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voice phishing, but it's a life reversal RAW novel - Chapter 98
사장실의 기류가 이상하게 변한 것을 눈치챈 것인지 헤나는 연신 강주혁을 봤다가 송미진을 봤다가, 고개를 왔다 갔다 했다.
황실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주혁은 아랑곳없이 어물거리는 송미진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몇 초.
짧은 시간 생각을 마친 주혁이 동그란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송미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간 큰 여자들. 너가 쓴 게 맞아? ”
“ 네? 아, 네. 제가 쓴 건 맞는데. 그냥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쓴 거라. ”
“ 스트레스 해소용? ”
주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 ······네. ”
송미진이 약간은 민망했는지, 긴 생머리로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그런 그녀에게 주혁은 다시 한번 물었다.
“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 ”
“ 설명이요? ”
“ 응. 언제부터 썼는지, 무엇을 토대로 쓰고 있는지 같은 거. 그리고 일단 앉아. ”
“ 아. 네. ”
주혁이 의자를 가리키자, 송미진이 우물쭈물 자리에 앉았고.
“ 사장님.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
“ 네. 수고하셨습니다. 사설 가드 업체 마무리 부탁드려요. ”
“ 네. ”
황실장이 강주혁에게 꾸벅 인사하며 사장실의 문을 닫았다.
이어서 헤나도 강주혁에게 물었다.
“ 사장님. 저도 나가 있을까요? ”
“ 아뇨. 뭐. 딱히 들어도 상관없어요. 헤나 씨랑은 얘기도 안 끝났고. ”
“ 네. 그럼 저 커피 한잔 더 마셔도 되죠? 여기 커피 맛집이네. 머신기 저거죠? ”
어느새 다 마셔버린 커피를 추가로 뽑기 위해 헤나는 발랄하게 커피머신기로 움직였고, 주혁은 다시 송미진을 쳐다봤다.
“ 편하게 얘기해. ”
“ 아, 저······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드라마 작가는 입봉하기가 엄청 힘들어요. 보조로 기본 5년은 지내야 하고. 그래서 애들. 아, 백번 촬영 친구들이요. 그 친구들 만나기 전에 글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취미로 바꿀까 해서 쓴 게 간 큰 여자들인데 2년 정도 올렸어요. ”
“ 그럼. 청순한 멜로는 언제 쓴 거야? ”
“ 그건 최근에. 애들 만난 다음부터 쓴 거예요. ”
얘기들 듣던 주혁이 팔짱을 꼈다.
‘ 그러니까 그 청순한 멜로를 그 짧은 시간에 뚝딱 써냈다는 건가? 일반 드라마 작가들도 작품 들어가기 전에 반년은 허덕이는데. ’
새삼 주혁은 앞에 앉은 송미진의 재능을 높이 샀고, 송미진은 동그란 뿔테안경을 손가락으로 한번 올리더니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간 큰 여자들은 사실 제 얘기나 다름없는데, 우리 집이 저 포함해서 딸 셋이거든요? 엄마까지 포함하면 한 집에 여자 4명이 사는 거죠. ”
왜 아버지를 이야기에서 배제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주혁은 딱히 세세하게 묻지 않았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 그래서? ”
“ 제가 막낸데, 우리 집은 항상 전쟁터였어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엄청 싸웠어요. 심지어 리모컨 가지고도 싸워요. 다 보고 싶은 게 다르니까. 거기다 아침엔 여기저기서 악을 써대요. 화장실 빨리 나오라고. 저 그래서 고등학교 때 맨날 지각했거든요. ”
주혁이 피식했다.
“ 화장실 쟁탈전에서 진 건가? ”
“ 아뇨. 전 싸워보지도 못했어요. 애초에 전투병력도 아니었고. ”
송미진이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에 헤나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맞아. 인정. 완전 공감된다. ”
“ ······저. 헤나님. 나중에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실 수. ”
“ 네. 돼요. 그보다 빨리 다음 이야기! ”
금방 표정이 환해진 송미진이 말을 이었다.
“ 사장님은 아시겠지만, 드라마 대본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심의에 들어가니까. 그래서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어요. 그러다 ‘아, 이거 취미로 해야겠구나.’ 했을 때, 손가락이 너무 심심해서 쓴 게 간 큰 여자들이었고. 모티브는 언니들이었어요. ”
“ 캐릭터를 언니분들로 잡고 썼다? ”
“ 네. 거의 똑같아요. 캐릭터를 정하고 보니까, 순간 그런 얘기가 떠올랐어요. 성격이 제각각인 사이코에 파탄자인 여자 3명에게 대뜸 30억이 든 돈 가방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
사실 방금 송미진이 말한 류의 영화적 클리셰는 이미 꽤 나와 있는 상태지만, 주인공이 여자 3명이라는 것과 성격이 제각각인 사이코 내지는 파탄자라는 캐릭터는 조금 새로웠다.
‘ 옆에서 잘만 잡아주면 재밌겠는데. ’
주혁이 가만히 생각을 시작했을 즈음, 헤나가 뒤편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 그래서요? 그래서? ”
붙임성 좋은 헤나는 난리였고, 약간 내성적인 송미진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 상황에 주혁은 가만히 책상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고.
“ 송미진 작가님. ”
대뜸 송미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는 작가님이라는 명칭이 부끄러웠는지, 살짝 놀라며 되물었다.
“ 네?! ”
이어서 주혁이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 간 큰 여자들. 영화 만듭시다. ”
송미진이 자지러졌다.
잠시 뒤.
강주혁은 최근 보이스프로덕션에 합류한 감독들 중 거의 회사에 살다시피하고 있는 최명훈 감독을 호출했다.
그는 최철수, 류성원 감독들과 같이 3층 사무실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금방 사장실로 올라왔다.
최명훈 감독이 사장실로 얼굴을 내밀자, 주혁은 송미진을 간단하게 소개 후.
“ 여기 송미진 작가님은 우리 보이스프로덕션 소속 작가님인데. ”
지체없이 계획을 설명했다.
“ 작가님이 쓴 습작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찍어볼까 하는데. ”
최명훈 감독이 퀭한 눈으로 되물었다.
“ 작가 습작을 영화 시나리오로 각색한다는 말씀이신지? ”
“ 맞아요. 그리고 그 작업 총괄을 최명훈 감독님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예? 제가요?! ”
주혁이 미소를 머금으며 끄덕였다.
“ 네. 대신 이번 작업은 배급 빼곤 보이스프로덕션 단독으로 갑니다. ”
다음 날 아침.
송미진과 최명훈 감독이 간 큰 여자들 각색작업에 착수한 다음 날. 주혁은 아침부터 김점숙 할머니가 지내고 있는 숙소에 들렀다.
이어서 할머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본가로 돌아가시는 것에 관한 위험성을 알렸고.
“ 혹 할머님만 괜찮으시다면 이쪽에서 하영씨와 하영씨 동생과 지내보심이 어떠세요? 그렇게 하시는 게 저도 신경 쓰기 훨씬 수월하기도 합니다. ”
“ 그렇게 하자. 마. ”
할머님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이어서 강자매들이나 김재욱, 말숙까지 드라마 28주, 궁궐 이후 휴식기를 가지는 동시에 추민재 팀장에게 강자매들의 이사 관련 일을 넘겨준 강주혁이었고.
이른 점심 무렵.
헤나와 디쓰패치 본사에 들러, 단독으로 이적에 관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헤나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박기자는 인터뷰 내내 입이 귀에 걸린 상태였다.
물론, 주혁은 헤나의 이적 사실을 디쓰패치에만 전달한 것은 아니었다.
디쓰패치에는 오로지 단독 인터뷰 건만 던져준 것이었고, 헤나의 이적 소식 자체는 크게 보도될 수 있도록 모든 언론사에 뿌렸다.
대어 헤나의 이적 기사는 역시나 발 빠르게 퍼졌다.
『[단독]이적을 결심한 헤나,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보자!』
디쓰패치의 단독 특집 기사부터 시작해서.
『헤나, ‘강트맨’ 강주혁의 보이스프로덕션에 둥지 틀었다.』
『소속사 이적 한 헤나, 새 프로필사진 공개/ 사진』
『헤나, 소속사 이적 후 첫 인터뷰 “내년부터 가수로서 활동 박차”』
『강주혁의 보이스프로덕션 선택한 헤나, 그 뒷배경은?』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에 따라 대중들의 반응도 제각각.
-헐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
-이건 좀 의외네.
-거기 가수도 키우는거임?
-이번 드라마에서 꼬신건감.
-난 보이스? 강주혁 제작사 거기 좀 별로.
-헤나가 뭐가 아쉬워서? 이상한데.
-강주혁ㅋㅋㅋㅋ ㅈㄴ대어 잡았네.
-요즘 강주혁 회사 개쩌네.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소속 연예인도 조나 영입하고.
-주혀기오빠! 대박!
-개쩌네.
-강주혁 잘나가네~
이 모든 게 단 2시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그만큼 헤나가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주혁은 회사로 복귀해, 추민재 팀장과 미팅을 진행했다. 제작 쪽이야 현재 작가 송미진과 감독 최명훈이 간 큰 여자들 각색작업에 착수했으니 그렇다 치고, 투자와 매니지 쪽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추민재 팀장이 책상 위에 종이 몇 장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 대충 돌아보니까, 현재로선 파이낸싱(투자자, 투자사를 구하는 것)이나 기획단계인 작품은 이 정도가 전부야. ”
쓴 입맛을 다시며 추민재 팀장이 내민 기획서 및 시놉은 생각보다 양이 적었다. 잘해봐야 3~4 작품이 전부.
그러자 주혁이 팔짱을 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연말에 비수기니까 별수 없겠지. ”
“ 그렇지. 나도 작품들 대충 읽어 봤는데, 뭐. 전부 구려. ”
“ 흠. 이렇게 되면 당연히 오디션 정보 자체도 적겠네. ”
“ 맞아. 파이 자체가 적으니까. 내 생각에는 연말까진 내실을 다지고, 내년부터 움직이는 게 좋지 싶은데.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말이 도래하면 내년 설날 때까지 연예계는 바빠진다.
물론, 작품이 쏟아져서 바빠지는 것이 아닌, 여러 행사가 겹쳐지면서 연예인들은 물론 제작사 등 연예계 관계자들 모두가 작품보단 내실을 다지게 되고.
3사 지상파 시상식, 영화제, 특별행사, 기타 연말 파티 등등 적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1년을 마무리한다.
실제로 보이스프로덕션에도 여러 연말 파티와 행사 등의 초청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고, 그 중 꼭 가야 할 곳을 주혁이 추리는 중이었다.
“ 그래. 그럼 내년 설날 지날 때까지는 회사 내부적으로 미비한 건들 정리하고,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형이 직원들 포함 소속 연기자들한테도 전부 전달해줘. 참석 시상식이나 파티는 내가 추려서 문자 돌릴게. 소속 연기자들 스케쥴은 그때 정리하자. ”
“ 예예. 사장님. ”
-스윽.
말을 마친 주혁이 커피를 뽑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추민재 팀장이 몸을 돌려 팔을 의자 등받이에 두르면서 말을 던졌다.
“ 그런데 사장님. 그 뭐냐 DBS 쪽에서.”
-취익!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던 주혁이 추민재 팀장의 말을 잘라먹고 끼어들었다.
“ 형. 나 요즘 커피를 살려고 마시는 것 같아. ”
“ 어. 어? 갑자기 그게 뭔 소리냐? ”
“ 뭔 소리긴. 나도 좀 쉬겠다는 소리지. ”
“ 쉰다고? ”
“ 어. ”
말 그대로였다. 주혁에게는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하긴 했다.
-쪼로록.
내려오는 커피를 가만히 쳐다보던 주혁이 짧게 읊조렸다.
“ 며칠 쉬어야겠어. ”
늦은 밤. 강주혁의 오피스텔.
오피스텔에 도착한 주혁은 입은 정장을 그대로 입은 채 곧장 거실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러자 바로 한숨이 쏟아졌다.
“ 후우- ”
몇 초간 얼굴에 팔을 올린 채 누워있던 주혁이 요상한 신음을 뱉으면서 거실 탁자 위에 올려진 노트북을 집었다.
척살의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딸깍, 딸깍.
검색사이트에 영화 척살을 검색하니 여전히 흥행 중인 척살의 정보들은 빠르게 출력됐다.
『영화 ‘척살’ 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500만 넘을 듯.』
『300만 공약 지킨 하정훈, 그의 댄스 실력은?』
『파죽지세로 관객수 쓸어 담는 ‘척살’, 어디까지 올라가나?』
-탁!
상황을 파악한 주혁은 노트북을 거침없이 닫으면서 배 위에 노트북을 대충 올려놨다.
이어서 다시 한숨이 나왔다.
“ 후- ”
온몸이 피곤함에 축축하게 젖은듯한 기분에 주혁은 누운 상태로 천장에 밝은 빛을 뱉어내는 전등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거실 여기저기로 눈알을 굴리며 혼잣말을 뱉었다.
“ 뭘 하면서 쉬어야 되나. ”
거의 1년이었다. 그가 세상 밖으로 다시 발을 내딛고 거의 1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라 그런지 더욱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쉬는 날은 없었고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눈알을 굴리던 그의 눈에 거실 정면 책장에 꽂혀있는 수백 권의 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가 찍은 작품들의 대본들이었다.
영화부터 시작해서 드라마까지.
물론, 그가 탑배우로 등극한 후에는 대부분 영화를 찍어서인지 책장에 꽂힌 시나리오, 시놉 포함 대본들은 영화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형형색색의 표지를 두른 대본들.
-스윽.
꽂힌 대본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주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나이를 머금은 대본들 표지에는 지난 세월을 증명하듯 먼지가 쌓여있었다.
꼿꼿하게 서서 대본들을 쳐다보던 주혁이 혼잣말을 뱉었다.
“ 내 대본 안 본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네. ”
보관만 했지, 사실 강주혁 본인의 대본을 펼쳐본 지도 벌써 5년이 넘은 상태.
주혁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수백 권의 대본 중 표지가 꽤 깔끔해 보이는 영화 대본을 집었다.
-제목: 첫사랑공식
군대에서 갓 전역한 강주혁을 일약 국민 연하남으로 만들어준 영화 첫사랑공식 대본이었다.
-툭툭.
주혁은 대본 표지에 덮인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낸 후.
-팔락.
자신의 대본을 5년 만에 펼쳤다.
“ ······열심히도 했네. ”
펼친 대본에는 감독이 뽑아낸 지문과 대사가 반, 강주혁이 캐릭터 분석으로 적어둔 필기가 반이었다.
-이 부분 대사 강세는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출 것.
-대사 중간중간 공백을 부여해, 장면의 긴장감을 이어가자.
-이 컷은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슨 감정인지 헷갈리는 장면. 절대 대사에 정을 담지 말 것.
빈칸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했다.
-팔락, 팔락, 팔락.
다음 장에도 그다음 장에도 대본을 아무리 넘겨도 빈칸을 찾아볼 순 없었다.
“ 이때가 20대 초반이었나? ”
강주혁의 20대 초반. 연기에 욕심을 부릴 때였고, 어떤 연기를 펼쳤어도 만족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때쯤 홍혜수 팀장이 강주혁의 진영에 합류했었고, 강주혁이라는 배우의 대중적인 인기가 미친 듯이 치솟아 오를 때이기도 했다.
“ ······ ”
오묘한 기분이 드는 강주혁이었다.
자신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대본. 자신의 사적인 인생을 반납하면서까지 연기하고 싶었던 캐릭터. 그 캐릭터로 인해 대중들에게 받았던 사랑까지.
그는 무언가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희한했다.
분명 캄캄한 반지하 월세방에 5년간 처박혀 살 때는 ‘지랄 같은 대본들 태워버려야지’ 따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배신감과 우울증 그리고 대인기피증 공황장애까지.
부정적인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 대본을 펼친 순간 과거 자신이 경멸했었던 세상이, 연기가, 사람들의 불신들이 가볍게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게 가만히 대본을 내려다보던 주혁이 혼잣말을 뱉었고.
“ ······사람을 만나볼까? ”
-스윽.
무언가 떠올랐는지 속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1. 영화 보기(카라멜 팝콘도)
수첩 가장 첫 줄에 적힌 것은 그의 유일한 여가생활이었던 영화관람이었다. 그리고 강주혁이 가장 좋아하는 팝콘은 카라멜 팝콘.
가만히 보니 쉬는 날 무엇을 할지 메모를 하는 듯 보였고, 그가 계속해서 할 일을 적어 내려갔다.
-1. 영화 보기(카라멜 팝콘도)
-2. 송사장, 김건욱, 하정훈과 만나, 술 한잔.
“ ······음. 하정훈은 만나지 말까? 걘 일단 보류. ”
그 와중에 하정훈은 탈락했다.
같은 시각.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검은색 세단이 도로를 달리고 있다.
누가 본다 해도 꽤 잘나가는 기업인이 뒷좌석에서 연신 짜증을 내며 통화를 하고 있었고, 운전하는 기사는 기업인이 소리를 칠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렸다.
“ 아니. 시발아. 그러니까 왜 내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먹냐고! 일단, 교도소 쳐들어가라고! 그리고 니 애새끼들 중에 하나 꼬셔서 몸빵 세우라잖아!! ”
기업인은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죽여버릴 기세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 뭐? 아니. 시발! 니 밥줄을 내가 왜 책임져?! 네 사채 사업장이 탈탈 털리는 게 내 탓이냐?! 그러니까 내가 시킨 대로 그 할매를 똑바로 처리하던가. 개새끼들이 판은 니들이 엎어놓고, 왜 내가 책임을 져? 병신이 끊어!! ”
-팍!!
전화를 끊은 기업인이 핸드폰을 냅다 운전사 쪽으로 집어 던졌다. 덕분에 운전사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고.
“ 늙어빠진 할망구 하나 똑바로 못 따놓고 시발새끼가. 후- ”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던 기업인이 짧게 읊조렸다.
“ 강주혁 그 새끼가 어떻게 알고 나타났지? ”
그 순간 고급 세단은 높디높은 빌딩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빌딩 입구 위에는 회사 상호가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태신식품.
기업인은 박종주였다.
끝
ⓒ 장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