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56
나는 회귀했다 156
-보스.
알란이 말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잠겼다. 이미 ‘못 가겠다’는 이휘의 말에서 불길한 예감을 받은 것이다. 작전에 성공하거나 아군이 전멸하거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느낀 것.
이휘가 대답했다.
“철수하세요. 이곳 사정을 알리고 전쟁을 막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무전을 꺼버렸다.
알아듣게 이야기했으니 알란은 허튼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길게 말을 이어나가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한 줌 기력이라도 아껴서 실전에 써먹을 때다.
이런 생각을 하던 이휘는 불쑥 웃음이 나왔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도 신기하지.’
사람 몸이란 게 희한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고에 너무 쉽게 부서지는가 하면, 이휘처럼 대형사고를 여러 번 겪고도 잘 버티는 경우도 있다.
이는 체력이나 육체의 강인함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문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운’?
훈련받다 부상 당하면 퇴소 당하는 특수부대 훈련을 생각해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운동선수 출신으로 더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진 이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시험과정을 통과하는 건 아니니까.
뭐든 운이 따라줘야 한다.
‘운이 좋았어.’
이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언젠가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면 자신의 선택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기에 큰 미련은 없었다.
여기 남겨둘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가는 법.
그들 걱정에 나약해질 필요 없다.
필요한 일을 하다 간다면.
자신이 자처한 운명대로 살다 가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다.
‘장진평.’
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호위하는 군인들이 철저히 감싼 상황.
철통같은 방어를 뚫고 표적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알렉세이였다.
타다다다당!
커다란 총성과 함께 장진평을 감싸고 있던 호위대 두 명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잘 훈련된 병력답게,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단숨에 간파해 대응사격을 펼쳤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
서로 미친 듯 총을 쏘고 있지만 화약 냄새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화제의 잔향이 너무 강렬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휘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뒤통수에 총격을 받은 자가 제자리에서 허물어진다. 알렉세이와 교전하고 있는 자들이 눈치 채기 전에, 이휘가 총구를 옮겨가며 두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두 명이 차례로 쓰러진다.
총 세 명을 제거했을 때쯤 적들이 이휘의 존재를 알아챘다.
“뒤! 뒤다!”
놈들이 돌아섰다.
이휘는 엄폐물이 될만한 나무 사이로 움직이며 총을 쐈다.
탕, 타앙, 탕!
“이런 젠장!”
한 놈이 비명 같은 외침을 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휘가 쏜 총알은 정확히 이마에 한 발씩 박히는 한편 이쪽에서 난사한 총알은 번번이 이휘를 벗어나고 있었다.
“권총을 어떻게…!”
근거리라면 사거리가 나올까 말까 싶을 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권총으로 백발백중 이마를 정확히 맞추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휘는 그러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쪽에서 총격을 퍼붓는 순간 교묘하게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면서 움직인다.
나무 사이에는 수풀이 있어서 그가 다가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 같았다.
‘앞뒤, 둘.’
리양은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다. 자리 잡고 기습적으로 들어온 총격. 그로 인해 순식간에 부하를 여덟 명이나 잃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둘뿐입니다.”
그 말에 장진평이 미소를 띠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나?”
“실력이 대단해요.”
“우리가 진다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장진평이 활짝 웃었다.
“그래. 두 놈 다 죽여버려.”
“예.”
리양은 급급하게 몸을 엄폐한 부하들을 향해 수신호를 전했다. 나가지 마라. 이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을 공격한 두 놈의 총알을 모두 소진시키거나, 유인해서 제거하라는 뜻이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다.’
리양은 굳게 믿었다.
반면에 이휘는 그의 생각처럼 초조했다. 몸 상태가 멀쩡하면 몰라도 출혈이 지속되고 있을뿐더러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평소보다 수십 배 지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여기서 살아남는다 해도 결국 회생하지 못할 터였다.
‘어차피 죽을 각오라면….’
하지 못할 일은 없다.
이휘가 몸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
퍼억!
숨어있던 한 놈이 슬쩍 고개를 내밀다 이마가 뚫린 채 고꾸라졌다.
“뭐야?”
“저격수다!”
이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이 탁 풀어진다. 근처에서 매복하던 알란이 말을 듣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만일 자신들이 죽으면 이곳 소식을 밖에 전할 사람들이 필요한데.
이를 감안해서 적절히 대처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다 떠나서 그저 반가웠다.
알란이 죽을 길을 찾아왔다 해도.
무덤으로 들어갈 인원이 둘에서 셋으로 늘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감동하는 동안 리양은 미간을 찌푸렸다.
“….”
아니나 다를까 장진평이 침을 튀기며 물었다.
“우리측 저격수는? 그놈들은 어딨어?”
“제거된 것 같습니다.”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그놈들이 자리 잡고 저 두 놈을 쏴 죽일 때까지!”
“실력자들이었는데….”
“그런 놈들이 왜 죽어?”
리양은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바뀐 것은 없습니다. 기습에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거기까집니다.”
“그럼 빨리 처리해!”
“예.”
리양이 다시 한 번 수신호를 보내자.
숨어있던 이들이 일제히 발포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다다당! 타다당!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요란한 총격음과 함께 방금 저격이 있었던 건물로 총알이 쏟아진다. 동시에 뒤를 책임진 자들은 알렉세이가 숨은 수풀로 총격을 가한다. 이휘가 엄폐한 측면 숲속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타앙!
총알을 퍼붓던 한 놈이 저격받아 쓰러졌다.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피하지 않고 맞서서 저격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목숨을 담보로 건 알란의 무모한 시도를 눈치 챈 알렉세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들의 시야를 분산시키지 않는 이상 알란은 확실히 죽은 목숨이기에, 그는 몸 사리지 않고 적당한 엄폐물 사이로 이동하며 사격을 가했다.
타당, 탕!
가슴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확인사살까지 놓치지 않는다.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도 한 놈, 한 놈 확실히 처리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렉세이가 총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퍽!
알렉세이의 한쪽 손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을 놓지 않고 나머지 한 손으로 사격을 가했다.
타다당!
정확도는 떨어졌지만 한 놈을 쓰러뜨린다.
혼전도 이런 혼전이 없었다.
티잉!
총알이 비껴나갔는지 알렉세이가 쓰고 있던 군용 헬맷이 튕겨져 나간다.
방금 죽을 뻔했는데도 알렉세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응사격을 가했다.
타다당!
방금 총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가 가슴팍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이런 상황에, 이휘라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압도적인 머릿수의 적들과 전면전을 벌이면서까지 만들어준 기회다.
원래라면 퇴각해야겠지만 그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긴 적진 한가운데 정도가 아니라 적진 깊숙한 핵심지었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으며, 장진평이 살아남는 이상 그들의 목숨은 개미목숨보다 더 쉽게 사라질 테니까.
이휘는 총알이 빗발치는 곳으로 마주 달려들었다. 딱 한 발, 제대로 맞는 순간 바로 숨통이 끊기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확률이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휘는 마주 달려갔다. 권총도 없이, 방탄조끼를 두 손으로 잡아서 앞세운 채로.
타다다다다다다다다!
총격이 폭우처럼 들이쳤지만 이휘는 기다란 수풀 사이로 움직였기에 좀처럼 맞지 않았다. 심지어 총상과 출혈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하게 움직여 들이닥쳤다.
슈욱!
나이프가 날아가 총을 쏘려던 자의 얼굴 중앙에 꽂혔다. 이휘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을 미끄러지며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총을 빼앗아서 놈의 머리통을 부쉈다.
타앙!
비록 가까운 적을 총으로 제거했지만 먼 적들까지 백발백중 명중시킬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자세가 아니었다. 평소대로라면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사격솜씨를 자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정확한 저격이 힘들어서 직접 내려왔을 정도로 어깨가 안 좋은 상황.
이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쓰러져 있는 놈의 허리에 걸려있는 수류탄을 뽑아들었다.
“죽여!”
“수류탄이다!”
설마 적아가 뒤섞인 코앞에서 총이 아닌 수류탄을 뽑아들지 몰랐는지, 모두가 경악하며 외쳤다. 이휘가 감히 수류탄을 이곳에서 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이미 그가 얼마나 독한지 봐왔고, 얼마나 인간 같지도 않은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막아!”
누군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이휘는 수류탄을 까는 동시에 물 흐르듯 적들에게 던진 것이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체를 끌어당겨 덮고 누웠다.
툭, 투욱….
“엎드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커다란 폭음이 터져나왔다.
콰앙!
“안 돼!”
건물 위에서 저격 위치를 잡고 있던 알란이 크게 외쳤다. 그는 한쪽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총격이 스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그의 주의를 조금도 끌 수 없었다.
“안 돼! 이런 씨발!”
그는 평소 절대 하지 않는 욕설을 내뱉었다. 스코프 안으로 폭발이 있었던 장소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 시체인지 알아볼 길이 없었다.
아니, 근거리에서 수류탄을 터뜨리는 짓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총질을 하던 알렉세이는 몰라도…. 이휘가 생존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렉세이가 비칠비칠 일어나더니 적들에게 다가가며 총을 난사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미 만신창이로, 한 손으로 총을 잡고 난사한다. 쓰러져 있던 놈들의 몸과 머리가 퍽퍽 터져나가며 저절로 확인사살이 됐다. 하지만 그건 이성적인 공격이라기보단 화풀이처럼 느껴졌다.
화가 난 것은 알란도 마찬가지.
그는 알렉세이와는 조금 다르게, 일어나거나 총을 잡고 알렉세이를 쏘려는 자들을 저격했다.
타앙!
퍽!
타앙-!
시체밭이 되어버린 곳.
푹 파인 언덕 아래, 부하들 시체 사이에 숨어있던 리양이 고개를 들었다.
장진평 역시 발버둥치고 있었다.
리양은 망설이지 않고 장진평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리양은 고개를 들어 총을 쏘며 다가오는 러시아인을 봤다. 저격수 위치상, 이곳은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다. 하지만 총소리가 난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그가 장진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달아나기 좋은 상황이에요. 기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절대 소리내지 마시고요.”
장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언덕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에 타는 소리와 매캐한 연기, 뒷정리를 하는 자들의 총소리 때문에 시야나 청각이 어지러운 상황.
그렇기에 그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수류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두 눈 크게 뜨고 시체 밑에서 바짝 엎드려 있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분수처럼 곡선으로 파편이 날아가는 특성을 가진 수류탄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오히려 가까이에서 바짝 엎드린 뒤 폭발을 막아줄 시체를 뒤집어 쓴 이휘였다.
나는 회귀했다 157 (完)
이휘가 눈을 뜬 것은 발자국소리 때문이었다. 혼란 중에 그같이 자그마한 소리를 포착했을 리 만무하지만 명백이 일어난 현실이었다.
어쩌면 각성효과와 비슷하리라.
그는 눈을 뜨기 전까지, 꿈을 꾸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등장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이 자신의 부모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잃은 수 많은 전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무수한 영화에서 본 것처럼 지금 꾸는 꿈이 마지막이란 사실을 직감했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정신과 육신을 놔줄 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할 만큼 했다.
마지막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세상은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여겼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죽은 동료들이 속삭였다.
“아직 아니야.”
“아직….”
부모님 역시 웃는 듯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눈을 뜬 것이다.
동시에 직감했다.
지금 청각을 간지럽히는 이 발소리는 알렉세이의 것이거나, 생존한 호위대의 것이 아니라고.
발소리를 내는 자는 바이러스를 풀어 대량학살을 저지르려 했던 장진평과 그의 오른팔인 리양이라고.
‘움직여라.’
이휘는 기다시피 움직였다. 하지만 만신창이의 몸으로 두 놈을 제거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몸이 어찌 됐으면 알렉세이를 부르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발의 여파로 밀려난 것인지 구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날아온 건지 참호(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만든 U자형 엄폐처) 속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두 놈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휘는 지나는 길에 무수히 흩뿌려진 탄피를 챙겼다. 아직까지 식지 않아 탄피가 뜨거웠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탄피를 회수하며 포복전진하다 떨어진 권총을 챙긴다.
권총 탄창에는 총알이 없었다.
그러나 약실에 한 발.
총알이 남았다.
새로 총기를 확보하기에는 시간도, 여력도 없다.
이휘는 즉시 참호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가서 기름통 뚜껑을 열고 주머니에 가득 담아온 탄피를 집어넣었다. 그런 뒤 죽어라 참호를 기어올라간 순간, 놈들이 도착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리양은 기름통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근처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장진평도 마찬가지다. 하다하다 그는 미소 짓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래, 서두르지. 하하하. 내가 말했잖나? 이번에도 살아남았군! 언제나 하늘은 내 편이었다고.”
“안정권이긴 하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여길 벗어나는 대로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야.”
“설마… 전쟁을 감수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장진평의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휘만 날 죽이려 하는 게 아니야. 전쟁은 이미 시작됐어. 내가 그 점을 간과했던 거지. 순순히 죽어 줄 바에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지.”
리양이 걸음을 멈춘다.
“…저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
장진평이 어색하게 미소 띠며 그를 쳐다봤다.
“오해하지 마. 자네 가족이나 우리 가족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 걸세.”
“….”
“날 믿게. 언제나 그랬듯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다가와야 하는데, 거리를 두고 멈춰서 미적대고 있다.
‘빨리.’
정신이 혼미하다.
어서 움직여주어야 한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육신은 이미 영혼까지 송두리째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스윽.
리양이 권총 들어올렸다.
“…뭐하는 짓이지?”
장진평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일촉즉발의 상황.
리양이 말했다.
“그 말씀, 지켜주십시오.”
“말이라고.”
장진평이 물었다.
“총은 왜?”
“누가 있습니다.”
리양의 총구가 움직인다.
이휘가 포복하는 쪽을 겨누는 총구.
이휘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박동한다.
두근, 두근….
그 순간.
타앙!
커다란 총성과 함께 이휘가 본능적으로 입을 막았다. 총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눈알을 슬쩍 돌리니, 공중에 떴다가 곤두박질 치는 족제비가 보인다.
‘빌어먹을.’
이휘는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저격훈련을 받은 숙련된 저격수답게 전신을 통제했다.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함.
총을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 보람이 있는지, 자신이 쏜 것이 족제비라는 걸 확인한 리양이 움직였다. 장진평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기름통을 지나는 순간.
이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처음이자 마지막 한 발이 날아가 기름통에 박힌다. 그 결과 기름통 안에서는,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참호 안을 휩쓸며 탄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콰아아아아아앙!
두 놈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탄피들이 튀며 그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참호 안이었기에, 반대로 참호 밖에 납작 엎드려 있던 이휘에게까지 탄피가 미치지 못했다.
이휘가 고개를 들었을 땐, 두 놈은 머리가 터지고 몸통이 너덜거리는 걸레짝이 돼서 쓰러져 있었다.
장진평은 확실히 절명.
리양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휘는 참호를 미끄러져 내려가서 리양 앞에 섰다. 그리고 단도를 뽑아들자, 리양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하지만 총을 들 힘이나 대응할 한줌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눈으로 묻는다.
그가 아닌 이휘라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죽었어야 할 놈이- 딱 봐도 그만한 상처를 입은 놈이 칼을 들고 서 있으니 마치 저승사자가 찾아온 것 같을 터였다.
이휘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입을 뻐금거리는 놈의 목을 칼날로 썰었다.
촤악!
피가 튄다.
이휘는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끝났어.’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이 날아갔다.
* * *
3년 후.
대한민국 서울, 파트리아 메디컬센터.
최고의 메디컬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이곳은 파트리아 그룹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휩쓸다시피하는 ‘꿈의 직장’이 된 파트리아 메디컬센터.
이미 지난 일로 한국의 위상은 몰라보게 높아졌고, 매년 몰라보게 성장한 파트리아 그룹은 어느새 세계 최고의 기업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현재.
의류, 악세서리, 화장품을 비롯해 한국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핫한 브랜드를 창립한 스무 살의 어린 CEO.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0대 여성이자,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 100위 재벌에 이름을 올린 나타샤가 이곳을 찾았다.
그녀가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순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온갖 언론사에서 몰려든 이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찰칵, 찰칵, 찰칵!
“나타샤!”
“이쪽 한 번 봐주세요!”
“이휘 명예회장과는 어떤 관계십니까?”
나타샤가 활짝 웃었다. 언제나 방송에서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이기에-그 누구에도 비할 바 없는 백과 재력, 미모까지 겸비한 그녀라서 가능한 거지만-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뒷배경이 알려지면서 뭇 모든 남자들의 이상향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말했다.
“여자친구요.”
그리곤 덧붙인다.
“…아직까지는.”
“교제하는 관계가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네. 그냥 친구에요. 썸 타는? 뭐 그런 관계랄까.”
“오오.”
기자들이 술렁인다.
아마 내일이면 신문 1면을 도배하겠지만, 이는 벌써 3년째 수십 차례 반복된 상황이다.
그녀는 매번 솔직하게 이야기했지만 이휘는 아직도 받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구애에 성공하길 바랍니다.”
기자의 짓궂은 농담에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당당한 거에요.”
그 말을 남긴 그녀는 숱한 질문을 뿌리치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요원들이 접근을 막았기에 기자들은 다시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입장이 됐다.
“또 난리가 나겠군.”
한 기자가 말하고.
다른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러니 사랑받지 않을 수 없지. 이휘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엄청나게 욕먹었을 거야.”
“그건 그래. 나타샤도 그 영웅 중 한 명이잖아?”
“남녀할 것 없이 다 좋아하지. 걸 크러쉬잖아. 그리고 일단 너무 예쁘고.”
기자들이 적극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나타샤가 자신의 입지를 올리려 하는 보여주기식 멘트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 3년간 촬영 날이나 스케줄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 같이 이휘를 찾은 사람은 나타샤뿐이었으니까.
* * *
“오빠. 괜찮아?”
나타샤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에 이휘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제 걷고 있었다.
“보다시피.”
“다행이야.”
나타샤가 그를 부축하며 덧붙였다.
“정말이지,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이휘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는 회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뇌사 판정을 받고 깨어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그 후 ‘반영구적인 하반신마비’ 판정을 받았다. 그걸 알면서도 나타샤는 고백했고, 이휘는 사양했다.
그리고 자력으로 일어나기 위해 약도 끊고 별에 별 짓을 다했다.
그렇게 2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노력한 결과.
넘어져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골통이 깨져가며 죽어라 애쓴 결과 간신히 일어서는 정도가 됐다.
그리고 그후부터 신경이 돌아오기까지 빠르게 상황이 나아졌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처럼 걸을 수 있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이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샤에게 말했다.
“고맙다. 항상.”
“멀쩡해지면 그동안 쌓인 설움 다 풀거야. 그 생각 하나로 버텼다구.”
굳이 그녀가 옆에서 함께해줘야 할 과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초해서 힘이 되어주었기에 이휘도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편찮은 몸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이휘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지금처럼 회복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까.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 두었을 정도로 그의 신체는 망가진 상태였다.
“얼마든지.”
이휘는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땀을 비오듯 흘렸지만 걸음을 뗀 이상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처럼 빠르게 회복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이번주에 퇴원이야.”
“정말?”
나타샤가 마치 비명지르듯 고음으로 물었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병원에 있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치. 자기 병원이면서 뭘. 병원비가 드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가능한 일상생활에 적응해봐야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응. 오빠라면 하나씩 되돌릴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눈을 크게 떴던 나타샤가 씨익 웃었다.
“매일 돼.”
“오케이. 오랜만에 영화 볼까?”
“좋아. 엄청.”
입이 찢어진다.
활짝 웃는 그녀를 보며 다시 한 번 미소 지은 이휘는 다시 걷는 데 집중했다.
지난 3년.
대소변도 못 갈고 누워있던 시간이 절반이 넘는다. 하지만 이휘는 다르게 생각했다. 목숨 건 자기 자신과의 전쟁. 그 기간이 없었다면, 그는 수 많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사람들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를 끝 없는 전쟁이라는 자극, 그 지옥구덩이에서 꺼내줄 수 있다고 느꼈다. 이미 자신은 괴물이 되었으며 죽음만이 모든 걸 끝내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새로이 더 크게 집중할 뭔가가 생겼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남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악재였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악재가 도리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몸의 회복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 지옥구덩이를 빠져나오지 못하던 영혼이 알게 모르게 제법 치유되었으니까.
‘난 행운아다.’
만약 이 악재가 끝없이 지속됐더라면 오히려 상태가 더 악화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고, 하늘에 감사했다.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 것을.
남들처럼.
어쩌면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만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얻었기에.
‘이제 다시 시작이다.’
파트리아 그룹을 이끄는 방준수.
이휘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그 대신 그나 주변인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요소를 대상으로 지켜주었던 알렉세이, 알란.
그들 모두 이휘에게 인생을 빚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휘 자신이 그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빚을 지며, 행복을 누릴 작정이었다.
그는 불쑥 방준수의 조언이 떠올랐다.
‘너무 자기 자신을 다그치지 마. 너 혼자 떠안으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야.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상대를 위한 배려니까. 너도 이제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이휘는 그렇게 살아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누리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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