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41
나는 회귀했다 41
IMF 협상 당일.
대한민국 재정경제원 IMF 협상팀 팀장 하진성은 언제 올지 모르는 국가부도의 날을 대비해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자료를 펼쳐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진성의 예상과는 달리, IMF 총재 위고 캉드쉬는 강경책으로 응수했다.
그는 이휘와의 밀담에서 협상팀 교체를 요청하겠다고 약속했을 뿐 협상안을 바꾸겠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은 것은 완벽히 무장해제 된 상태로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했던 협상팀이 아닌, 싸울 의지가 있는 하진성이 협상팀을 맡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떻게라도 IMF측 제안을 한국이 유리한 쪽으로 바꾸려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하진성은 결국 겉돌기만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 해도 되겠습니까?”
“시간낭비요.”
협의단장 타르한 페이지가 말했다.
“서로 물러설 생각이 없다면 이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한테 도움을 청한 건 한국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하진성은 입술을 축였다.
“IMF는 무리한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져온 협상안에 싸인을 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영원히 외국 자본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거 말이 안 통하는군요. 우릴 무슨 한국을 노리는 하이에나 보듯 대하시니…. 우린 한국을 도우러 왔고, 리스크에 대해 한국의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진 IMF 전문가들이 분석한 내용을 바탕 삼아 협상안을 만든 겁니다. 그게 바로 한국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숨통을 틔워줄만한 외부의 자본이 필요하다는 거였고요.”
“동의합니다만….”
하진성이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안색을 붉히고는 흐려지려는 눈동자 초점을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한숨을 내쉰 협의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삼십 분 후 다시 시작합시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하진성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밖으로 나갔다. 창문 앞에 섰을 때, 곁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료탱크를 부숴서 한국경제의 동력을 빼앗고 외국자본이라는 새 기름으로 채워넣는다… 이대로 협상이 진행되면 영원히 외국 자본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깜짝 놀란 하진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 젊은이가 서있었다. 아니, 젊은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어려 보였다.
마치 대학생처럼.
동안의 기자를 쳐다보던 하진성이 쓴 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운이 좋았죠.”
이휘는 목에 걸고 있던 기자출입증을 벗고 벽에 등을 기댔다.
“완벽한 함정에 빠진 기분이 어때요?”
“완벽한 함정…?”
하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완벽한 함정.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협상내용을 모르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때려맞췄다기에는 이휘의 표정이 너무 당찼다. 그러고 보니….
“운이 좋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기자님 맞습니까?”
“저를 애타게 찾으셨다고 들어서, 이렇게 직접 왔습니다.”
이휘는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가면일 뿐이었다.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장인어른의 젊은 시절을 직접 봐서가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아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안부를 묻고 싶은 심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믿지도 못할 감성팔이를 할 게 아니라 믿음을 줘야한다.
아니나 다를까 장인은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설마… IMF 협상단을 내세워서 저를 이 자리에 앉힌 게…?”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런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이 IMF 협상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당연히 힘 있는 외국의 자본가가 더 쉬운 협상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을 지명했다고 여겼는데.
이휘의 한 마디로 의심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네, 그거 제 작품이에요.”
이휘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협상을 결렬시킬 각오로 임하십시오.”
“…!”
장인이 두 번째로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쉽게 감정을 드러내던 사람이었나? 절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휘는 신기하게 그를 마주보며 덧붙였다.
“저쪽은 협상이 결렬되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우리한테는 아무런 무기가 없어요. 하지만 발가벗겨졌어도 아직 배짱과 담력이라는 무기는 있습니다. 그걸 활용하세요.”
“그러다 진짜로 협상이 결렬되면? 그러면 끔찍한 상황이 발생할 겁니다. 우리가 의지할 곳은 IMF밖에 없어요. IMF도 그걸 알기 때문에….”
장인이 말을 멈췄다. 상대가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더 이상 가면 기밀을 누설하는 꼴이다. 자기도 모르게 주절거리던 것을 탓하며 장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불가합니다.”
“저들은 이번 협상을 포기하지 못해요.”
“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그가 보기에 이휘는 IMF 협상팀에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모로 보나 두려운 상대였지만 적이면 휘둘리지 말고 이용해야 한다. 아군이라면 누구보다 강력한 아군이 되리라.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누볐다.
어쨌든 유일한 탈출구가 된 이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일단 이번 외환위기가 자연재해는 아니라고 봅니다. 인위적으로 재앙을 일으켰다는 거죠.”
“음모론입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제 추측이니까요. 뭐가 됐든 지금 상황에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저들 편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믿음이 먼저니까요. 제가 저들과 한 편이었다면 어떻게든 이번 협상을 추진하라고 설득했을 겁니다.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저들은 헛고생만 하고 돌아간 게 돼요.”
장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영리하다. 말이 잘 통한다. 그는 아는 것이다.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외화자본이 대한민국의 일부를 잠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말씀해주세요. 저랑 같은 생각이시죠?”
“심증일 뿐이지만… 그렇습니다.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저들의 제안이 이해가 갑니다. 동남아부터 우리까지 다 같은 함정에 빠졌으니까요.”
“맞아요. 다른 조항들에 숨겨뒀지만 저들은 외화자본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목적이 명확해요. 만약 이대로 협상이 진행된다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외국자본에 멱살 잡힌 채 질질 끌려 다녀야할 겁니다. 다시 외환위기를 맞기 싫다면 말이죠.”
장인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장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같았다
선결조건에 한국 종합금융사 11개 업체의 부도처리가 포함된다.
협상안 A안에서 한국의 ‘금리인상’을 요구하고 있고.
B안에선 98년 6월까지 ‘외국 금융기관이 한국 금융기관을 인수합병 할 수 있게 법과 제도를 바꾸라’고 명시하고 있다. 얼마 안 남은 기간이지만 이미 인수합병을 준비하고 있는 외국계 금융기관이 한 두 곳이 아닐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D안인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시행되면 국내 금융기관들은 동력을 잃게 되고, 그 틈을 타서 외국계 금융기관이 암전에 빠진 국내 금융기관을 꿀꺽 집어삼킬 것이다.
어떻게?
‘채권시장의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고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이용해서.
론스터가 하려던 것처럼 국내 금융기관을 부실채권으로 만들어 아주 싼 값에 사들이는 거다.
금융기관만?
아니, 아니지.
E안에서도 같은 포석을 깔고 있다. 기업 경영 및 지배구조 즉각 개선. 그리고 B안의 또 다른 조건인 ‘외국인 주식투자 소유한도를 7%에서 50%로 늘린다’는 조항을 이용해 기업까지 침투하려는 속셈이다.
대한민국 금융과 기업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이 나라의 숨통을 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향후 어떤 외교에서도 우리는 을(乙)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해외의 경제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외화의존도가 올라간다는 것은 경제적 식민지를 뜻한다. 그리고 경제적 신민지란 자본주의에서 외교적 식민지나 다름없다. 다시 한 번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할 바에야, 이번 협상으로 뭐라도 건지려 할 겁니다. IMF에 200억 달러를 받고 영원히 지배당하고 싶지 않으면 200억 달러 수준의 피해만 감수하면 됩니다. 며칠이 걸리든 그때까지 협상을 진행하세요.”
그 말을 들은 하진성은 등허리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아마 협상 과정 중에 무수한 외압을 받을 것이다.
협상을 빨리 진행하라는 정부의 재촉이 있을 테고.
IMF에서도 숨통을 죄여올 게 빤했다.
내, 외적으로 어마어마한 압박을 견디며 협상에 성공한다 해도 자신의 자리를 내놔야할지도 몰랐다.
모든 공은 현 정부의 공이 될 것이요, 모든 과는 자신의 차지가 될 터였다.
지금 눈앞의 이 소년은 자신에게 이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버리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명예마저도.
“저는 먹여 살릴 식구가 있습니다.”
이휘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려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생의 아내를 말하는 거다. 하지만 장인은 모르고 있다. 그녀가 어떤 아버지의 모습을 원하는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빼앗은 조국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던 여자다.
강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라면 비겁하게 가정을 건사하는 아버지보다 장렬하게 태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이 나라를 구해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원할 것이다.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이휘가 대답해 줄 말은 명확했다. 그녀가 언젠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고스란히 전해줄 차례다.
“팀장님 어깨에 5천만 국민이 달렸습니다. 그들 모두 먹여 살릴 식구가 있죠. 팀장님처럼요. 그들을 위해 팀장님이 거리에 나앉는다 해도 아내와 자녀분들에게는 떳떳할 수 있을 겁니다. 직장은 새로 잡을 수 있지만, 경제적 위기는 극복할 수 있지만 치욕과 후회는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불치병과 같죠. 그러니 영원한 자부심을 선택하세요. 그 자부심이 아내나 자녀분들 가슴 속에서도 영원히 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아버지가 될지는… 팀장님의 선택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선물이고요.”
이휘가 품속에서 꺼낸 태양의 눈물을 휙 던졌다.
얼결에 받아든 장인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묵직한 게 진짜 다이아 같았다. 하지만 장인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이런 크기에, 붉은 다이아를 본 것은 처음일 테니.
물론 장인이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위고 캉드쉬 총재에게 전해주세요. 그분 것입니다.”
“…?”
장인은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이휘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어차피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제 전생의 장인인 하진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차례다. 그게 어긋난다면 어차피 일어나야할 일이 일어나는 것뿐.
역사의 흐름을 바꾸든 그대로 두든 그 열쇠는 이제 하진성에게 넘어갔다.
한참이나 이휘가 떠난 곳을 응시하던 하진성은 몸을 돌려 협상테이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