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18
나는 회귀했다 18
유리 다예프.
구소련권에서 유명세를 날리는 수입업자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이휘는 놈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유리 다예프의 표식.
바로 왼뺨의 기다란 칼자국이다.
그러니 저기 앉아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운치 있게 회를 떠먹고 있는 놈은 유리 다예프가 맞다.
놈이 뱀의 그것처럼 차가운 눈길로 이휘를 훑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잖아?”
러시아어다.
그는 이휘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겠지만, 이휘는 뿌듯했다. 귀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이어폰을 꽂고 다녔던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휘가 유리 다예프의 앞까지 다가가 앉으려 하자 놈의 뒤에 서 있던 덩치가 가슴을 밀치며 저지했다. 신장은 183, 4? 100킬로를 육박할 것 같은 근육덩어리다.
“거기 서서 얘기해라.”
통역이 그대로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이휘는 피식 웃었다.
“파트너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건가?”
유리 다예프의 속이야 빤하다.
초장에 겁을 줘서 협상을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것.
이놈은 말이 수입업자지, 마피아의 방식에 익숙한 놈이다.
유리 다예프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이휘를 보더니 회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겁 먹지 않는군.”
굴럭굴럭굴럭… 꿀꺽!
보드카로 입을 헹궈서 삼킨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이상할 거다.
아직 유리 다예프는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으니까.
그때, 이휘가 통역을 무시한 채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단 둘이 얘기하고 싶다.”
그리곤 근육덩어리를 고갯짓하며 덧붙였다.
“이 덩어리 좀 치워주지 그래?”
“이 새끼가!”
덩어리가 화를 냈지만 유리 다예프는 이휘가 러시아어를 쓰는 게 의외라는 듯 외려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고 물었다.
“네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불편한 건 못 참는 성미라서.”
“못 참으면?”
“직접 치우는 수밖에.”
덩어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순간.
이휘가 움직였다. 그는 가슴팍에 올려져 있는 덩어리의 무쇠 팔에 자신의 겨드랑이를 걸치면서 휘리릭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덩어리의 팔꿈치를 상체로 짓누르며 팽이처럼 도는 힘을 이용해 뒤돌려차기를 날린 것은.
제아무리 천하장사라도 소용이 없었다. 팔꿈치가 역으로 꺾인 덩어리의 무게중심이 무너지며 거구가 딸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이휘의 뒤돌려차기가 덩어리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꽂혔다.
우드득!
빠악!
덩어리의 팔이 부러지는 것과 눈알이 홱 돌아가는 건 동시였다.
놈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몇 걸음 더 걷다가 앞으로 뻗어버렸다.
쿵.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고도, 유리 다예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혀를 찼다.
“츳! 돈이 아깝군.”
경호원이 쓰러졌음에도 전혀 겁먹거나 당황한 표정이 아니다.
이휘는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아마 저런 덩어리 수십을 데려와도 유리 다예프를 어쩌진 못할 것이다.
유리 다예프의 뒤에는 블랙마피아가 있지만, 진짜 무서운 건 이놈 자체다.
러시아 최고의 특수부대 스패츠나츠를 불명예 제대하고 블랙마피아의 조직원이 되었던 놈. 그러고도 밖에 나와 지금은 적법한 수입업자로 살아가고 있는 놈이니까.
심지어 블랙마피아의 보호를 받는 처지이니, 도난과 강도가 난무하는 구소련권 지역 어디로든 안전하게 운송할 수가 있다.
이게 바로 유리 디예프가 지금 유능한 수입업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럼에도 이휘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태연하게 원래 앉으려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돈 받고 일하기엔 경호원 실력이 별론데?”
“그건 그래. 꽤 비싸게 고용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내 경호원으로 취직할 생각 없나?”
“난 훨씬 더 비쌀 거야.”
“저 친구의 두 배를 지불하지. 연봉 십만 달러. 어때?”
이휘는 순간 혹할 뻔했다.
‘투잡해?’
자신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노동으로 버는 고정수입은 또 다르다. 게다가 잘만 하면 유리 다예프가 한국에 왔을 때만 일거리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이게 아니지.’
과거 불법을 밥 먹듯 저지르던 놈을 지켜줄 수는 없지 않은가?
쓴웃음과 함께 정신을 차린 이휘가 대답했다.
“러시아는 추워서 싫어.”
“미녀들이 많다네. 원한다면 언제든 제공해줄 수 있지.”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 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악마가 힘에 부치면 여자를 심부름꾼으로 보낸다고.”
유리 다예프가 눈을 반짝 빛냈다.
“러시아 속담까지? 러시아에 와본 적이 있나?”
“아니, 없어. 러시아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가 나에 대해 알려준 모양이군.”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가 바로 미래의 너다, 이 새끼야. 그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괜히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다.
“그럼 내가 이름을 모를 수는 없을 텐데. 그 친구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죽었다.”
유리 다예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군… 혹시 내가 죽였나?”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미래의 유리 다예프는 스스로의 욕심에 잡아먹혀 죽었으니까.
“그래.”
“조의를 표하지.”
“네가 죽인 사람에게?”
이휘가 피식 웃자 유리 다예프가 고개를 저었다.
“난 이유 없이 누군가를 해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미친새끼.
“생각 회로가 편리해서 좋으시겠어.”
“왜 날 보려고 했지? 복수인가?”
“아니.”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친구와 애매한 관계라서. 적으로서 실력 하난 인정한다고 해야 하나?”
“호오. 그만한 실력자였다니 절로 궁금해지는군.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너도 네 친구처럼 대가를 치르거나, 아니면 거래하거나.”
“네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아니, 그게 아니지. 그 친구가 누군지 모르지만 분명 죽을만한 사고를 쳤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지. 정 사장 말로는 미국놈들이 네게 관심이 많다던데? 맨슨 글로벌. 내가 그놈들에게 널 넘기지 말고 지켜야 하는 이유를 대봐라.”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따라서 이휘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프랑스에 다리를 놔주지.”
“프랑스?”
“그래. 그쪽과 거래 트기 힘들잖아. 안 그래?”
“미국놈들한테 널 넘기고 거래하자고 제안할 수도 있어. 맨슨글로벌도 무역회사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미국놈들을 믿나?”
유리 다예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넌 어떻게 믿지?”
“미국놈들은 내 신변만 받고 입 싹 닦으면 그만이야. 패를 다 보여주고 무슨 게임을 해? 반면 나랑 거래를 하면 대선물산이라는 신뢰의 증표가 남는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든 대선물산에 책임을 물으면 돼.”
“네가 발을 빼면?”
“대선물산에 지분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 발을 빼면 내 손해야.”
이 정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닐 터.
유리 다예프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프랑스 쪽과 거래를 터준다는 거지?”
“자세한 건 얘기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그만한 영향력도 없는 인물이라면 맨슨글로벌이 날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겠어?”
유리 다예프가 생각에 잠긴 사이.
이휘가 틈을 주지 않고 회접시를 치워버린 뒤 그 자리에 품에서 꺼낸 계약서를 올려놨다.
“계약조항은 날 만나기 전에 어느 정도 협의한 걸로 안다. 네게 중요한 게 내가 널 안다는 거야? 아니면 한국을 넘어 프랑스와 거래를 트는 거야?”
한국 업체와 거래하는 것.
나아가 프랑스로 영역을 넓히는 것.
유리 다예프 입장에선 강에서 흐르던 물이 대양으로 나가는 것 같은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계약서를 집어든 유리 다예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왼뺨의 흉터가 신경을 건드렸는지 미소 자체가 섬뜩하리만치 기괴했다.
“그전에 한 가지만 확실히 하지.”
“얘기해.”
“약속을 어기면 넌 죽는다. 네가 어디있든 확실히 처리할 거야. 난 미국놈들처럼 어리숙하게 일처리하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그놈들은 프로가 아니지.”
확실히, 맨슨글로벌 놈들은 프로가 아니다. 그러니 킬러가 이휘에게 찾아왔음에도 아직까지 이휘의 존재조차 모르는 거다. 그저 돈만 쓸 줄 아는 놈들.
맨슨글로벌은 딱 그 정도다.
반면 유리 다예프는 다르다.
이휘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러시아 속담을 덧붙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 곰과 우정을 나누어라. 그러나 언제든지 곁에 손도끼를 준비해 두라.”
“내 손도끼가 네 머리통을 쪼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나도 마찬가지야.”
빙그레 웃은 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전생에 간덩이가 부어서 정부에서 빼돌린 무기를 팔다가 한국으로 도망친 걸 잡아다 러시아에 돌려보낸 것이 이휘란 걸.
아마 평생을 감방에서 썩거나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당장에 손도끼를 휘둘렀겠지만, 애석하게도 유리 다예프가 읽을 수 있는 시간은 현재까지다.
하지만 감이란 게 있는지, 유리 다예프가 몸을 돌리려는 이휘에게 물었다.
“다시 묻지. 네 친구였다던 그자 이름, 끝까지 말해주지 않을 건가?”
이휘는 능청맞게 대답했다.
“러시안이라는 것밖에. 이름은 몰라. 적들과 항상 통성명을 하는 건 아니니까.”
“하! 빌어먹을. 한 방 먹었군. 그렇다 치고 넌 용병이냐? 말하는 것도 그렇고, 솜씨가 마음에 들던데.”
눈을 번들거리는 유리 다예프의 징그러운 얼굴을 향해, 이휘가 지난 한 방은 잽이라는 듯 제대로 스트레이트를 꽂아줬다.
“아니, 학생인데? 나 열일곱 살이야.”
그 말을 남긴 이휘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잠시 후, 멍하니 있던 유리 다예프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
못 믿는 걸지도.
뭐가 어쨌든 이휘는 두 번 다시 저 새끼랑 직접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확실히 밟아놔야겠지만 전생에 놈이 표적이었을 때 생포해서 러시아 대사관에 넘겼던 과정을 생각하면 그다지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더구나 지금은 맨슨글로벌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방패가 아닌가?
‘정말 사람 일 모르는 거야.’
이휘는 피식 웃었다.
러시아 마피아는 국내 조폭들처럼 그냥 폭력배 집단이 아니다. 권력과 자원 등 이권을 독점하고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유지하는 조직 모두를 가리키기 때문에 군, 경, 사업체 곳곳에 숨어있다.
그래서 똑똑한 놈들도 많고 각계각층에서 알아주는 놈들까지 연관된 경우도 다반사였다.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검거도 어렵고.
물론 이휘는 과거 군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이들의 출세를 장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빠르게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다 사라져야 할 쓰레기들이니까.’
유리 다예프가 현재 마피아 조직원이 아니라 해도 그놈 역시 사라져야 할 암적 존재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휘가 선적장을 나서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고개를 젓고 있는 정대선이었다.
“전화 받았다.”
그새 유리 다예프가 전화를 해둔 모양이다.
“우리가 보낸 계약서대로 진행하자더군. 네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이휘는 피식 웃었다.
“전 그 자식 별로 마음에 안 들던데요.”
“그래, 위험한 자다. 너무 깊게 개입해서 좋을 것 없어.”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많이 남기세요. 그래도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이더구나.”
물론이다.
놈은 이휘 너머로 프랑스까지의 교역로를 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놈의 마음대로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