……. 백귀야행 사냥마?”
기사가 다짜고짜 탈출하려는 걸, 렐릭시나가 막아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키라는 게 그런 의미까진 아니었는데.”
“크르릉—!”
“그래도 잘했어.”
우리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덜덜 떨고 있는 베두헨을 진정시켰다.
영양 실조와 저체온증에 시달리던 베두헨은 정신을 차렸나 싶으면서도 헛소리를 하고는 했다.
텐트의 소재를 신기해한다든가, 리리와 나를 변방의 귀족 관광객으로 착각한다든가…….
이대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게 아닌가 걱정하던 시점,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다시 내게 넙죽 절을 했다. 그렇게 넓은 텐트가 아님에도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서.
“과, 광인이시여! 이렇게 와 주셨군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리리.”
“……오, 광인이시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리리를 노려보았다.
“비꼬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차소희?”
“나는 당신한테 많은 걸 배우는 중이야. 아직 어리잖아?”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맞게 변한 거지?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 건가?
어느 쪽이든 알 바는 아니었으니 나는 우선 눈앞의 뉴페이스에게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광인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분명합니다. 혼란스러운 이 사막의 질서를 되찾아줄 검은 머리 인간이 이곳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건 당신이 분명합니다!”
“검은 머리 인간은 좀 여기저기 자주 보이지 않나요? 그거 하나 가지고 띄워 주는 건 좀 그런데?”
“정상에 다녀오신 거 아닙니까?”
어린 베두헨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기서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이 산의 위치 역시 우리 기사단 말고는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 모든 걸 해낸 건 당신이 예지 속 인물이라는 걸 뜻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속 편한 소리다. 고작 그런 걸로 사람을 영웅으로 몰아간다니.
좀만 약삭빠른 사람이면 코 베고 도망치기 딱 좋은 사고방식이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그런 복장이니까 얼어 죽지.”
베두헨은 사막의 민족들이다. 이들은 사막에서밖에 살아오지 않았다. 물론 밤에는 좀 서늘해지긴 하지만, 지금 저게 눈발이 휘날리는 설산을 오를 만한 복장은 전혀 아니란 말이야.
제 딴에는 따뜻하게 입겠다고 천옷을 몇 개 껴입은 거 같은데, 고작 저 정도로 이 산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패인이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뜻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설산은 허락되지 않은 자가 올라오면 길을 잃습니다. 정상을 찾을 수도, 내려가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리리와 나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올라가는 데 좀 빡세긴 했지만, 불가능하다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사단은 기사단 나름대로 이정표를 찾아가지만, 그마저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그런 경우였고……. 광인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
생각이 많아지지만, 단순한 답을 내기로 했다.
“기사단은 크라켄을 잡으려고 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크라켄은 이 사막의 거대한 위기기 때문에…….”
“가요. 기사단으로.”
“네?”
“나도 잡을 거거든요. 가서 같이해 보자고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는 언제나 그렇듯, 내 제스처를 금방 읽고 빠르게 짐을 챙겼다.
“……영웅 기사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겁니까?”
“아뇨.”
이들은 천공의 기사를 영웅 기사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어린 베두헨은 낙담했다.
“영웅 기사를 설득하지 못하면, 어차피 크라켄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 악마를 직접 보셨습니까? 그건……. 괴물 그 자체입니다. 현실에 존재해선 안 되는, 악마의 피조물이라고요. 영웅 기사가 가지고 있는 검만이, 그 괴물의 악한 영혼을 벨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사막의 질서를 회복할 선구자라고, 당신 입으로 그랬죠?”
베두헨은 자신의 말에 앞뒤가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잠시 어버버하다가는 간신히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 당신은 영웅 기사를 설득하는 역할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한 번 믿어 봐요. 어떻게 될지.”
“…….”
베두헨은 나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가 끝나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베두헨은 텐트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었던 리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려고 그래?”
“뭐가?”
“크라켄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아직 없잖아. 어쩌려고 벌써 판을 이렇게 벌려?”
“못 잡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 사람들이 당신한테 괜한 기대를 걸게 되잖아? 사기꾼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튀면 되지?”
“…….”
리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그거 농담이지?”
“반만.”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다.
“최선을 다할 거지만, 결과에 괜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괜한 부담을 가지면 시도하는 것 자체가 점점 두려워진다. 말하자면, 첫 발걸음을 떼는 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게 두려워져 방에 틀어박히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아주 가끔, 작은 부분에서만큼은 뻔뻔해질 필요도 있다.
리리는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천공의 기사가 그 말을 들었으면 좋을 텐데.”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하지만, 구태여 이 말을 해 주고 싶지는 않다.
천공의 기사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그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니까.
“그리고, 극복할 거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감.”
“그럴 줄 알았어.”
우리는 빠르게 짐을 챙긴 뒤 렐릭시나에 베두헨을 태웠다. 푸른 불꽃에 처음에는 두려워했으나, 그것이 뜨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기해하며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리리의 뒤에 올라탄 베두헨이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는 걸 확인하고.
“가자!”
“크허엉!”
박차를 가했다.
흩날리는 눈발이 송곳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달려 순식간에 사막의 해변에 닿았다.
사막과 설산의 경계선에 부는 바람은 정말 특별했다. 태양에 달궈진 바람과 살이 꼬일 거 같은 찬 바람이 기싸움을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커피에 탄 우유가 천천히 섞이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베두헨은 정박해 놓은 에드워드의 배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저 무기는…….”
“마수를 뭐시기 창.”
“마수를 멸하는 창.”
리리가 옆에서 교정해 준 덕분에 베두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순 도적단에게 뺏겼다고 했는데.”
“지나가다 주웠어요.”
“네?”
“갑시다.”
어린 견습 기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따로 질문을 하진 않았다.
우리는 배를 탔고, 견습 기사의 지시에 따라 항해를 시작했다.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첫 번째 해가 떴을 때, 우리는 기사단의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건 모래 위에 출렁이며 떠 있는 거대한 모함(母艦), 혹은 수상 기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형태는 기지에 가깝지만, 딱 봐도 운항이 가능한 형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리리는 기지의 모습이 눈에 보일 때부터 난간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그런 척하지만, 은근히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대단해.”
리리는 흩날리는 모래 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워져 가는 베두헨 기사단의 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매 기사단의 총본산입니다.”
“……상태가 좋진 않네요?”
“알아보시는군요.”
내 말을 들은 리리도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세 척밖에 없네.”
“크라켄이 지상에 행패를 시작한 후,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무역로 대부분이 끊겨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어인 도적단들까지 점점 활개를 치는 터라…….”
보급도 제대로 안 되고, 그 와중에 손실은 끊임없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최초로 크라켄이 출몰한 20년 전에는 얌전한 편이었다는데, 최근 3년 정도부터 갑자기…….”
“3년?”
갑자기 기억났다.
스마트폰에 찍혀 있었던 영상.
내가 이 사막의 존재를 알게 해 준, 드론이 찍은 영상인데.
그게 3년 전이랬는데?
“…….”
드론이 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꽤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을 거다. 간단한 소형 드론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계 생물은 알지 못하는 자극에 굉장히 예민하다. 온갖 것들이 다 있는 곳이라, 뭐에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혹시, 지구인이 보낸 드론이 크라켄을 자극한 건가?
확신할 순 없었으니, 이 생각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우리는 베두헨 기사를 따라, 본산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붉은 매 기사단의 총본산. 단장실.
원래 이곳은 천공의 기사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천공의 기사는 기사단을 이끌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붉은 매 기사단은, 천공의 기사를 단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천공의 기사가 창립한 게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멋대로 만들었다.
단장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단이었다.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는 임시직이 있는 게 당연했다.
수염이 가득한 주름진 얼굴, 베두헨답지 않은 거구. 다 헤진 손등의 가시는 그가 얼마나 오랜 기간 현장에 있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현 붉은 매 기사단의 섭정, 가우르 쉬라힐은 당돌하게 자신을 찾아온 한 인간과 뱀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찾아와서, 함께 크라켄을 토벌하자고 요청하는 인간.
견습 기사는 그가 성좌의 예지에 언급된 ‘광인’이라고 주장했다.
“견습의 말대로, 당신이 혼자서 설산을 발견했고 그 정상에 갔다 왔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 맞소.”
하지만, 사실 쉬라힐은 광인의 전설을 믿지 않았다.
‘창공의 부유자 윌슨’이라는 성좌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좌의 예지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쉬라힐은 가문 대대로 성좌의 가호를 받는 이였으니까.
다른 성좌의 예지 같은 건, 아무래도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다.
가우르 쉬라힐은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영웅 기사의 검을 되찾지 못한다면, 크라켄을 잡는 건 요원할 것이오.”
“단장님.”
검은 머리 인간은 자신의 눈빛에 밀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쉬라힐은 대단하다고 여겼다. 수목이 우거진 곳에서 물렁하게 자랐을 인간이 사막의 전사 앞에서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으니까.
“말하시오.”
“크라켄을 잡지 않으면, 이 사막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어요?”
“…….”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 사막은 이제 한계였다. 크라켄은 이 사막의 가장 중요한 무역로 세 개를 봉쇄한 상황이었으니까.
상인의 삶을 사는 베두헨에게, 이건 사실 굉장히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반년의 삶도 불투명할 정도로.
“그럼, 시도라도 해 보는 게 낫겠죠?”
“방법이 있…….”
그때, 밖으로 확인을 나갔던 종 하나가 뛰쳐 들어왔다.
“섭정님. 견습의 말이 사실입니다. 이 인간이 타고 온 배에 멸마살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크라켄을 토벌하기 위해 남쪽 공업왕국에서 만들어 낸 귀중한 보물.
“가짜가 아닌가? 모조품인지 철저하게 확인했나?”
“잘은 모르지만, 모조품이라고 생각할 품질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우르 쉬라힐은 습관적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엉킨 부분이 걸려 따끔함이 느껴지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가순 형제가 지휘하는 어인 도적단에게 탈취당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다시 되찾기 위해 온 물자를 끌어모으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이 인간의 배에 용접되어 있었다.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의 말에는 일리가 있소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예지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운명을 맡기는 건 내키지 않는군. 여봐라!”
“네!”
“성유잔(星流盞)을 가져오거라!”
그 말과 동시에 부하이 빠르게 움직여 거대한 접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위에, 사막에서 가장 귀한 것을 흘려 채웠다.
물이었다.
“들으시오.”
쉬라힐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진 거대한 접시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 물에 작은 빛이 하나 떠올랐다.
“이 잔은, 사용자에게 성좌의 가호가 깃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오.”
“오.”
인간은 옆에 서 있는 뱀파이어에게 말했다.
“너네 왕국에도 이런 거 있었어?”
“응.”
“개신기하네.”
“크흠.”
쉬라힐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큰일을 해내려는 사람은 성좌의 가호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순리일 터. 당신을 가호하는 성좌가 있다면, 조금 더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소. 우선, 뱀파이어부터.”
리리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접시에 담긴 물에 얌전히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쉬라힐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은 별이 하나가 떠올랐다.
“그쪽은 로열 블러드인가 보군.”
“네.”
“어디 가문인지 물어도 되겠소? 로열 블러드가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어서.”
“…….”
리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쉬라힐은 그저 바라보다가 검은 머리 인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 차례오.”
인간은 움직이지 않고 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쉬라힐은 속으로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성좌들이 아무리 신격화된 존재라고 하더라도, 신의 권능에 비교하자면 아래였다.
그래서 성좌들은 주신을 두려워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눈치를 보았다.
그렇기에, 성좌들이 아홉 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종족에게 가호를 내릴 가능성은 없었다.
이자의 지인이 승천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인간은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고.
“……?”
쉬라힐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쩌엉—
빛의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붉은 광원이 물 위에 발생했다.
“……말도 안 돼.”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뒤로, 조금 더 늦게 떠오른 푸른 광원.
이건 첫 번째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 되었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성좌의 가호를, 심지어 두 개를?
그 순간.
물 위에 아주 수많은, 좁쌀만 한 빛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이건 가호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으나,
성좌들이 이 인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아주 약간의 비명, 그리고 조금 긴 웅성거림 끝에 정적이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요?”
“이제 크라켄 잡으러 갈까요?”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상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이 상황을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천공의 기사는 나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크라켄의 거대한 다리가 이 산의 높이만큼이나 솟아오르더니.
쿵—!
요동치는 사막을 내리쳤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모래 파도가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최근 2년 동안 크라켄의 행동이 활발해졌다. 나락 아래에서 나올 생각인 걸까.
천공의 기사는 생각했다. 저게 나온다면 이 사막에 거대한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하지만, 천공의 기사는 이곳에서 나락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게 나오면 사막에 위기가 찾아온다.
나를 믿고 따르던 이들의 종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움직인다고, 저 크라켄을 막을 수 있는가?
이미 한 번 패배했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믿던 소년이 목숨을 잃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때, 천공의 기사가 크라켄에게 달려들지 않았다면, 소년이 용기를 내지 않고 크라켄이 두려워 도망쳤다면.
어쩌면 소년은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공의 기사는 나락 아래로 빨려 내려가는 크라켄의 거친 다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저것으로부터 패배한다면.
그걸 나는 견딜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천공섬에서 같이 살았던 유일한 존재, 용은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불멸자는 한 인간의 호언장담을 믿고 움직여 줬을까?
모를 일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조금은 궁금해졌다는 것이었다.
그 인간에게서 특별한 호기를 느꼈다. 다른 허풍쟁이들과는 달랐다.
그 인간은 정말로 크라켄에게 도전하기 위해 출항할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그 인간은 뭘 믿고 움직이는지.
어떤 각오로도 떨어지지 않았던 발을, 궁금증이 비로소 떼어 냈다.
기사는 처음으로 설산 아래로 향하는 길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왔던 인간이 발자국을 남겨 준 덕에, 그건 쉬운 일이었다. 그저 따라가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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