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Probably Made a Mistake in Getting Married RAW novel - Chapter (23)
23화. 아내의 사정.2021.08.22.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띄우는 사이 나는 착실하게 응접실 안으로 안내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파에 앉은 내 앞으로 엄청난 원단 샘플과 디자인화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일정이 촉박해서 의상 샘플은 많이 못 가져왔지만, 원단과 디자인은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살펴보시고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재단사가 친절하게 웃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알테어는 모든 결정을 온전히 내게 맡기겠다는 듯 파벨이 내어 온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예정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이……이게 아니에요! 오늘은 알테어의 옷을 맞추고 싶어서 재단사를 부른 건데…… 왜…….”
“내 옷?”
알테어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옷 같은 거 필요 없어. 지금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충분해.”
“회합에서 입을 좋은 옷은 따로 있어야 하잖아요. 원단과 장식품도 섬세하게 맞춰야 무시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 리가. 아무도 날 무시 못 해.”
확실히 그건 그렇다. 알테어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다들 오싹해져 예의를 차릴 테니까.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과 존재감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옷차림으로 상대를 판단하려는 자라면, 나도 가까워질 생각 없어.”
“그렇게 따지면 저 역시 새 옷을 맞출 필요는 없는 걸요…….”
“너랑 나는 다르지.”
“뭐가 달라요? 알테어가 안 하면 저도 안 해요.”
내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자 알테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이었다면 그 얼굴에 놀라서 벌벌 떨었겠지만, 이제는 그 모습도 익숙해진 건지 살짝 움찔하는 정도로 이겨낼 수 있었다.
“어휴. 두 분이 아주 사이가 좋으십니다.”
묘하게 이어지는 나와 알테어의 대치에 재단사가 넉살 좋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분의 옷을 팔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선 건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은 우선 마님의 옷을 고르시지요. 주문하신 마님의 옷을 시착하는 날에는 영주님께 어울릴 만한 옷 샘플을 가져올 테니, 그때는 영주님의 옷을 고르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내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지 알테어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재단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선 치수를 재야 합니다. 체형을 알아야 어울리는 옷을 찾을 수 있지요. 물론 마님께서는 수도에서 오셨으니 이런 과정을 아주 잘 알고 계실 테지만요.”
재단사는 내가 여느 수도 귀족들처럼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는 데 익숙하다고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나는 이런 일에 아주 서툴렀다.
‘난 사교 활동을 전혀 즐기지 않았는걸.’
소심한 탓에 무엇보다 사람 만나는 게 고역이었다. 꼭 참석해야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면 방에 콕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나 장신구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교계의 유행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방에 콕 틀어박혀 있어도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알테어 앞에서도 적당히 우아한 수도 출신의 아내를 흉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두 분의 손에 이끌려 쇼핑을 자주 했었으니까.’
그마저도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뚝 끊겼지만 말이다. 숙부는 나를 골방으로 몰아내고, 내가 가지고 있던 드레스와 장신구를 빼앗아 모두 멜리사에게 주었다. 후작 영애가 쓸 물건이니 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불합리한 처사라는 건 알았지만 내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후작가에서는 반항이라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는 쭉…….’
스스로 틀어박히는 삶과 타의에 의해 틀어박히는 삶은 완전히 달랐다. 숨죽인 채 후작가에서 살아왔던 시간을 떠올리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나는 재단사가 데려온 조수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마님께서는 가냘픈 편이시니 선을 최대한 단순하게 빼는 게 좋겠습니다. 머리 색이 아주 특별하시니까 옷의 색감도 너무 강하지 않게 넣어야 장점이 돋보이실 테지요.”
열심히 치수를 재고 있으니 거울에 나를 지켜보는 알테어의 모습이 비쳐 괜히 긴장이 됐다. 조수의 손길을 따라 알테어의 시선도 천천히 옮겨가 눈길 닿는 부분이 뻣뻣해졌다.
“제가 가져온 옷 샘플 중에는 이런 스타일이 어울리실 것 같은데, 우선 시착해보시지요.”
전신 거울 옆에는 옷을 입어볼 수 있도록 천으로 만든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다. 재단사와 조수들은 아주 능숙해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달라진 옷으로 거울 앞에 서니 기분이 묘했다. 내 모습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에일스포드로 시집오며 가져온 옷들은 전부 오래전 멜리사가 입던 옷들을 수선한 것이었다. 화려한 외모와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으로 생각하던 그녀의 옷은 대체로 내게 어울리지 않아서, 늘 어른 옷을 뺏어 입은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런데 재단사가 추천한 옷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미지에 딱 맞았다. 쇼핑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도 혹할 정도의 변신이었다.
“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님께서 훨씬 가녀리셔서 옷이 조금 크네요.”
재단사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조금 헐렁한 옷의 선을 잡아 핀으로 고정했다. 그러자 옷의 분위기가 훨씬 살아났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해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내가 만족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재단사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이번에는 알테어의 의견을 물었다.
“영주님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군. 이외에도 추천할 만한 디자인을 더 보여주겠나?”
* * *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
나는 녹초가 되어 소파에 늘어져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재단사는 떠났지만, 후폭풍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옷을 무려 13벌이나 주문하다니!’
부모님과 쇼핑할 때도 이렇게까지 많은 옷을 한 번에 산 적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여러 용도에 맞게 옷을 사느라 그때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13벌은 너무 과했다. 게다가 옷만 산 게 아니었다. 옷에 맞춘 모자와 장갑도 당연한 듯 주문되었으니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재단사의 수완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사색이 되어 말리지 않았더라면 알테어는 13벌이 아니라 130벌이라도 맞출 기세였다.
‘더 빨리 말렸어야 하는 걸까?’
이제 에일스포드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생겼고,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예정이지만, 남작 부인이 이런 식으로 사치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알테어가 죄다 주문을 넣어버린 터라 말릴 새가 없었다.
“왜 그래?”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져 있으니 알테어가 물었다.
“사고 싶었는데 미처 말 못 한 게 있는 건가? 그렇다면 재단사가 완전히 성을 빠져나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시 불러서…….”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소리쳐 당장이라도 재단사를 붙잡을 것 같은 기세의 알테어를 저지했다.
“오히려 반대인걸요.”
“반대?”
“너무 많이 산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많은 옷을 살 필요는 없었는데…….”
“그게 문제라는 거야? 전부 잘 어울렸어. 굳이 아껴 써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잘 어울리는 옷을 안 살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고 이렇게 사치할 필요는…….”
“사치라는 건 감당 못 할 비용으로 즐길 때 쓰는 말이야. 우린 여유가 있고,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준 건 너니까, 충분히 누려도 돼.”
알테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옆에 서 있던 파벨도 동의한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께서는 결코 불필요한 사치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또 감당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구매하신 거지요. 그러니 편하게 받아 주십시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말하니 더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서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알테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에서는 이보다 더 화려하게 지냈을 거 아냐. 바인 후작가의 부와 화려함은 유명하던데. 그간 에일스포드의 사정이 좋지 않아 맞춰 주지 못했지만 이젠 참을 필요 없어.”
알테어는 내가 후작가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숙부는 확실히 화려함으로 부를 과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내게만은 예외였다.
“그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고 있으니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혼납금도 그리 많이 보내지 못했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으니 후작께도 잘 해드려야겠지. 귀한 조카를 시집보내는 걸 무척이나 아쉬워하셨으니까.”
“네……? 혼납금요……?”
혼납금은 귀한 신부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신랑이 신부의 집안에 보내는 돈이었다. 혼납금의 규모가 가문의 격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유력 가문들은 결혼할 때마다 엄청난 혼납금을 보내고는 했다. 하지만 숙부는 가난한 남작이 혼납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면서, 너는 시집을 가는 날까지 도움이 안 된다고 나를 구박했었다. 그런데 혼납금을 보냈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알테어는 얼떨떨하게 되묻는 나의 반응이 금액이 적었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이야기를 덧붙였다.
“사실 이번에 갈라드 령의 과수원 지분을 받아낸 것도 혼납금을 생각해서야. 조금 늦었지만 바인 후작께 이 과수원의 지분을 드리면…….”
“아, 아뇨!”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는지 알테어가 드물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 숙부님께서는 그런 걸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혼납금은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정말로 괜찮아요! 정말로…….”
알테어는 물론이고 파벨과 안나까지 내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친정에 재물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여자는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숙부에게 귀한 에일스포드의 자산을 넘길 수는 없어.’
약속해달라는 듯 눈을 부릅뜨고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테어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응접실에서 나디아의 옷을 맞출 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분이 참 좋았다. 평소에도 나디아는 아름다웠지만, 제게 꼭 맞는 분위기로 차려입으니 장점이 더욱 빛났다. 그 모습에 홀려 그만 재단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엄청난 옷들을 주문해버리기까지 했다. 그게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정도의 돈을 쓸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가난한 영지의 살림을 신경 쓰느라 짠돌이가 되어버린 파벨도 말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재단사가 돌아간 뒤 나디아의 숙부와 혼납금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마치 숙부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
바인 후작은 하나뿐인 조카를 아주 아끼는 것처럼 말했다. 조카는 결혼을 원하고, 열악한 에일스포드의 상황도 이해하지만, 혼납금은 신부의 자존심과도 연관된 문제이니 어느 정도는 맞춰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라 알테어도 에일스포드의 자금을 최대한 끌어와 혼납금을 보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알테어의 이런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사정을 좀 알아봐야겠군.’
마침 사정을 알려줄 사람이 있었다.
‘파벨이 그랬지. 사용인으로 지원한 사람 중에 바인 후작가 출신이 있다고.’
이름이 마리라고 했다. 그녀를 통하면 미처 알지 못했던 뒷이야기를 알아낼 수 있을 테지. 어느새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알테어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