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22
나는 회귀했다 122
CIA가 발칵 뒤집혔다.
따라서 자연스레 이휘 관련한 사건을 맡은 수사관이 국장실에 불려갔다.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해?”
국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정판의 비자금을 통째로 내준 것도 모자라 이휘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우리가 정보기관이 맞긴 한가? 엉?”
그럼에도 수사관은 등을 기댄 채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놈의 실체를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뭐?”
“저한테 맡기셨으면,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제 실적 아시지 않습니까?”
국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다 계획에 있다?”
“물론입니다.”
“그놈이 언론을 이용했어.”
국장이 책상 위에 올려진 신문을 툭툭 두드렸다.
“지난 몇 년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인 파트리아 펀드에서 돈을 뺀다는 말이 나돌 때부터 놈들한테 투자받은 우리 쪽 회사들이 난리야. 그렇게 불을 질러놓고 제 놈은 작전세력이 수작을 부리던 걸 막고 그 돈을 가로채서 자선사업을 했다고 떠들고 있지. 내가 보기에 우릴 제대로 엿 먹일 수 있다는 걸 경고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협박일 뿐입니다.”
“아니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돌려줘야지요.”
국장이 눈매를 좁혔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교활하고 비열하지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줄 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서 까다로운 범죄자나 조직을 상대할 때 주로 써먹는 카드였다.
“들어나 보자고. 보고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건 용납 못 해. 이 건에 대해서는 백악관도 주시하고 있네.”
“그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우린 부인할 겁니다. 미 정부 휘하 정보기관. CIA에 대해서는 지금껏 수많은 음모론이 재기되어 왔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 증거도 없지요. 그러니 이휘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데 있어서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김정판, 블라디미르 총리의 비자금을 꿀꺽한 것.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정부에서는 조사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이휘는 서서히 고립될 겁니다. 파트리아 펀드의 주가도 떨어질 거고요. 우리 쪽 기업들의 불만도 수그러들 겁니다. 오히려 파트라 펀드에서 밀어 넣은 투자금을 털려고 하겠죠.”
국장이 턱을 쓸었다.
“그 정도로 크게 휘청일 놈은 아니야. 알 텐데?”
“서로 증거 없는 진흙탕 싸움. 원래 수사기관인 우리는 잃을 게 없습니다. 돈 만지는 기업이 이런 더러운 일에 개입되어 있다면 그건 사업파트너들에게 굉장한 불안감을 줄 수 있지요. 일단 여기서 이득을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됩니다.”
“다음 단계?”
“이미 조취해뒀습니다. 러시아의 무기회사 알마즈의 실소유주가 놈이라는 걸 알아냈어요. 여길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그럼 정신 번쩍 차리겠죠.”
“큰 회사야.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무너뜨릴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수사관이 빙그레 웃었다.
“무기 쪽에서 8년 일했어요. 그쪽 라인은 꽉 잡고 있습니다. 놈은 제 상대가 못 돼요.”
“기대하지.”
국장은 일단락 지었다. 수사관이 비록 김정판의 비자금은 회수하지 못했어도, 이번에도 김정판과 장문택을 CIA 이름으로 잡아넣었다. 심지어 이번에 문제를 일으켰던 골칫거리 동업자, 블랙 역시 시끄러워지지 않게 마무리했다.
아직 현역이란 뜻이다.
***
그사이 이휘는 출장 간 알란과 알렉세이로부터 차례로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끊은 그의 표정이 굳어있자 방준수가 물었다.
“뭐야? 왜 그래?”
“CIA에서 손을 쓴 것 같아.”
“CIA에서?”
“미 정부와 거래하는 무기회사를 단도리한 건 물론이고 우리 쪽 회사 두 곳을 빼갔어. 위약금을 치르고라도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했다더군.”
무기 관련한 사업은 알란이 총괄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해주자 방준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그러니까. 문젠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거야.”
“널 철저히 박살 내려 들겠어.”
“맞아.”
“다음은 어딜 칠까?”
“…우리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여러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것 같아.”
“어딜 공격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네.”
“그래. 내부적으로 다시 한번 단속해 줘. 그쪽에서 들고 있는 패를 다 쓸 작정인 것 같으니까.”
“무슨 패를 썼을까? 단번에 우리한테서 고객을 빼앗을 수 있는 패가 뭘까.”
“가격이겠지.”
“위약금을 치르더라도 거래처를 바꿀만큼 낮췄다?”
“그래. 치킨게임을 그쪽에서 먼저 시작한 거야.”
“미국경제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르겠다는 거군.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어.”
“그렇지.”
이휘가 턱을 쓸었다.
“중국에 다녀와야겠어.”
“중국에는 왜?”
“알마즈를 날려버리려고 한다… 너무 액션이 커. 다른 쪽을 치려는 거야. 우리가 알마즈보다 더 큰 이익을 얻고 있는 건 알리지.”
“설마, 미국 기업들에 했던 짓을 중국에도 한다고?”
“중국 정부와 합의해서 마원을 날려버리고, 알리에서 우릴 내보내려 할 거야. 우리 다음 많은 지분을 가진 일본 쪽 소믹뱅크를 움직이면 못할 것도 없지.”
“손정학…!”
크게 외친 방준수가 물었다.
“그렇다 치고. 중국에 가서 뭘 하려고? 그걸 어떻게 막게?”
“마원을 지키고, 알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국 투자자들을 설득해야지.”
“빌어먹을.”
방준수는 입술을 씹었다.
“완전히 엿 먹었네.”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가 그리 태평해?”
이휘는 등을 편히 기댔다.
“내가 지금껏 적들을 상대해 오면서 말이야. 항상 내 계획대로 흘러갔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방준수는 눈을 치떴다. 그렇게 묻긴 했지만 알란이나 알렉세이에게 보고 받은 바로, 그리고 나타샤에게 들은 바로는 이휘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비가 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반격을 가했다고.
그저 임기응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휘는 이를 부정했다.
“나는 항상 실패해.”
“…네가?”
방준수는 눈매를 좁혔다.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휘는 진지했다.
“누구나 그렇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안타깝게도 난 실패가 적은 사람도 아니고. 예언가는 더더욱 아니지. 근데 어떻게 허를 찔리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고 내가 들을 수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는데.”
“그럼 뭐야? 지금까지 어떻게 이겨왔던 건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방준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이었다.
이휘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를 자극하는 거지. 상대의 반응을 보고 움직이는 거야. 최선의 공격은 뭐다?”
“…?”
“방어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란 얘긴 들어봤어도, 최선의 공격이 방어라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일격에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이길 수 있어. 잘 버텨낸다면 말이지. 문제는 대부분 일격을 맞으면 정신을 못 차린다는 거야. 하지만 미리 어떤 충격이 있을 걸 알면 정신줄 놓지 않을 수 있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같은 말을 하네.”
빙그레 웃은 이휘는 일어나며 어깨를 짚었다.
“그만큼 방어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거야. 우리가 간을 보고 저쪽이 공격을 시작했으니, 우리는 저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역전극을 노리면 되는 거지. 한 방에 때려눕히진 못해도 휘청이게 할만한 기회를 포착해야 돼.”
“너무 추상적이야.”
“이번에 알리를 방어하고 더 이상 저들이 얻는 게 없다면 공격하다 지칠 거야. 그때가 기회지.”
“후우, 그럼 내 모든 플랜은 우리가 철통같이 방어했을 때, 반격을 준비하는 데 치중할게. 그 얘길하는 거지?”
“역시 찰떡같이 알아듣네. 형이랑 대화하면 편해.”
“난 너랑 대화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불편해. 재미는 있다만.”
방준수가 씨익 웃었다.
“알리, 잘 막아 봐. 난 미국한테 한 방 먹일 계획을 짜볼 테니까. 그 계획에는, 우리를 함께 공격하려던 놈들도 포함돼 있을 거야.”
“아니, 일본은… 손정학과 중국에서 만나는 걸로 추진해줘. 내가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야.”
“왜?”
“손정학은 일본 최대의 부호 중 한 명이야. 잘만 하면 일본한테도 목줄을 달 수 있어. 그럼 우린 미국에 맞서서 좀 더 당당해지겠지.”
“…알겠어. 안면은 있으니 내가 연락해볼게.”
“고마워.”
***
사무실을 나선 이휘는 나타샤와 만났다. 그리고 저녁에는 평범한 커플처럼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식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데이트 제안에 나타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뭐에요?”
그래도 식사는 마칠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이휘는 짐짓 모른 체를 했다.
“뭐가요?”
“나한테 데이트 신청했잖아요.”
“평범하게 영화 보고 밥 먹고 싶다고 했더니 부리나케 달려나왔잖아요?”
“하아, 부리나케 달려나온 적 없거든요. 제 차림을 보세요.”
차림이 뭐 어때서?
청바지에 흰 티만 입어도 아름답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악세서리 하나 없어도 어느 누구보다 빛이 난다.
그녀의 자태를 감상하던 이휘가 말했다.
“예쁩니다.”
“……”
나타샤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이휘가 풋 웃었다.
“역시 어리면 뭘 해도 예뻐요.”
“우씨. 지금 나 놀려요?”
“네.”
“…됐고, 왜 이러는 거예요? 이유를 모르니까 불안해서 식사도 마음 편히 못했어요.”
“미안합니다. 소화 안 되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 생각을 좀 했어요.”
“무슨 생각이요?”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좀 여유를 찾을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한 결 같았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에 나타샤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갑자기….”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 정식으로 다시 데이트 하자고. 그 얘기하려고 부른 겁니다.”
“진짜….”
“…?”
“멋대가리 없네요.”
“하하하.”
“…그래도 뭐, 받아들여야죠. 이러면 쉬운 여자 같으려나?”
“나한테 쉬운 여자는 그런 기준이 아니에요. 스스로를 쉽게 생각하는 여자지. 나타샤는 그런 분이 아니고요.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이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그러자 나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바쁜 거 아니에요?”
“집에 가자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답답해서 산책이라도 하자는 거죠.”
나타샤가 그제야 냉큼 일어났다.
“흠, 뭐 나쁘지 않은 제안이에요.”
“그래요?”
피식 웃은 이휘가 계산하려 하자 그녀가 선수 쳐서 음식값을 치렀다.
“다음에 사요.”
“왜요?”
“그래야 또 만나자고 조를 명분이 있으니까.”
“그런 얘기 너무 당당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안 쉬워보인다면서요?”
“믿음이 많은 아이네.”
나타샤는 못 들은 척 걷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번에도 위험해요?”
이휘는 그 말을 또렷하게 들었다. 평소 같으면 듣고도 못 들은척하거나 모르겠다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글쎄요.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사업 관련해서 가는 거니까요.”
그럴 줄 알았다.
그때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