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32
나는 회귀했다 32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할아버지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 누가 들으면 무슨 오해를 할까 걱정될 만큼.
이휘더러 남들을 견제하라더니 이렇게 티 나게 행동해도 되는 건가?
그때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 원, 여지라도 남겨주면 좋을 텐데 아주 싹까지 잘라버리는구만. 단호하기 그지없어!”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말씀드릴 건 아니었는데. 확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더 묻지 않으마.”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어제 임원들과 회의를 했다. 안건은 계열사를 정리한 돈으로 어떤 신사업을 추진할까에 대한 거였어.”
“임원 회의라면서 이런 얘기 외부인한테 해주셔도 돼요?”
“인베스터(Investor. 투자자)로서 GP(General Partner. 펀드운영자)에게 묻는 게다.”
“….”
이게 아닌데?
뭔가 파도에 휩쓸리는 느낌이다.
“들어봐. 임원이란 놈들이 저마다 자신있게 자들이 구상한 신사업을 내미는데 하품이 다 나오더구나! 아까 봤지? 얼마나 한가하면 이 시국에 여길 따라나서?”
“그렇게 욕하셔도 돼요?”
“이미 했다. 대가리에 똥만 찬 놈들이라고!”
“회의에서 그러셨다고요?”
미친 거 아닌가?
그러나 할아버지는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했다.
“내가 며칠 앓아누웠다고 잿밥에 눈이 벌개져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야지.”
“아니, 대체 무슨 얘기들을 했기에 그렇게 화가 나신 건데요?”
“식품, 마트, 백화점, 호텔, 보험, 은행… 이따위 소리나 하더구나.”
“아하.”
이휘는 바로 이해했다. 욕먹을만 하다. 지금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해결책이니까.
그런 그를 보며 할아버지가 눈을 빛냈다.
“네 생각은 다른 모양이지?”
“저요?”
“순순히 수긍했지 않느냐.”
“하하, 저는 정성그룹 사람도 아닌데 제가 뭘 생각하겠어요.”
“아니. 이 할아비를 까막눈으로 만들면 안 되지. 네 녀석 머리에는 이미 우리 회사의 신사업이 들어있다. 아니냐?”
“제가 보기에는 할아버지도 염두에 두신 사업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네가 생각이 같으면 안심하고 추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놈아. 할아비로서 영특한 손자에게 묻는 게야.”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이휘는 자신이 아는 미래의 산업 중 지금 상황에 적합한 것을 말했다.
“임원분들이 얘기한 신사업은 현재 정성그룹이 가진 여유자금으론 도전하기 힘들어요. 그렇다고 미래지향적이지도 않고. 제가 생각하는 쪽은 문화산업입니다.”
“문화사업?”
할아버지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아, 이게 아닌가?
“어째서 문화사업을 떠올린 게냐?”
“할아버지는 뭘 생각하셨는데요?”
“IT다.”
“…!”
이휘는 소름이 좍 돋았다. 지금은 IT버블이 터지기 전. 버블이 터지면 주가는 곤두박질친다. 현재 정성그룹의 재정상태를 생각하면 관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안돼요.”
“왜? 지금이 적기라고 본다.”
“이미 뛰어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에요. 레드오션이죠.”
“다 조그마한 곳들이다. 전부 돈을 벌고 있고. 우리가 들어가서 다 빼앗으면 돼.”
이휘는 가슴이 턱 막혔다. 미래를 알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더더욱 문화사업을 해야 합니다.”
“뭐?”
“IT가 뜨면 문화사업과 시너지가 장난 아니에요. 두 산업 간에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우리네 생활에 밀접하다는 것. 우리 삶을 좀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점. 날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까지.”
“나는 왜 IT산업이 먼저가 아니냐고 물은 게다.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는 사업을 반대하는 이유가 궁금한 게야.”
할아버지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닷컴버블의 위험성을 인지시키는 수밖에.
“지금 정성그룹이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곳에 투자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시죠?”
“물론이다.”
“자, 만약에 문화사업을 해서 잘 안 됐다고 쳐보자고요. 어쨌든 실물이 있으니 운영방식을 바꾸든 재투자를 하든 정리를 하든 최소한은 건질 수 있습니다.”
“궤변이다. IT는 돈이 덜 들어.”
“제 생각은 달라요. 열심히 선 깔고 인터넷 서비스 시작했는데 무선인터넷이 나오면? 기술혁명 한 번이면 폭삭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
할아버지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를 모르는 그로선 IT산업이 탐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가 뛰어든 거니까.
“IT는 레드오션이고 문화산업은 블루오션이에요. 독점해서 버는 편이 더 낫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직 국내에선 작은 기업들뿐이니 문화 쪽에서 수입을 올리면서 좀 더 확실한 때가 오면 IT를 추진하시죠. 서로 연계해서. 잘 다져진 지반 위에 건물을 짓는 것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는 고민 끝에 말했다.
“네 의견을 회의에서 꺼내보마. 다른 임원들의 생각도 물어봐야지.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안 그래도 얼마 전 JC그룹에서 골든빌리지란 극장 브랜드를 런칭했어.”
알고 있다.
골든빌리지는 곧 JGV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대의 극장 브랜드가 된다. 심지어 해외로 진출해 세계 5위의 극장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후발주자로 들어선 로시네마, 히트박스가 어깨를 견주려하지만 어마어마한 자본력과 마케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약세를 보이고 만다.
만약 정성그룹이 극장산업에 뛰어든다면 이 바닥을 독점하려는 JGV와 먼저 맞대결을 벌여야 할 터였다.
현재 정성그룹의 자금사정을 봤을 때 JC그룹과의 대결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통찰력이 뛰어난 할아버지마저도 IT업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마당에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성그룹이 IT산업이 아닌 문화산업을 추진하게 만들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뿐이다.
JC와 한판 붙어볼만한 자본을 밀어주는 것.
‘효자 노릇 한 번 해야겠네.’
입맛을 다신 이휘가 말했다.
“할아버지, 그 회의할 때 꼭 이 말도 전해주세요.”
“어떤 말?”
“문화사업이 흑자를 낼 때까지 교통이 편리한 중심가에 건물을 무상임대해줄 사람이 나타났다고요.”
“뭣이?”
할아버지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네가 사들인 부실채권은 모조리 처분한 것 아니더냐?”
“설마요. 노른자는 남겨뒀죠. 서울 내 한강변은 대부분 제 땅입니다. 서울시내 중심가들도요. 강변은 빼고 시내는 강남에만 8곳, 강북에 4곳을 무료로 빌려드리겠다는 겁니다.”
“허…!”
“아, 참고로 명동, 강남, 잠실도 포함돼 있어요.”
“지금 이 불황이 끝나고 나면 건물 임대료만 받아도 금방 원금 이상 뽑고도 남을 텐데?”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세를 받고 시세차익을 건지는 거지 제 건물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제게 아니잖아요?”
“그야 당연히….”
중얼거리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조건이 있구나.”
“네. 조건이 있습니다.”
“그래, 네가 할아비 돕는다고 공짜로 건물을 빌려줄 녀석이었으면 어떻게 그 돈을 모았겠느냐? 얘기해봐라!”
“이번에 만들 계열사의 최대지분을 주세요. 회사 경영에는 관여치 않겠습니다.”
“지분만 가져가겠다? 단지 그 조건으로 흑자가 날 때까지 무기한 건물을 임대해주겠다 ?”
“확신이 있으니까요.”
“이 사업이 실패한다면 넌 시간과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이휘가 미소지었다.
“저는 세금 꼬박꼬박 내가며 공실로 두다가 시세차익만 건져도 부실채권일 때 매입했던 비용 이상 뽑아요. 돈을 잃는 건 인테리어, 마케팅, 인건비 등등 지출한 정성그룹이겠죠.”
“열심히 하라는 말로 들리는데?”
“미래의 최대주주. 전주(錢主)로서 하는 말이에요. 경영진은 제가 임명하는 게 아니니까.”
“하하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자놈 하나는 제대로 뒀어, 내가. 이럴 수가 있나.”
이번 건 순수한 감탄이 맞다. 복받치는 감정을 어찌 못해 얼굴까지 붉히고 있었으니까. 산전수전 다 겪어가며 수 세월 살았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휘의 모습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강 변에게 들을 때까지만 해도 순한 양은 아니었구나, 늑대 새끼구나 했는데 아니다. 이건 호랑이 새끼도 과소평가다. 다 큰 대호(大虎)가 따로 없다. 당장에 자신에게 달려들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지금 네 모습을 본다면 모두가 놀라 까무러칠 텐데!”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이휘가 씩 웃으며 말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듣는다고 믿겠냐?”
“그래도요.”
“네 큰아버지들 때문이구나.”
“네. 제가 계열사의 최대주주가 된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할 거예요. 정성그룹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예?”
“아, 아니다.”
할아버지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다음 투자처는?”
이번에는 부실채권이었다.
론스터를 몰아내고 각기 7배 이상 수익을 거뒀다.
절반은 이휘, 절반은 방준수가 해낸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휘만의 정보력을 발휘할 때다.
“중국이에요.”
“중국?”
“네. 거기 우리를 부자 만들어줄 늦깎이 사업가 청년이 있거든요. 아니, 아직은 시작 안 했나?”
“…?”
할아버지는 대체 이 맹랑한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알 수가 없었다.
이휘가 말했다.
“문화산업과 IT산업이 한 몸이라고 말씀드렸죠? IT를 하실 거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문화산업부터 다져놓고 하시라고요.”
“그랬지.”
“IT업계로 뛰어드실 때 도움이 될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던 네가 어떻게 중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거냐?”
“펜팔?”
“….”
할아버지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지도 않았다. 이휘를 빤히 쳐다보는데, 휘가 어색하게 웃었다.
“마원이란 사람이에요.”
“마원?”
“네.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죠. 수 조짜리 아이디어랄까.”
괴짜인 건 알고 있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걸까? 할아버지는 이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누구도 그 사람을 믿어주지 않겠지만 저는 달라요. 일단 한국에서 중요한 일 먼저 처리하고, 일주일 후부터 보름간 중국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아이디어를 가졌기에?”
“전자상거래 서비스요.”
“전자상거래…?”
“자세한 건 직접 가서 한 번 들어봐야죠.”
할아버지가 눈을 빛냈다. 장사꾼의 본능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다녀와서 나한테도 얘길 들려주려무나.”
“그럴게요.”
이휘는 슬쩍 창문을 쳐다보며 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찾아가려는 마원.
그는 장차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알리(Ali)의 창립자가 될 몸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전생에서는 뉴스에서나 보던 중국 최고의 재벌을 만날 수 있다니!
그것도 그의 가난했던 젊은 시절을 보는 거다.
할아버지가 분위기를 깨며 난입한 건 그때였다.
“그럼 일주일 사이에 이 할아비와 필드나 한번 나가자꾸나. 옛날에 골프 배운 적 있지? 적당히 따라만 다니면서 라운딩해라. 소개해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인맥을 공유하는 것은 엄청난 호의다.
그러나 이휘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 일주일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는 시간이 될 것이다. 태양의 눈물이 마치 인피니티스톤처럼 기적을 일으킬 시간.
하지만 역시, 포기하긴 아쉽다.
“준수 형 보내도 돼요?”
김 빠지는 소리에 할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아, 일주일 내내 시간을 내라는 것도 아닌데 너무한 것 아니냐? 게다가 그놈은 더럽게 못 친다!”
방준수는 지난번 할아버지가 골프연습장에 있을 때 찾아가서 펀드 가입을 받아왔다. 그때 실력을 봤나 보다.
말은 이래도 할아버지는 방준수와 라운딩을 돌 것이다.
손자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안타까울 뿐.
‘죄송해요. 할아버지.’
머쓱하게 웃은 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있었네. 할아버지, 우리 파티 즐기러 가요.”
“이 녀석이 어딜 적당히 넘어가려고….”
“중국 다녀와서 첫 번째로 찾아뵐게요.”
“이놈아. 내 나이 돼봐라. 마음이 급해!”
“정정하신데요 뭐. 앞으론 더 건강하실 거고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휘가 손을 뻗자 할아버지가 슬쩍 잡고 일어났다.
“끄응, 그럼 중국 다녀와선 꼭 시간 내거라.”
“꼭 그럴게요.”
할아버지가 힐긋 쳐다봤다.
“여자냐?”
“예?”
“중요한 일이라며! 여자와 약속이냐고 묻는 게다.”
“할아버지도 참.”
이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가타부타 대답해주지 않았기에, 할아버지는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녀석…. 으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