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04
나는 회귀했다 104
존 허드슨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쩐지 창백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휘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재차 물었다.
“말 그대롭니다. 아까 그 여자가 정보를 주고, CIA에 청탁을 넣었습니까?”
“…그렇다면?”
“가는 길이 다르겠죠.”
“지금 우릴 협박하는 겁니까?”
존 허드슨이 코웃음을 쳐도 할 말이 없다.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조직이니까. CIA는 미국의 정보단체. 미국 그 자체인 조직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럽다는 것은….
“그 여자가 저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이야길 해준 모양입니다. 저 같은 사람을 두려워하시는 걸 보니.”
존 허드슨의 눈빛에 망설임이 스쳤다. 그리고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휘 씨의 실력을 높이 사서, 개인적인 부탁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러시아와 관계를 정리하십시오.”
“….”
“먼저 신뢰를 보인다면, 우리 쪽에서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갑작스러운 수긍에 존 허드슨이 눈을 치떴다. 설마 이휘가 이렇게 쉽게 대답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하는 법.
이휘가 덧붙였다.
“대신, CIA도 신뢰를 보여주십시오. 저는 러시아 정부와의 관계를 원만히 정리할 테니 그 여자, 그리고 그 여자가 소속한 조직까지 넘겨주십시오.”
“그게 무슨…!”
“그게 아니면.”
이휘의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제게 CIA의 지시를 따라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우리와 적이 되겠단 소립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당연히 멍청한 짓이죠.”
이휘가 다시 걸었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말을 잇는다.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할 겁니다. 꼭 신뢰가 아니라 다른 매개체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를 죽이려는 자들과 한통속일지도 모르는 CIA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은 제게 더 위험한 도박입니다.”
“….”
“전부가 걸린 비즈니스에서 도박을 할 수는 없죠.”
존 허드슨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정하지도 못했다. 여기서 이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보원을 내치는 짓을 밥 먹듯 하는 CIA에서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들은 사적인 감적을 배제하고 철저히 국익을 위해 움직인다.
그런 자들이, 이휘와 같은 정보력과 힘을 가진-`심지어 20조 상당의 은닉자산을 보유한 범죄자이자 북한 그 자체였던 김정판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인물 대신 상대를 택했다면,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움직이고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다.
“고민해보세요.”
이휘는 그 말만 남기고 산책을 마쳤다.
CIA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
알란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처음 볼 거다.
이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직면해야죠.”
“그 여자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뇨.”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여자가 원하는 게 뭔지는 알 것도 같습니다. 동시에 저를 습격한 조직이 뭘 원하는 지도요.”
“그 여자가 그 조직 사람이었습니까?”
“맞습니다.”
“…문제가 커지는데요. 한 번 예상을 벗어난 자들입니다. 우리 시야 밖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귀신을 상대하는 꼴입니다. 이휘 씨처럼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하고 움직이는 분의 눈을 한 번 벗어났다면 두 번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알란은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흥분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부분 자기 뜻대로 모든 걸 이뤄온 사람들이 가지는 문제점은,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당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집이 앞서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한 발 물러서서 냉철하게 정황을 파악해야 하지만 이미 흐려진 판단력과 분별력은 내 고집이 맞는 건지, 아니면 남들 이야기가 맞는 건지조차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여기서 상대가 계속 몰아쳐 흔들어 댄다면 분별력은 더 흐려지고, 공포감과 좌절감이 온 몸을 지배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상황을 수 없이 겪어봤다.
이게 바로 알란이 모르는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상대가 이쪽 사정이나 움직임을 훤히 내다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움직이면 되니까. 상황이 좀 어려워진 것은 맞지만 우리 계획을 내다본다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됩니다. 정공법으로 가죠.”
“정공법이요?”
“그들이 원하는 우선 목표는 김정판이 가진 20조. 파나마 쪽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뭐라도 반응이 올 겁니다.”
“우린 우리 일을 하면 되겠군요. 한데 그 사이에 본진이 털리면 어떡합니까?”
“우리는 하나의 조직이 아닙니다.”
이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러 기업들이 우리의 자본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죠. 그들이 이쪽을 공략하려면 자본으로 하나하나 깨부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유기체가 된지는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심도 깊게 준비할 시간이 없었고요. 각자 잘 버텨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을 벌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어요. 저들도 그걸 알 테고, 그래서 서두르고 있는 겁니다.”
“서두른다고 보십니까?”
“그저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저들 목적은 김정판의 20조입니다. 비밀리에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비밀열쇠. 그런데 이 20조를 가지기 위해서는 날 처리하는 게 먼저에요. 현재로서 저들을 방해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럼 회유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쪽 대장도 아는 것 같습니다.”
“뭐를요?”
“둘 중 하나는 죽거나 포기해야 끝난다는 걸. 서로 회유할 수 없는 관계라는 걸요.”
알란이 입을 굳게 닫았다. 또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휘는 그런 자들과 싸우고 있다.
김정판과 장문택은 두 손을 들었지만 지금 상대하고 있는 자는 어떨지 모른다.
아니, 이번에는 이쪽이 포기할지 죽을지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가 되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게 웃은 알란이 말했다.
“꼭 이기십시오.”
이휘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알란은 확신했다. 그가 결코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며, 상대가 어떤 준비를 했다 해도 훨씬 더 까다로운 인물이라는 것을.
***
다음 날, 이휘는 호텔 밖에서 기다리다 나타샤를 만나서 인근 공원을 산책했다. 두 사람 주위를 알란과 알렉세이가 감시하고 있었다.
“파나마로 갈 겁니다.”
“휴가 가요?”
“네.”
나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다녀와요.”
“안 말립니까?”
“이미 말려봤는데 안 듣잖아요.”
이휘가 피식 웃었다.
“현명하네요.”
이내, 그가 의문을 표한다.
“이번에도 따라간다고 안 하는 이유는?”
“저도 양심은 있어요.”
“…?”
“지난번에, 제가 없었다면 그렇게 다쳤겠어요? 저랑 둘이 빠져 나갈 자신이 없으니 위험을 감수한 걸 텐데.”
맞는 말이다.
아직 어린데다,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왔을 그녀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신기할 뿐.
비단 자신 뿐 아니라 그녀를 목숨 걸고 지켜야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특별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천성이다.
“맞는 얘깁니다.”
“어머, 말이라도.”
“올바른 생각을 하는데 굳이 여지를 둘 필요 없죠.”
“게다가… 이번 일에는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함께 가고 싶지만, 따라가서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따라는 가고 싶다는 거군.
하지만 그녀 말처럼, 따라간다면 그녀는 이번 일에 짐이 될 것이다.
차라리 한국 정부와, 파트리아 인더스트리의 보호, 그리고 러시아 대통령이 파견한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 뜻을 펼치는 편이 낫다.
이휘가 말했다.
“이번에도 꼭 무사히 돌아오죠.”
“왜 그런 얘길 해요? 더 불안해지게.”
“그냥, 걱정하는 것 같아서. 안심하라고.”
“걱정해요. 안심은 안 되고요.”
“그렇습니까?”
“근데… 믿어요. 그 사람과 연관되어 있는 거죠? 당신을 죽이려 했던, 제가 말한 그 배후.”
“아마도.”
“한 가지만 명심해요.”
“얘기해요.”
“위험하면 피해요. 돌아갈 줄도 알라는 소리에요. 북한에서 내가 올 것도 몰랐으면서 끝끝내 목적을 이루려 했던 거, 멍청했어요.”
“결국은 성공했을 겁니다.”
“대신 많은 희생이 따랐겠죠. 그런 거 하지 말아요. 러시아에서 나를 죽이거나 납치하려던 자를 기차 밖으로 내던지면서, 그 후에 계속 악몽을 꾸면서 느꼈어요. 날 죽이려던 사람이 죽어도 이렇게 머릿속에 남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그래서죠?”
“…뭐가요?”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단 사람한테 다가가지 않는 거. 그 사람이 위험해질까봐서도 있겠지만, 당신이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 상처를 옮길까봐 망설이는 거잖아요.”
함께하면 그렇게 된다.
결혼을 하면 더더욱.
한 몸이 되어, 모든 감정의 잔재를 함께 나누게 된다.
“….”
“그래서 그렇게 절박하게 목적에 집착하는 걸 테고.”
“이미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휘가 말을 이었다.
“내 선택,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앞으로도 영영 벗어나지 못할 선택을 한 겁니다. 나는.”
“그럴 것 없어요. 당신이 뭐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예요. 당신이 죽지 않는 한 모든 게 바뀔 수 있어요.”
좀, 위안이 된다.
이휘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이건 여자로서가 아니라 동지로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돌아오면 노력이라도 해봐요. 그 여자한테 다가서든 부귀영화를 누리든 허상을 쫓지 말고 눈앞의 행복을 위해 살아보라구요.”
그렇게 말한 나타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뭐래.”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휘도 걸음을 뗐다.
그녀 말처럼 이번 일이 끝난다고 만사형통,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희망의 불씨가 일렁거렸다.
정말 그녀 말처럼 될 수 있을까?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자신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선택했고, 그래서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지만 가슴 한켠의 공허함만은 여전하다.
이휘가 나타샤를 호텔로 데려다주고 돌아서자 주위에 있던 알란과 알렉세이가 다가왔다.
“최후의 만찬 같군 그래.”
알렉세이가 말했다.
“저기 북한에서, 지금보다 훨씬 뒈질 확률이 큰일도 치렀으면서 왜 지지리 궁상이야?”
이휘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알렉세이.”
“왜?”
“알란과 나. 그리고 넌 내일부터 따로 움직인다. 계획은 가면서 설명하지.”
어느새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개를 절레 저은 알렉세이가 구시렁거렸다.
“보면 볼수록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