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07
나는 회귀했다 107
“알겠소.”
“장문택이!”
김정판이 소리치자 장문택이 그를 무섭게 노려봤다. 궁지에 몰린 늙은 호랑이의 눈길을 받아낼 수 있는 김정판이 아니다.
김정판이 시선을 피하자, 장문택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해. 더 이상은 못 봐준다. 언제까지 왕 노릇이야?”
이휘는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말없이 기다리자, 김정판이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지못해서긴 해도 이 상황을 받아들인 모양.
거기까지 확인한 이휘가 입을 뗐다.
“가자.”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차에 탔다.
차에는 알란만 있었다.
“알렉세이는?”
“주위에 혹시 따라붙는 놈들이 있는지 감시하라고 보냈습니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가죠.”
“예.”
차가 출발하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김정판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공항.”
이어서 질문한 것은 장문택이다.
“도피할 곳은 있습니까?”
“마땅한 곳은 없지만… 중국이라면 당신들을 보호해주지 않겠어?”
“중국 정부에서 당신들 뒤통수를 치고 우릴 도울 수도 있을 텐데?”
이휘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비자금 먹자고 나를 적으로 돌린다고? 내가 한국 정부, 러시아 정부와 어떤 관계인지는 당신도 알 텐데. 중국이 모를 리 있겠어?”
장문택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이휘는 다시 한번, 이번엔 가식 아닌 진심으로 코웃음을 쳤다. 중국 정부와 접촉할 수만 있다면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테지만, 그럴 일은 없다.
“딴생각 하지 마.”
이휘는 적당히 아는 체를 했다.
너무 만만해보여도 의심을 살 여지가 있다.
“어차피 당신들 목숨은 우리 손아귀에 있어.”
“왜 한국으로 가지 않소?”
“저들이 가장 경계하는 게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거야. 국제적으로 호구 취급받아도, 한국은 무슨 일을 꾸미기에 그리 적당한 곳이 아니거든. 아주 까다로운 편이지.”
“어떻게든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 하겠군.”
“그래.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중국으로 가는 건 예상하지 못할 거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다 알아. 상관 없다. 우린 당신들 목줄을 쥐고 중국 정부와 협상할 테니까.”
“협상이 끝나도 저들이 그쪽을 해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군.”
“걔들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잖아?”
“하아. 비자금이 탐나지 않소?”
“그 과정에서 약속된 금액을 받으면 된다. 나머지만 돌려주면 돼. 어차피 중국 정부 놈들도 비자금의 금액에 대해 정확히 모르잖아.”
“그건 어떻게 확신하오?”
“알았고, 그게 당신들 말처럼 큰 금액이라면 중국 정부에서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있나.”
“….”
잠시 말이 없던 장문택은 넘어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그럼 우린?”
끼어든 것은 김정판이다.
“니들한테 그 돈을 다 주면 우린 뭐 먹으라고?”
“내가 좀 떼어주지. 그러니까 떼쓰지 마.”
이휘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어차피 조금만 떼어줘도 평생 호의호식할 돈이잖아. 안 그래? 그 돈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줄타기 잘해라. 지금 우릴 쫓는 놈들이나 중국 정부나 너희 돈을 돌려줄 놈들은 없어. 그점을 잘 생각하라고.”
“….”
그 순간 알란이 신호를 보낸다.
“미행이 붙은 것 같습니다.”
“미행?”
“뒤에 차.”
이휘는 사이드미러를 확인했다.
알렉세이가 복면을 하고 운전하는 덤프트럭이 보인다.
무식한 놈.
하필 구해도 덤프트럭을 구할 게 뭐야?
하긴, 이래야 개연성이 맞지.
“젠장. 따돌려요.”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뒤에 있던 김정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움직임을 어떻게 눈치 챈 거지?”
“얘기했잖아.”
이휘가 조용히 덧붙였다.
“거기 더 있었으면 죽었다고. 너희를 지켜보는 눈이 한 둘이 아니라고.”
“젠장!”
김정판이 울분을 터뜨리고, 장문택이 입술을 축였다.
“우리한테도 무기를 주시오.”
“개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당신들을 믿는 것 같아? 어차피 우리가 잡히면 너희도 다 죽는다.”
“빌어먹을.”
장문택이 욕지거릴 뱉는 순간.
옆에 바짝 붙은 알렉세이가 핸들을 틀어 그들이 탄 차량의 옆면을 받았다.
콰앙!
알란이 핸들을 놓친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고.
그들이 탄 차는 가드레일을 받고 멈춰섰다.
콰아앙!
천둥 같은 충돌음과 함께 김정판과 장문택이 뒷좌석에서 쓰러지고.
알란과 이휘의 에어백이 터지며 움직임을 제약했다.
“으… 뭐라도 해봐, 이 새끼야! 너 싸움 잘하잖아!”
김정판이 악을 썼지만 두 사람을 정신을 잃은 것처럼 굴었다.
“젠장!”
그가 부랴부랴 터진 에어백 아래로 손을 뻗더니 이휘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든다. 장문택도 마찬가지였다. 알란의 허리춤에서 총을 뽑은 뒤좌석 문을 여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알렉세이가 먼저 쐈다.
퓩, 퓩!
알렉세이를 겨누려 했던 두 사람의 총구가 맥없이 떨어지고.
눈이 스르륵 풀리며 그대로 고꾸라진다.
“두드려 팰 뻔했네. 한 방에 기절해서 아쉽구만, 아쉬워.”
마취 총을 보며 중얼거리는 알렉세이.
그가 앞좌석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둘 다 완전히 맛이 갔어! 진짜 기절한 것 아니지?”
먼저 반응한 것은 알란이다.
“후우, 이 짓도 못할 짓이군요.”
이휘가 스르륵 눈을 뜨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속이려면 어쩔 수 없어요. 알렉세이.”
“왜 불러?”
“지금부터 네게 달렸어.”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 양반이 일 처리를 잘해야 하는데. 재수 없으면 머리에 총알구멍이 나게 생겼어.”
“잘할 거야.”
이휘가 확신했다.
백성범 팀장은 일을 허투루 처리할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알란과 알렉세이보다 더 빈틈없이 일을 처리할 사람.
세상에 등을 맡기고도 마음 편할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휘 자신을 키운 백 팀장이었다.
***
그 시각.
먼 거리에서 알렉세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일전 이휘와 CIA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봤던 여자였다.
보스에게 지시를 받았고, 김정판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모든 게 예상을 벗어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이휘는 김정판과 직접 접촉하면 안 된다.
사람을 써서 김정판과 접촉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사이, 이휘의 하수인을 처리하고 김정판의 신변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한데 이휘가 갑자기 동선을 바꾸었다. 직접 김정판을 만나 데리고 나오더니, 공항으로 출발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김정판의 신변을 확보하려 했다.
그 순간 정체 모를 복면의 남자가 덤프트럭을 운전해 세 사람이 탄 차를 받았다.
그녀 외에 누군가 이휘를 주시하고 있었고, 김정판을 빼돌리려는 것이다.
‘일단 확인부터.’
`누군가`의 정체를 몰라서 찜찜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복면의 남자가 김정판과 장문택을 끌어내서 생사확인을 마치면 죽일지, 살려둘지 생각할 작정이었다.
만약 아까 손에 든 총이 저들을 죽인 거라면 이미 김정판의 비자금을 찾을 방도가 있다는 뜻일 테고, 둘을 살려뒀다면 저 남자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그때였다.
신경을 가닥가닥 다 써서 최고조로 예민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저격의 순간에, 전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것은.
“…!”
“천천히 일어나.”
낮고 서늘한 목소리.
일부러 상대를 겁주려고 훈련 받은 것 같은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떤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머리통에 총을 겨누지 않고 다가와서 뒤를 잡고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거리를 두고 총을 겨눈 채 윽박질렀다면 몸을 굴리던지 고개를 젖혀 총구의 방향을 피했겠지만, 그는 방아쇠 당기는 틈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상대는 그녀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다.
신중한 자다.
실력은 더 무서울 것 같고.
“언제부터….”
그녀가 목소리를 짜냈다.
“날 미행한 거지?”
“알 것 없어.”
남자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배후를 밝혀라. 그러면 살려주마.”
여자는 확신했다.
거절하는 순간,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을 그을 것이다.
‘뿌리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격투술은 동료들 가운데서도 발군이다.
설령 한국에 급조한 CIA 사무실에서 이휘가 쫓거나, 알란이나 알렉세이를 보냈어도 달아날 자신이 있었다.
‘기분 나쁜데.’
그녀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파나마에 온 뒤로 계속 예기치 못한 일만 벌어지고 있다.
“후우.”
한숨 지은 그녀가 말했다.
“말할게요. 단, 조건이 있어요.”
“….”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덧붙였다.
“날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거래를 시작했으니, 신뢰를 보여줘요.”
“굳이 복잡하게….”
“내가 말하면.”
그녀가 말을 잘랐다.
“더 복잡해질 수 있는 일을 줄일 수 있어요. 당신 보스를 만나게 해줘요. 그럼 그가 누구든지, 모든 걸 얘기하죠.”
머리를 굴린 결과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한 점 망설임 없이 그녀를 죽일 확률이 90퍼센트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유일한 길이 있다면, 10퍼센트에 거는 수밖에.
이런 실력을 가진 자라면 자신을 죽일 권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겠다면서 지시하는 누군가를 걸고넘어지면 확인이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즉, 잘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언제든 날 처리할 수 있겠죠.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당신이 저기 아래 있는 자와 한패라면 이휘 쪽은 아닐 테니, 어쩌면 우리와 동지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닥쳐. 잠깐이면 된다.”
그러더니 남자가 유창한 중국어로 묻는다.
“어떡할까요?”
‘이런… 젠장.’
여자는 낮은 신음을 터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그 대상이 이곳에 있을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내, 상대가 말했다.
“대화를 해보겠소. 위험하지 않다면.”
“알겠습니다.”
담백하게 대답한 남자는 칼을 거두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여전히 뒤를 잡은 상태였다.
그녀 앞에는 가면을 쓴 남자가 서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동양인이다. 아마 중국인일 터.
“중국 정부에서 나왔소.”
남자가 말했다.
실력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저 남자는 중국에서도 높은 직책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여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상대가 말했다.
“난 얼굴도 모르는 자와 손을 잡지 않소. 당신은 허수아비일 뿐이고.”
“제가 모시는 분은 중국 정부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몰랐어요. 만약 저 아래 있는 사람이 중국 정부에서 보낸 요원인 걸 알았으면 저격하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흐음.”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빙그레 웃는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쪽이 섬기는 사람을 얘기하고, 연락하시오. 나도 내가 모시는 분께 연락하겠소. 사실이든 거짓이든 중국 정부와 인연이 있다니 하는 말이지만… 대화만 잘 풀리면 피 흘리지 않고도 우리가 확보한 김정판의 비자금을 나눌 수 있지 않겠소? 이야기가 잘 성사되면, 저 아래 당신네 적들의 신변까지 덤으로 넘겨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