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Probably Made a Mistake in Getting Married RAW novel - Chapter (169)
외전 9화. 상관없는 사람.
2023.01.15.
제국 곳곳에 눈과 귀가 있는 오르카 황태자다.
정말로 멜리사가 어찌 지내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대놓고 생색을 내고 싶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순순히 내 입으로 오르카 황태자가 원하는 바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글쎄요. 영지 관리에 힘쓰느라 바깥 사정에는 귀 기울이지 못한 게 오래되어서. 아마 잘살고 있겠지요.”
혼사가 정해지자 잔뜩 신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던 멜리사다.
그 이후 어떤 연락도 받은 적이 없으니까 난 공식적으로 그 애의 처지를 모르는 게 맞다.
‘들려오는 소문을 생각하면 연락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 같지만.’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들을 독박 육아 중인 멜리사가 혹시라도 외부의 도움을 받아 도망칠까 봐 멜리사의 남편 쪽에서 아예 연락할 방법을 차단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오르카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흐음’ 하고 침음을 흘리더니,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일 년 전쯤인가⋯⋯ 후작의 사촌이 새집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더 이상 영지에서 빌붙어 살지 말고 독립하라고 했다나 뭐라나. 부부와 아이들이 줄줄이 쫓겨났다고 하더군요.”
유쾌한 이야기라는 듯 오르카 황태자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나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결혼하자마자 그리 좋은 처지가 아니었던 멜리사는 날이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아들의 사치를 참다못한 영주가 결국 부부와 아이들을 모두 본가에서 쫓아낸 거다.
쫓겨난 곳은 시골의 작은 저택인데, 말이 좋아 저택이지 평민들이 사는 코티지 수준이라고 했다.
‘부모의 원조를 최소한으로 받으며 농사를 짓고 산다는데⋯⋯.’
도박에 빠져 살던 바람둥이 남편과 시녀들의 시중을 당연하게 받고 살았던 사치스러운 아내가 만났으니 농사가 제대로 잘될 리가 없다.
늘 흉작이라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수준이라고.
그 와중에도 남편은 바람둥이 기질을 못 버리고 동네 여자들과 마구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바람에 마을에서도 ‘저 집이랑은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라며 소외당하는 모양이었다.
파티를 그렇게 좋아하던 멜리사가 수도의 사교 시즌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니까 살림살이가 아주 팍팍하긴 한 거다.
‘딱히 속이 시원하진 않아.’
하지만 딱히 멜리사가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 애의 불행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 애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완벽한 타인이 된 거다.
난 그런 삶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하께서 왜 그리 저희에게 손을 내미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진심입니까?”
오르카 황태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 높이 올라갈 곳 없는 공작의 작위와 수도 명문가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으며, 부유한 남작 영지를 소유한 부부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내가 누구에게 손을 내민단 말입니까?”
“그건 결과적으로 그리된 것이고요. 처음부터 저희 부부가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요.”
“음. 글쎄요. 그건⋯⋯.”
알테어가 가난한 남작이었을 당시에도, 내가 빈털터리로 후작가를 떠난 상태였을 때도 오르카는 우리 부부를 늘 신경 쓰고 있었다.
당시에는 원작의 공포에 질려 있었던 터라 오르카 황태자의 관심이 당연한 원작의 흐름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이었다면 알테어에게만 손을 내밀었을 거다.
하지만 오르카 황태자는 늘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마도 내 직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직감이요?”
“내 직감은 잘 맞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공작과 후작을 처음 봤을 때부터 딱 감이 왔다 이거죠. 이 사람들을 곁에 두면 누구보다 높이 날 수 있을 거라고.”
오르카 황태자가 빙긋 웃으며 아이를 고쳐 안았다.
자연스럽게 아이, 리안 황손에게 시선이 닿자 오르카 황태자가 질리지도 않고 또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을 때, 그때는 혼사를 막진 않을 겁니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막을 명분은 없다.
글로리아는 제대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능력을 갖고 있는 아이다.
아무리 부모일지라도 그런 아이의 선택은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전제가 있어⋯⋯!’
“정말로 ‘자연스럽게’라면요.”
오르카 황태자라면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사건을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사람이다.
그런 계략으로부터 글로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뜨고 ‘자연스럽게’를 강조하자 오르카 황태자가 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기억하죠.”
이번에는 오르카 황자의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다행히 거짓말을 한다거나,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리고 공작님의 의사는 제가 어찌할 수가 없어요. 제 남편은 아주⋯⋯.”
“팔불출이죠.”
오르카 황태자가 고민도 없이 내 말을 완성했다.
망설임 없는 그 평가에 처음으로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오르카 황태자와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수도에 알테어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고 생각하니 아주 유쾌했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가난뱅이 남작, 내가 읽었던 소설 속에서는 흑막을 따르는 무서운 악당이었던 알테어의 앞에 아내와 딸을 너무 사랑하는 팔불출이라는 소리가 붙는다는 게 신기하고도 따뜻했다.
이제 누구도 알테어를 떠올리면 나쁜 이미지를 연상하지 않을 거다.
어쩐지 뿌듯한 마음으로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훅 드리웠다.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상대도 놀란 듯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헉!’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난 단번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 아벨리나야!’
내가 읽었던 피폐 소설, [검은 장미의 배반>의 주인공!
원작의 나디아가 악녀와 함께 열심히 괴롭혔던 그 인물!
나디아가 되어 바인 후작가에 틀어박혀 산 이후 전혀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원작 여주인공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결혼 이후 수도 사교계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레이디나 귀부인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아서 아벨리나와도 크게 접점이 없었다.
“어머나. 혹시⋯⋯.”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던 아벨리나의 눈이 사르르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요 몇 년 간 사교계에 여러 사건을 터트리고 다녔던 탓에 내가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날 아는 체 못 한 이유는, 높은 신분인 쪽이 먼저 이름을 밝힐 기회를 주어야만 신분 낮은 쪽에서도 인사를 건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아벨리나이시죠. 나디아 에일스포드입니다.”
“제틀런드 공작 부인이시자, 바인 후작이시고, 또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시죠!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아벨리나가 잔뜩 들뜬 기색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원작에서도 밝고 아름답다고 묘사되었던 아벨리나는 실제로 보니 더욱 반짝거렸다.
“후작님께서 대활약하신 덕분에 여러 레이디들이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제 언니도 그 수혜자이고요. 이제 데릴사위를 들이기 위한 멍청한 정략결혼은 하지 않아도⋯⋯.”
신이 나서 이야기를 줄줄 쏟아 내는 아벨리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곧 수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송구합니다. 처음 인사드리는 건데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후작님께서는 모든 레이디와 귀부인의 귀감이시라⋯⋯ 부디 이해해 주셔요.”
“이해라니요. 이렇게 만나니⋯⋯ 너무 반가워요.”
반갑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읽었던 소설에서처럼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행복한 시절에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반가웠다.
내 인사에 묘한 감정이 실린 것을 눈치챘는지 아벨리나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녀의 의문이 더욱 커지기 전에 빙긋 웃으며 일상적인 대화로 화제를 돌렸다.
“황궁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황태자비께서 티파티에 초대해 주셨어요.”
“황태자비께서요?”
“네. 원래 가깝지는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빠르게 가까워졌답니다. 다소 엉뚱한 면이 있으시지만 아주 유쾌하고 귀여운 분이세요. 예전에는 사교계에서도 평판이 그리 좋은 분은 아니었는데⋯⋯ 다들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가요?”
결혼식에서 보았던 다소 무서웠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크게 뜨자, 아벨리나가 그런 반응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조금 무섭긴 하시지만, 속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세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자리를 마련해서⋯⋯.”
아벨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뒤에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알테어였다.
“나디아.”
알테어는 앞에서 쫑알대는 아벨리나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그녀를 무시한 채 곧장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 쪽이 먼저 끝난 것 같아서 황태자의 처소로 가는 중이었는데. 당신도 마침 끝난 모양이군.”
“네. 저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던 중이었어요.”
난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선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러 신호를 줬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무시하는 건 절대 예의가 아니었다.
“이쪽은 레이디 아벨리나인데, 방금 우연히 만나서 인사를 나눴어요.”
내가 소개하자 알테어가 뚱한 얼굴로 아벨리나를 쳐다보았고, 아벨리나도 후다닥 고개 숙여 알테어에게 예를 갖췄다.
공작이라면 엄청나게 높인 신분인 데다, 알테어가 황제의 신임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이라 아벨리나가 아주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알테어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아벨리나의 인사를 넘기고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 피곤하지는 않고? 걷는 건 힘들지 않나?”
우르르 쏟아지는 팔불출 질문에 난 민망해져서 다시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그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날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앞에 있던 아베리나의 입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두 분을 방해하면 안 되겠네요.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그리하도록.”
알테어가 아벨리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허락했다.
난 아벨리나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눈인사를 보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빙긋 웃으며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아벨리나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으니 알테어가 툭 말을 던졌다.
“저 여자가 그거지? 당신 이야기의 주인공.”
“응. 맞아요.”
난 놀라서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계속 날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바로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전에 말해 줬었잖아. 당연히 다 기억하고 있어.”
“아무 반응이 없길래⋯⋯ 잊은 줄 알았어요.”
“딱히 반응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우리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상관없는 사람.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아벨리나를 쳐다보았다.
알테어의 말이 옳다.
아벨리나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이야기와는 별개의 어떤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는 사람.
“맞아요. 상관없는 사람이야.”
어쩐지 속이 아주 후련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요.”
우리의 이야기가 있는, 우리의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