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42
나는 회귀했다 42
“협상은 없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한 마디에 협상장 실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휴지조각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린 IMF 협의단장 타르한이 외쳤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한국측 IMF 협상팀 팀장 하진성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되찾았다.
저쪽에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오늘 갑자기 찾아온 소년의 판단이 들어맞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새로 준비한 협상안은 IMF측 조건을 최대한 수용한 것입니다. 이 이상 불리한 조건을 수락하는 것은 협상을 포기하는만 못합니다.”
“그게 무슨….”
타르한은 말을 멈췄다. IMF 총재 위고 캉드쉬가 손을 들어 만류한 것이다.
그가 서늘한 시선으로 하진성을 노려봤다.
“한국은 자력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말 한국 정부의 뜻입니까?”
“저희 협상팀은 국민과 정부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여기 나온 우리를 헛걸음시키겠다는 뜻입니까?”
“저도 IMF 협의단이 빈손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IMF에서 제안한 협상안을 수용한 것이고요. 비율만 조절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용한 만큼만 IMF도 양보를 해주시지요.”
위고 캉드쉬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위기인 것은 인정합니다. 당장 회복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반이 잡힐 겁니다. 전 국민이 더 많은 시간 고초를 겪어야겠지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료 못 보셨습니까?”
“….”
“과거 여러 나라의 경제위기를 분석한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IMF 조사팀의 결론은 ‘향후 50년 간 자력으로 회생이 불가하다’입니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지금, 50년이나 벌어진 격차는 결코 메울 수 없을 겁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 나라에 유능한 국민들이 남아있는 한 우린 결코 과거로 퇴보하지 않습니다.”
하진성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자 위고 캉드쉬가 등받이에 편히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희망적인 생각은 좋은 겁니다. 하지만 공무를 보실 땐 명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현실을 봐야지요. 감정적으로 처리해서야 되겠습니까? 팀장님의 이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부는 그 기능을 잃을 겁니다. 국가가 도산하면 국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위고 캉드쉬가 눈짓하자 보좌진이 자료를 뿌렸다. 자료에는 IMF에서 내려준 구명줄을 잡지 않을 경우 한국에 일어날 일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거친 압박이었다. 하진성은 정신이 아득하고 숨통이 막혀왔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을 찾아온 소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IMF는 결코 이번 협상이 결렬되길 원치 않을 겁니다.
그것이 소년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하진성 역시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협상을 포기해버리면? 대한민국은 끈 떨어진 연이 되어 태풍 속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흔적도 없이 찢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 줄을 잡았다. 소년과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IMF 총재가 이번 위기에서 건지려던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우린 이보다 큰 위기에서도 여러 번 살아남았습니다.”
“불도저 같은 분이군요.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
“외세에 의존해서 살아남은 겁니다. 그랬기에 회생할 기회라도 있었던 거고요.”
하진성은 쓰게 웃었다. 마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프랑스인인 위고 캉드쉬가 마치 그 시절의 치욕적인 역사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우스웠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무기가 아닌 정신과 의지로 하는 싸움이라면 우리 국민들은 결코 지지 않습니다.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것이 우리의 국민성입니다.”
위고 캉드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정부의 생각도 같은지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그가 눈짓하자 타르한이 잠시 나가서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그러기 무섭게 협상장의 전화벨이 크게 울려 퍼졌다.
위고 캉드쉬가 고개짓을 했다.
“받으세요.”
달각….
수화기를 들어 올린 하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첫 마디부터 욕이었다. 재정경제원 1차관이 불같은 노성을 토해냈다. 도저히 끝까지 들을 수 없어 수화기를 끊어버린 하진성이 위고 캉드쉬를 노려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만 저항하라는 권고입니다.”
“권고요?”
“다음은 협박일 겁니다.”
“나를 협박할 수 있다고 봅니까?”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할 겁니다. 이후 어떤 자리로도 갈 수 없을 테고요. 패밀리레스토랑이나 피자집을 차리는 것까진 막지 않겠지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날 협박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
“우린 지금.”
위고 캉드쉬가 말을 이었다.
“극비리에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정부에서도 협상내용이 미리 알려지길 원치 않아요. 뿐만 아니라 대선후보 세 분 모두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의견을 밝힌 상황입니다. 선결조건, 잊었습니까?”
“….”
하진성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나오면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를 꽉 깨문 그가 입을 열었다.
“잊지 않았습니다.”
굳게 결심한 표정의 하진성이 자신의 목에서 신분증을 풀어서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더니 확고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날 책임자로 요청했습니다. 한 번 더 책임자 변경을 요청하기 전까진 대한민국 정부도 날 어쩌지 못합니다. 2회의 책임자 변경은 IMF가 구제대상 국가를 상대로 갑질을 하고 핍박하는 그림으로 비쳐지겠죠. 그래도 좋다면 저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십시오. 이번 협상의 책임자로서 대선후보가 아니라 현직 대통령이 협박한다 해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총재님께서는 IMF측 의견을 적극 수렴한 저희 협상팀의 제안서를 수용해주시던지, 협상 결렬을 공표해주십시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 속에서, 위고 캉드쉬가 고개를 저었다.
2시간 후.
기자대기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협상 끝났습니다. 기자 분들께서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자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 틈에는 이휘와 알란도 있었다. 이휘는 국내 언론사 기자로, 알란은 외신기자로 위장한 상태였다.
협상장 안으로 들어서자 칼만 안 들었지 한 바탕 전쟁을 치렀을 위고 캉드쉬 IMF 총재와 한국 협상팀 대표 하진성이 정겨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위고 캉드쉬의 미소 속에는 분개함이 있고, 하진성의 미소에는 후련함이 가득하다는 것뿐이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고.
악수를 마친 하진성은 뒤돌아서 이휘가 준 레드다이아를 꺼낸 뒤 위고 캉드쉬 총재에게 은밀히 건넸다.
그러자 위고 캉드쉬 총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걸 어떻게…!”
“협상 도중 저를 찾아온 친구가 그러더군요. 총재님 것이라고.”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레드다이아를 넘겼다. 그걸 받은 위고 캉드쉬 총재의 손이 덜덜 떨렸다. 오히려 이 모습을 지켜보는 하진성의 얼굴에 짙은 의문이 드리웠다.
“그게 뭐기에….”
위고 캉드쉬 총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하진성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 다이아 때문입니까?”
“…뭐가 말입니까?”
“협상팀 교체를 요청한 것.”
“무슨… 그럴 리가 없지 않소.”
위고 캉드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본 하진성은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이번 일이 보석과 관계가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레드다이아가 진품이라는 것도. 그리고 레드다이아가 단지 다이아몬드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것도 직감했다.
‘대체 뭐하는….’
고개 돌린 그의 시야로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바로 이휘였다. 이휘는 협상이 끝난 걸 지켜본 뒤 협상안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어떤 청년일까?’
하진성은 이휘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요량이었다. 협상 조건을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고 나면 당분간 백수가 될 것 같으니 말이다.
***
협상장을 빠져나와 차를 타자 알란이 입을 뗐다.
“협상안 조건은 안 들으셔도 되는 겁니까?”
“애초에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 일을 맡겼으니 상관없습니다. 알아서 잘 했겠죠.”
“협상팀 팀장을 굉장히 믿으시는군요.”
“그분에 대해 잘 알거든요.”
“좋은 분입니까?”
“네. 그리고 유능한 분입니다. 그분이 막을 수 없다면 다른 누가 와도 같을 겁니다.”
알란이 짧게 눈을 빛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드디어 그 애물단지를 떼어내셨군요.”
태양의 눈물을 말하는 거다.
이휘가 피식 웃었다.
“속이 다 후련하네요.”
“태양의 눈물이 IMF가 계획했던 협상과정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균열이 결과 자체를 바꿔버렸고요.”
“…영향을 줬죠.”
“심지어 그 물건이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주한 프랑스 대사와 IMF 총재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뜻대로 된다면 그럴 겁니다.”
“전부 다 계획하신 겁니까?”
알란이 대뜸 묻자 이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요.”
“겸손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미소 띤 그가 말을 이었다.
“정치인들만 해도 10년, 20년 후를 계획하고 법안을 추진한다지만 저는 그 정도 역량이 안 됩니다. 그만한 머리도, 힘도, 우군도 없죠. 그저 큰 그림을 그린 뒤 그때그때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나 두 개 틀어지다 보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안전한 길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리스크는 감수해야 합니다. 내가 우물쭈물하지 않고 과감하게 움직이니 저들도 나의 존재를 예측하거나 대비하지 못하는 거고요.”
알란이 피식 웃었다.
“저도 상상 못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꼴통처럼 구실 줄은….”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놀림이라기 보단 농담 섞인 감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웃어넘기는 이휘를 보던 알란이 다시 물었다.
“이렇게 영리하신 분이, 저희가 배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이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신이 똑똑하다고 믿었으니까. 반대로 알렉세이는 바보 같다고 여겼고요.”
“그 말씀은….”
“똑똑한 알란은 내가 2중, 3중으로 보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비했다고 생각했을 테고 알렉세이는 보석 같은 건 관심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진짜로 보석을 빼앗거나 훔치려 했던 건 아닙니다.”
“알아요.”
“진짜로요.”
“그것도 압니다.”
“….”
잠시 말이 없던 알란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죠. 유리 다예프나 장물아비들에게 처분하려 했다면 우릴 죽이고 보석을 가져갔을 겁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봐요. 똑똑하다니까?”
“후우, 못 당하겠군요.”
헛바람을 내뱉은 알란이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이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서 대비를 했었다는 건지, 아니면 제 안목을 믿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잘 보신 겁니다. 제가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세이가 바보인 건 확실하죠. 유리보다 당신을 택한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