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34
나는 회귀했다 34
이휘는 태양의 눈물을 품속에 간직한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도미니크 레오 주한 프랑스 대사.
그리고 한 백인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존 배리 사무관입니다.”
“이휘입니다.”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찰리 맨슨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그의 눈을 화살처럼 꿰뚫는 시선으로 마주보던 이휘가 태연하게 말했다.
“제임스 본드 테마곡을 만든?”
찰리 맨슨이 살짝 당황했다.
“하하하. 음악가 존 배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던데요. 식견이 대단하시군요.”
“007 시리즈 팬이라서요.”
찰리 맨슨은 순간적으로 ‘그래서 지금 우리랑 007 놀이를 하고 있나?’라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내며 도미니크 레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 말씀 나누시죠.”
“…그러지. 나가 보게.”
고개를 숙여 보인 찰리 맨슨이 밖으로 나갔다.
“일단 좀 앉지.”
도미니크 레오가 자리를 권하자 이휘가 냉큼 앉아서 대뜸 물었다.
“이상한데요?”
“뭐가 말인가?”
도미니크는 초조했다. 오로지 이휘가 보석을 어디에 숨겼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보석을 내놓으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런 생각을 산산조각 내는 한 마디가 귀에 틀어박혔다.
“밖에서 물어보니 손님이 계시다고 했거든요.”
도미니크의 표정이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내가 바빠 보이니 둘러댄 거겠지.”
“그런가요?”
“그렇네.”
도미니크가 이휘의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네가 태양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지금도 가지고 있나?”
이휘는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태양의 눈물을 꺼내 건넸다. 도미니크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열흘 정도 굶다가 음식을 보고 감격한 사람처럼 손을 덜덜 떨며 보석을 쥐었다.
“드디어…!”
“찾고 계셨나 보네요.”
“말이라고! 국보 아닌가? 당연히 찾고 있었지.”
“예상하셨겠지만 그냥은 드릴 수 없습니다.”
이휘가 손을 쭉 뻗었다.
“돌려주시죠.”
도미니크는 순순히 돌려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보석의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안다. 이휘가 모조품을 들고 오지 않은 것도 그가 단숨에 눈치 챌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건 곤란하네. 이건 프랑스의 것이야.”
“빼앗을까요?”
“사람을 부르겠네.”
“오해만 생기겠죠.”
“자네가 이걸 가져갈 수 있다고 자신하나?”
“내기할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맞부딪쳤다. 도미니크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 방금 전 찰리 맨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보낸 해결사는 죽었고, 박병조는 실종상태다. 눈앞의 소년이 그 같은 일을 직접 저질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맨슨글로벌의 손발까지 묶어놓은 걸 보면 여간 내기가 아니다. 보석을 들고 혼자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찾아올 생각을 한 것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내가 사지.”
“국보를요?”
이휘가 피식 웃었다.
“사고 팔 수도 없겠지만 만약 산다면 프랑스에서 사야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 프랑스의 것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면 돌려주겠나?”
“돌려주러 온 겁니다.”
“…뭐?”
도미니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프랑스의 것을 프랑스에 돌려주러 온 거라고요.”
아니, 이 보석의 가치를 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 비단 한 나라의 국보라서가 아니다. 레드다이아, 특히 5캐럿이 넘는 레드다이아는 전 세계에 5개밖에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아프리카에선 평범한 다이아몬드를 캐기 위해 매일 같이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 다이아몬드를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도 부르는 판국에 세계 전역에 5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레드다이아를 그냥 줄 리가 있겠는가?
“부르는 게 값이라지만 값을 책정할 수 없는 보석이야. 그냥 돌려줄 리는 없고 얼마를 원하나?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솔직히 얘기하게.”
“돈은 필요 없습니다. 위고 캉드쉬 IMF 총재를 설득해주세요.”
“뭐?”
“IMF를 막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현 비공개 대책팀의 명단을 원합니다. 지금까지의 협상과정을 백지화하고 새로운 대책팀을 지명, 재협상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하물며 IMF는 국가기관도 아니고.”
“총재님과 친분이 깊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린 나이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네.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아무리 국보라 해도 보석 하나 얻자고 부정을 저지를 수야 있나. 나뿐만 아니라 IMF 총재께서도 그런 분이 아니시네.”
“그런가요?”
잠시 말이 없던 이휘가 단번에 불타오를만한 화두를 던졌다.
“10년 전. IMF 총재님이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던 시절에 어디 계셨습니까?”
도미니크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그건 왜….”
“직함은 교수셨지만 뒤에선 국제브로커로 활동하고 계셨죠.”
이건 이휘의 망상이 아니다. 도미니크가 당황하는 것도, 그가 국제브로커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근거가 있다.
실제 도미니크 레오는 퇴임 후 그 생애의 부정이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휘는 다른 국제 브로커를 수사하며 이 같은 자료를 참고한 기억이 있었다.
그중 도미니크가 했던 일은 뉴욕 월가(Wall Street)의 공룡들과 당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였던 위고 캉드쉬를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위고 캉드쉬는 몇 년 후 IMF 총재로 등극, 월가의 앞잡이가 되어 월가가 일으키는 경제위기의 전리품을 나눠 먹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고.
따라서 도미니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의 작은 괴물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을까?
이 소년의 말대로 자신은 위고 캉드쉬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위고 캉드쉬에게 부탁한다면 협상팀을 바꿔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호간에 너무 큰 손해다.
도미니크는 보석을 훔쳐 위기를 탈출할 방법을 쥐어짜며 일단 오리발 작전으로 나갔다.
“무슨 얘길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정부에 얘기해서 레드다이아를 돌려받을 수도 있다.”
나름 괜찮은 카드라 여겼다.
그러나.
“왜 진즉 그러지 않았습니까?”
“…뭐?”
“정부에 요청하지 않고 맨슨글로벌에 태양의 눈물 탈취와 운반을 요청한 이유를 묻는 겁니다.”
“당최 무슨 소린지….”
“설마 저한테 킬러를 보낸 맨슨글로벌에 대해 조사도 안 했을까요.”
“….”
이제 도미니크는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아마 머릿속이 분주할 것이다. 이휘가 보석을 가져가려 했던 배후가 맨슨글로벌이란 것까지 간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설마…!’
도미니크는 말도 안 되는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이휘가 애초에 맨슨글로벌이 가진 보석의 존재를 알고 중간에서 가로챘다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온갖 의문이 치솟는 가운데 이휘는 시간을 주지 않고 물었다.
“전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대사님이 프랑스 내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같은 일을 벌이셨다는 것까지요. 이래도 안 되겠습니까?”
도미니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추측하고 떠보는 정도가 아니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속내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자신은 보석만 가져가면 될 일.
“왜 찰리 맨슨을 모른 척했지?”
“아는 척하면 헛소리를 할 것 같아서요. 이렇게 평화로운 자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도미니크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그놈들이 보낸 킬러를 제거했던 것처럼.”
“…네 짓이었군.”
“네.”
이휘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선 당신도 해치우고 싶어요.”
“난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건… 맨슨글로벌에서 생각한 방식이야.”
“그래도 이 모든 걸 시작한 건 당신 아닙니까?”
“그래서, 날 죽일 생각인가?”
“아뇨.”
“그럼 이런 얘긴 그만하지.”
은근히 겁이 나는지 도미니크가 화제를 돌렸다.
“내가 수락하면 다이아는 내 것이 되는 건가?”
“그까짓 게 뭐라고….”
“뭐?”
“아닙니다.”
이휘가 손을 내밀었다.
“일이 마무리 되면 그때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믿지?”
“제가 대사님을 적으로 둘까요?”
잠시 말이 없던 도미니크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보석을 돌려줬다.
“…맨슨글로벌이 자넬 노리고 있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손발이 묶여서 좀 더 참을 줄 알았지만.”
“곧 중국에 나간다지?”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입니까?”
“그래. 한국에선 검찰 눈치를 봐야하니 중국에서 처리한다더군.”
“막을 수는?”
“없네. 내 말을 들을 리 없지. 오히려 그렇게 되면 보석을 자기들이 꿀꺽하려 들 거야.”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도 이휘는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를 보는 도미니크는 새삼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보석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딴 생각 마세요.”
“내가 왜 그러겠나? 부탁 한 번이면 태양의 눈물이 내 품으로 굴러 들어올 텐데. 하지만 말했듯 쉽게쉽게 처리될 문제는 아니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걸세.”
“앞으로 일주일. 중국 가기 전에는 답이 나와야 할 거예요.”
나지막한 경고를 남긴 이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뒤에 남겨진 도미니크가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찰리 맨슨이 전화를 받았다.
-얘기 끝났습니까?
“서로 조심해야 하는 처지이니 죽이지는 맙시다. 심하게 다루지 말고 보석만 빼앗아서 가져오는 거요. 당장!”
-우리도 그 자식한테 빚이 좀 있어서요. 보석은 넘기고 그놈은 저희 방식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닥치시오! 그 방식이 사단을 만든 걸 모르겠어?”
-하하,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죠. 아직은 만회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보석을 가져오시오. 난 분명히 말했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석을 넘기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빼앗아야겠죠. 빼앗다가 일이 틀어지면 뭐… 깨끗하게 처리할 겁니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도미니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지저분한 놈들과 엮이면 만사가 피곤해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뱃놈들이 거칠다더니 평생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미친놈들이 아닌가?
“…마지막이야.”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
대사관을 나선 이휘는 머지않아 미행이 붙은 걸 눈치 챘다. 사이드미러를 응시하던 그가 불쑥 말했다.
“꼬리 붙었는데?”
운전석의 알렉세이가 표정을 굳히더니 차선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러자 2칸 뒤에 있던 차량도 함께 움직였다.
썩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심증을 갖고 보면 다 티가 난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예상치 못했던 말을 했다.
“세 대다.”
“세 대?”
“고가 위에 두 대.”
이휘가 고개를 홱 돌렸다. 과연 8인승 승합차 두 대가 앞뒤로 고가를 내려오고 있었다. 굳이 고가 위를 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히 작정했나본데.”
“그 프랑스 대사 짓인가?”
“아니. 그럴 깜냥은 못 돼.”
“그럼?”
“맨슨글로벌이겠지.”
“지겨운 새끼들!”
알렉세이가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그러든 말든 이휘가 물었다.
“떼어낼 수 있겠어?”
“시내에선 힘들다. 곧 따라잡힐 거야.”
“경찰서로 가자.”
“경찰서?”
“이런 상황에 그게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잖아? 따라잡혀서 저놈들을 모조리 해치운다 해도 우린 조사 받을 거야. 그게 날 유괴하는 것 다음으로 맨슨글로벌이 노리는 상황일 테고. 날 빼내준다 뭐 이런 걸로 협상하려할 수도 있지.”
“그런 이유로 언제 다시 들러붙을지 모르는 놈들을 내버려둔다고? 차라리 유인해서 혼줄을 내주는 게….”
싸움을 못해서 죽은 귀신이 달라붙었나?
이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참아.”
그때였다.
바아아앙!
속도를 올리는 상대 차량의 배기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