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4
나는 회귀했다 14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이휘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네, 그리 보내주세요.”
뚝.
전화를 끊자마자 현관에 들어선 순경 둘이 인사를 건넸다.
“경찰입니다.”
그가 이휘를 보았을 때, 이휘의 태도나 표정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었다.
이휘는 창백한 얼굴과 얼어버린 몸동작으로 순경들을 대했다.
“여기에요.”
이휘가 시체를 가리켰다.
시체를 본 순경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진짜였네요.”
대답하지 않은 선임 순경이 이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네.”
“학생은?”
방준수는 연기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이휘의 연기를 보고 나서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무서운 놈….’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이 든 방준수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임 순경이 그나마 의사소통이 되는 이휘에게 물었다.
“몇 가지만 확인할게요.”
“네.”
“여기 학생이 주거하는 자택 맞죠?”
“예.”
“보호자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따로 사시는 할아버지와 친척 분들이 계세요.”
“지금 오고 계신가?”
“…연락은 했습니다.”
이휘가 초조한 듯 눈알을 굴리자 순경이 말했다.
“일단 서로 가야될 것 같은데. 괜찮죠?”
임의동행을 요청하는 거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순경들을 따라 집을 나서기 전 시체가 된 흑인을 짧게 응시했다. 저놈이나 자신이나 비슷한 부류였다. 방준수는 놀랐겠지만 이렇게 겁에 질린 소년을 연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첩보전을 펼칠 땐 겉과 속을 분리해서 완벽한 타인으로 위장하는 게 기본이었다.
당연히 순경들도 꼼짝 없이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그들은 이휘와 방준수를 안심시켜가며 경찰서까지 바라다 주었다.
강남경찰서에서 형사과에 인계됐다.
늦은 시간이라 당직 형사들만 남아있었다.
형사들의 분위기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경들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방준수 앞에 앉은 담당형사가 신분조회를 마친 뒤 펜과 종이를 주며 진술서를 요구했다.
“여기 오늘 있었던 일, 사실대로 적어.”
딱 취조하는 말투다.
형사가 전화기를 밀었다.
“보호자한테 전화하고.”
“저기요.”
제 성격 어디 안 가는지, 방준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저는 혐의가 없고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강압적인 태도는 불쾌합니다.”
“이 새끼 보게?”
“욕도 하지 마시고요.”
“좀만한 새끼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사람이 죽었어. 너희는 그 현장에 있었고.”
“그럼 증거 찾고 혐의를 밝히세요. 진술서는 써드릴 수 있지만 그 전까지 보호자는 못 불러요. 그리고 욕하지 말라니까요?”
“하, 골 때리는 새끼네.”
형사가 쌍심지를 켰다.
“분위기 파악 안 돼? 여기가 여성청소년과 같냐? 여기 형사과야.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이 의심된다 이 말이다. 그래서 형사과로 온 거야. 내 말 알아들어? 설령 죽은 놈이 강도라 해도 과잉진압으로 구속될 수 있다는 거야!”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방준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불합리합니다. 저희가 죽였다는 증거 있어요? 그리고 그놈은 칼을 휘둘렀어요. 저흴 기다리다 죽이려 했고요. 심지어 한 명은 칼에 찔렸고 얘는 칼에 베였어요. 저희 같은 미성년자가 흉기도 쓰지 않고 칼 든 어른을 어떻게 이겨요? 만약 저희가 죽였다고 쳐도 그건 정당방위입니다.”
“아주 꼴값을 떤다. 판사 나셨어. 닥치고 보호자한테나 연락하지?”
“….”
방준수가 대답하지 않자 형사가 뭐라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2000년대에는 용인되기 힘든 90년대의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를 만끽하던 이휘가 끼어들었다.
“보호자는 안 부릅니다.”
“뭐?”
형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방준수도 놀란 눈으로 이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마라.’
이휘는 속으로 말했다. 방준수의 보호자라함은 시골에서 단 둘이 살았다는 할머니를 뜻함이다. 얼마나 놀라시겠나. 학교를 그만둔 것만 해도 충격적인데 자신이 데려오자마자 이런 사단이 났으니,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방준수나 방준수의 할머니를 볼 낯이 없었다.
“곧 보호자를 대신할 대리인들이 올 겁니다.”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야?”
형사가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누군가 형사과 안으로 들어섰다. 이휘의 어깨 너머로 그를 본 형사가 벌떡 일어났다.
다른 당직형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경례를 붙였다.
“서장님.”
서장?
여기서 서장이 왜 나와?
이휘도 적잖게 당황했다. 그가 경찰이 도착하기 전 요청한 대리인은 경찰서장이 아니다.
“쉬어.”
경찰서장이 걸어와서 이휘에게 물었다.
“이휘 학생?”
이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방준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방준수 학생?”
“…그런데요.”
경찰서장이 형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변호사가 도착할 거다.”
“변호사… 가요?”
형사들이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인 서장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다친 학생이 있다며?”
“정태수라고, 지금은 병원에 가있습니다. 그쪽으로 민 형사 보냈어요.”
“철수시켜라. 좀 안정되면 그때 조사해.”
“예? 하지만….”
“그쪽에도 변호사들이 가있다. 다친 피해자 조사하다 아무런 혐의 없으면 과잉수사로 시끄러워질 거 몰라?”
원래 같으면 빠른 진상파악을 위해 병원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터였다.
그러나 서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토를 달 수 있는 형사는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방준수를 몰아붙였던 형사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그때, 경찰서로 정장에 서류가방을 든 변호사 한 명이 형사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서장과 형사들을 거들떠도 안 본 채 이휘에게로 곧장 걸어와서 말했다.
“사장님이 보내셨다.”
큰아버지를 뜻함이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그래. 얼른 진술서 쓰고 나가자. 다 쓰면 내가 직접 검토해줄 테니까.”
“이봐요! 당신 누구야?”
형사가 묻자 변호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딱 봐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데 반말을 하니 기분이 나쁜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변호사는 다른 말없이 명함을 꺼내 건넸다.
“법무법인 태청 대표 강영훈이요. 이 학생들은 우리 로펌 VIP고. 문제 있습니까?”
“….”
형사들 모두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처음 그에게 반말했던 형사만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미란다 원칙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설령 이 학생들이 피의자라 해도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는데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더구나 태청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로펌이다. 그런 곳의 VIP면 아마 검찰에 출석할 때도 십여 명씩 변호인단을 꾸려서 출석할 것이다.
검찰에서도 눈치를 보느라 진술서를 받고 확실한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면 굳이 바로 구속수사를 벌이진 않을 터.
‘대체 너 정체가 뭐냐?’라고 묻는 듯한 형사의 눈빛을 받은 이휘가 씨익 웃었다.
“저도 펜이랑 진술서 주세요. 얼른 할 거 하고 나가서 배나 채워야겠습니다. 오늘따라 얼큰한 순두부찌개가 땡기네.”
***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쓰는 동안 죽은 흑인의 신분조회가 안 된다는 연락이 왔다.
킬러로 활동하는 놈들이 대개 그렇다.
어차피 죽거나 잡힐 텐데, 잡히는 순간 인생 종 치는 삶을 사는 놈들에게 진짜 신분 같은 건 발목을 잡는 족쇄에 불과하다.
놈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신분은 모조리 위조된 거다.
계좌도 스위스 비밀계좌 같은 걸 이용하고는 한다.
이렇다 보니 수사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리 없었다.
더욱이 칼부림을 벌인 놈을 빼면 자리에 있던 것은 전과 하나 없는 평범한 남학생 셋. 그중 하나는 가슴을 칼에 찔렸고 이휘는 칼날에 긁힌 상처를 입었다.
꼭 이휘의 뒷배경이나 진술서가 아니라도 세 사람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을 죽인 가해자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경찰들은 이휘와 방준수를 구류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경찰서를 나선 이휘는 방준수와 순두부찌개를 한 그릇씩 때렸다.
방준수는 충격은 큰지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법무법인 태청 대표 강영훈였다.
“사장님 말이, 네가 회사에 결정적인 지분을 쥐고 있다던데.”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아저씨를 여기로 보내신 걸 테고요.”
이휘에게 문제가 생기면 지분의 행방도 묘연해진다.
할아버지가 가져가면 다행이지, 아직 새로운 후견인이 결정되지도 않은 시점에 재수 없으면 동생과 나눠가져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휘를 도왔을 테고.
강영훈이 입맛을 다셨다.
“대단해. 그 사단이 났는데 상황을 컨트롤하다니.”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 이휘가 대뜸 물었다.
“김상철 대표 아시죠?”
강영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 관계는 알만했다.
할아버지의 고문변호사가 김상철이었다면, 큰아버지의 고문변호사는 강영훈이다.
강영훈은 큰아버지를 왕좌에 올리려고 한다.
즉, 큰아버지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해 김상철의 대항마로 선택한 게 강영훈인 셈이다.
전생에서는 김상철이 이겼다.
큰아버지가 태청 로펌과 강영훈을 등지고 김상철과 손을 잡는 쪽을 택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사건이 있기 전 김상철 대표를 만났어요.”
“어디서?”
“아파트 복도에서요. 김상철 대표가 집에서 막 나오는데 마주쳤죠.”
“너희가 오기도 전에 집에 와있었다는 거냐?”
“저희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얼마 전까지 제 후견인이었으니까.”
“지금은 아니지. 그 후에는 어떻게 됐어?”
“김상철 대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고, 저희는 집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칼을 가진 흑인을 본 거고요. 그 다음에는 진술서에 썼던 그대로에요.”
“진술서에는 왜 쓰지 않은 거냐.”
“검찰에서 먼저 알면 꼬리를 감추지 않을까요? 김상철이 약을 친다거나.”
강영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서… 일부러 숨겼다고?”
“TS와 태청 사이가 앙숙인 거 알아요.”
“하!”
강영훈이 고개를 저었다.
“점점…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네. 그래서? 나한테 TS를. 아니, 김상철을 잡아 달라?”
“증인이 되어드리죠.”
이휘는 자신의 말을 지킬 생각뿐이었다. 약속했지 않은가. 김상철의 모든 걸 빼앗아주겠다고.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이제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한 마당에, 목숨 걸고 싸워주는 게 예의다. 그게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다.
잠시 침묵하던 강영훈이 말했다.
“증언만으론 부족해. 비공식 수사라도 진행시키기 위해선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검찰 입장에서도 시간낭비가 아니고 내 체면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대표님이 확실하다고 하면 심증은 되겠죠?”
“물론. 내가 확실하지도 않은데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테니까. 검찰에 믿을만한 친구가 많다.”
“그럼 제 말을 믿고 수사를 진행시켜주세요.”
“그건….”
“먼저 신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타악.
물 잔을 내려놓은 이휘가 씨익 웃었다.
“오늘 죽은 흑인은 킬럽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놈들이니 시간이 지나도 신분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알 수 있겠죠. 제가 그놈을 죽였습니다.”
“…!”
강영훈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이휘가 말했다.
“철저하게 처리했으니 죽은 놈은 아마도 사고사로 밝혀지겠죠. 그리고 그놈이 죽기 전 김상철 대표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증거. 24시간 펜트하우스 복도를 찍는 사제 CCTV 테잎이 있습니다.”
“사제 CCTV?”
플랜B, C, D, E… 만약에 만약까지 대비해야 한다. 그 생각이 강박에 가깝게 잡혀있던 이휘다. 그래서 마치 안가(작전 요원들이 유사시 피신하는 곳)처럼 집 안의 시크릿 룸에서 침입자를 대비할 수 있는 CCTV를 달았던 것이 변수가 됐다.
물론 강영훈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번지자 이휘가 간단히 해명했다.
“김상철 대표가 배신했다는 걸 알고 혹시 몰라서 설치해둔 거에요. 집안은 뒤져도 복도는 뒤지지 않을 테니까. 뭐라도 사라지면 출입시간을 입증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침 김상철 대표가 걸려든 거고요. 다시 말해 김상철이 검찰 조사에서 알리바이를 만드는 순간, 놈은 끝이에요.”
“수사를 먼저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놈이 거짓말을 지어낼 테니까?”
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영훈이 기가막힌지 멍하니 앉아있다가 되물었다.
“그 정도면 네가 직접 검찰에 가서 수사의뢰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검찰에 친구가 있는 건 김상철도 마찬가지겠죠.”
강영훈은 조용히 이휘를 응시했다. 물잔에 물을 따라 들이킨 뒤,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오한이 드는 게 찬물을 마셔서는 아니겠지?”
어지간히 놀랐을 거다.
물려받은 사업체를 판 것도 모자라 지분까지 팔아 치워가며 후계자 경쟁에서 빠지려 하고 있으니.
그것도 그거지만 킬러를 죽이고 큰아버지에게 팔기로 한 자신의 지분을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
더불어 누구도 손대기 힘든 TS의 김상철 대표를 궁지로 몰아넣기까지.
완벽하게 엮으려 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일개 고등학생이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사자, 이휘가 입을 열었다.
“해주시겠어요?”
강영훈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단,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그가 큰아버지에게 의뢰받은 건 이휘를 무죄로 빼내주는 것까지.
김상철 건은 이휘의 의뢰였다.
“말씀하세요.”
“한 배를 타자.”
뜻밖의 제안에 이휘가 물었다.
“그 말씀은….”
“네가 이성환 회장님께 받은 지분까지 팔면 단숨에 180억대 자산가가 되겠지?”
“그렇겠죠.”
“그만한 자산을 어떻게 관리할 거냐?”
“생각해 둔 게 있어요.”
“누구나 계획은 있지. 하지만 그만한 돈을 굴리려면 시시때때로 법리적인 자문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 줄 사람도.”
“그러니까, 정리하면 대표님과 계약하자는 거죠?”
“법무법인 태청과 계약하란 거다. 날 쓰기엔 비용이 부담될 거야.”
“그런데 셈법이 틀렸어요.”
강영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틀려?”
“제가 비용을 드릴 게 아니라 받아야 합니다. 정말 김상철이 킬러를 고용해 저를 노린 거라면 다음은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간 큰아버지를 노렸을 테니까. 태청이 VIP 한 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에요.”
“흐음.”
강영훈은 이휘를 빤히 바라봤다.
‘이놈, 진짜 뭐지?’
이런 상황에 기싸움이라니!
아직도 보여줄 카드가 남았다는 거다.
“난생 처음 듣는 셈법이다만. 원하는 게 뭐야?”
“제 자산을 대표님이 직접 관리해주십시오.”
법무법인 태청의 대표 강영훈.
이휘는 그가 훗날 얼마나 큰일을 할 사람인지 안다.
그런 사람이, 삼고초려라도 해서 데려와야 할 판에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끌어당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강영훈이 말했다.
“비용 문제도 있겠지만 나는 네 큰아버지와 거래하고 있다. 의뢰인 심기를 거스를 일을 자초할 필요 없지. 태청은 몰라도 내가 나서는 건 곤란해.”
그는 스스로 별 이야기를 다 꺼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이휘에 대한 호기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역시나, 이휘는 다시 한번 그를 놀래켰다.
“큰아버지와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하세요? 큰아버지가 정성그룹을 손에 넣으면 로펌 내에서 대표님의 입지가 세질 거고… 반대로 큰아버지가 추락하면 대표님도 고꾸라지실 테니까.”
“내가?”
“정성그룹 후계자 정도 되는 VIP가 빠져나가면 대표직에서 물러나셔야 할 테니까요.”
“VIP 한 명 빠진다고 내가 무너질 것 같아?”
“주니어, 시니어, 파트너, 임원, 대표까지. 특별한 배경 없이 치열하게 싸워가며 잘난 놈 제끼고 정점에 오르셨을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누구한테라도 빼앗길 수 있는 자리 아닙니까?”
이휘가 맹랑하게 몰아 세웠고.
의외로 강영훈은 화내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 많이 알아봤군.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저한테 유능한 정보원이 있어서요.”
이건 사실이다.
정태수의 아버지 정대선. 그가 후배 흥신소를 통해 이휘의 정체를 알아냈듯, 이휘도 정대선 라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구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큰아버지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다. 대부분 이미 알고 있거나 필요하지 않은 정보들이었다. ‘법무법인 태청’에 관한 자료도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이렇게 쓰게 된 것이다.
물론 강영훈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같은 학생이 킬러를 죽이고 정보원을 다룬다….”
다시 한번 ‘너는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강영훈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가 직접 네 뒤치다꺼리할 이유가 되나? 이점에 대하선 아직 설득력이 부족해.”
기다리던 질문을 받은 이휘가 빙그레 웃었다.
“큰아버지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헛소리. 네 지분을 사들이는 순간 그 사람은 정성그룹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거야.”
“아뇨.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앞으로 큰아버지뿐 아니라 정성그룹이 전체가 흔들릴 테니까요. 할아버지는 버티실 수 있겠지만 큰아버지는 아닙니다. 당연히 태청에서도 VIP를 잃게 될 거고요.”
“….”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걸로 봐서 강영훈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이게 연기가 아니라면….
‘이거 봐라?’
이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설마 대표님도 심상지 않은 조짐을 읽으신 겁니까?”
살짝 망설이던 강영훈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은 못했다. 한음철강이 무너져서 이런저런 괴담이 돈다고 여겼지. 믿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내가 생각한 사이즈의 경제위기가 닥친다면 펌에서도 몇 명의 VIP를 잃을지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펌 내부에서도 지각변동이 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누군가의 위기가 기회가 되고, 기득권이 바뀔 겁니다.”
이휘의 예측을 들은 강영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내 자리를 정리해야 하는 건가? 다음 사람을 위해서?”
“아뇨. 방법이 있습니다.”
강영훈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뭐지?”
“기존 VIP를 잃어도 보다 전도유망한 VIP를 새로 개척한다면 대표직을 내놓으실 필요 없을 거에요.”
“하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린 강영훈이 고개를 저었다.
“미치겠군. 어이없는 얘길 하는데도 마냥 흘려들을 수가 없으니. 새로운 VIP란 널 뜻하는 거겠지?”
“맞아요. 딱 한 달만 지켜보시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조리 맹신하게 되실 겁니다. 물론 그땐 제가 태청과 계약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 계약해라?”
“조건은 대표님이 직접 저를 케어해주시는 것. 기간은 영구적으로. 단, 큰아버지의 의뢰를 포함한 어떤 의뢰보다 제 의뢰를 우선시 취급해주셔야 합니다. 이 모든 조항이 들어있는 계약서를 보내시면 싸인하죠. 계약금은 대표님 연봉의 10분의 1입니다. 저는 대표님의 대표 자리와, 태청의 앞날을 지켜드리죠.”
10분의 1.
그래도 10억이다.
하지만 강영훈 입장에선 미친 소리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금껏 그를 국내 최고 로펌의 대표까지 올려준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지?”
“태청의 매리트가 무너지기 전까지요.”
강영훈은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닌 정도가 아니다.
상대를 옥죄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프로 중의 프로다.
앞을 훤히 내다보는 괴물이다.
‘고등학생이?’
물리적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이지만 강영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상식은 한참 전에 벗어났다.
킬러를 죽였을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일지도.
“젠장, 체하겠군. 고민해보지.”
드르륵.
강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던 현장 같았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총탄처럼 오갔던 것이다.
그때까지 숨도 못 쉬고 곁에서 지켜보던 방준수는 벌써 간밤의 일을 잊었는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