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43
나는 회귀했다 43
이건 이휘도 조금 놀랐다.
“알렉세이가?”
“예. 아마도요.”
“나랑 유리 중에 누굴 죽일 거냐니까 유리가 의뢰인이라던데…?”
“당신이 1달러만 줘도 의뢰인을 바꿀 겁니다.”
“왜요?”
“저랑 같은 이유 아니겠습니까? 고작 열일곱 살에 억만장자가 됐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억만장자야 찾아보면 있겠지만 그 나이에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무기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허, 나 참.”
뼛속까지 군인이다.
그래서 더 큰 의문이 들었다.
“스패츠나츠, 왜 그만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알란은 의외로 편안하게 대답해주었다.
“우린 조국을 사랑하지만 조국은 우릴 버렸습니다. 원망하진 않습니다. 짝사랑이란 걸 알았으니 조국을 위해 떠나온 것뿐입니다.”
아주 심청이 나셨다. 상대가 아버지가 아니라 러시아일 뿐이지.
이휘는 이런 신념이 불편했다. 전생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표정을 응시하던 알란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 모라토리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휘의 어깨가 살짝 굳어졌다.
“내 계획에 대해서도?”
이건 방준수더러 촉새라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러시아 국채를 사서 나중에 추심하려는 계획을 알면 조국에 충성했던 러시안 경호원들이 암살자로 바뀌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란은 당장에 암살자가 될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날 막아야하지 않습니까?”
“러시아는 달라져야 해요.”
알란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유리 다예프 같은 자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 자는 마피아와 손을 잡고 일을 하죠.”
“알란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유리에게 고용된 건 맞지만 녀석의 수하는 아닙니다. 그나마도 경호 임무라기에 수락한 것뿐이고요. 우린 마피아 따위와 같이 일하지 않아요. 만약 유리가 수입업자가 아니라 마피아 조직원이었다면 이번 의뢰도 거절했을 겁니다.”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닌 이상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이휘가 물었다.
“내가 러시아 국채를 사는 걸로 러시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당장은 지금보다 나빠질 수 있겠지만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 러시아의 기득권층은 더할 나위 단단해지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휘도 예측한 바다.
“그래서요?”
“그 피해는 오로지 국민들에게 갈 겁니다.”
사실이다.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월 평균 3만 루블(한화 55만 원)을 넘지 못한다.
세계 경제력 순위로 보면 56위 선.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그 시발점이 바로 1998년 모라토리엄이다.
하지만 이휘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국채를 쥐고 흔들면 러시아는 더 큰 경제적 타격을 입을 뿐이에요. 돈을 버는 건 제가 되겠죠. 러시아 국민들이 아닙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요?”
“그건… 후일 보면 알겠죠. 그전에,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말씀하세요.”
“만일의 경우 저희 가족들을 책임져 주십시오. 그럼 저는 휘에게 충성하겠습니다. 상대가 유리 다예프라도 죽이라면 죽이죠.”
부우웅!
알란이 악셀을 밟는 사이, 이휘는 알란의 표정을 빤히 바라봤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단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조국을 버려가며 충성할 사람이 아니다. 대화의 내용만 봐도 그는 이휘가 어떻게든 러시아의 상황을 바꿔 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현재의 이휘로선 알 길이 없었다.
***
정성그룹 계열사 중 가장 영향력이 큰 곳 중 하나, 정성자동차의 이주완 사장은 본사를 찾았다. 회의실에 들어간 그는 사장, 부사장들과 얼굴을 맞대며 인사를 주고받은 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회의실 문이 열리며 이성환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사장, 부사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다 어정쩡하게 멈췄다.
이주완 사장 역시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의 곁에, 결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휘…?’
이성환 회장은 만면에 미소 띤 채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에게서 눈을 뗀 이성환 회장의 시선이 이휘를 쫓았다. 이휘는 이번 신사업 ‘시네마천국’의 사장으로 낙점 받은 고현석 사장의 옆자리에 턱하니 앉았다.
“…!”
“…!”
모두가 놀란 가운데.
이성환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는 신사업에 관한 안건을 주로 다루기로 했기에 ‘시네마천국’의 투자자이자 최대주주인 이휘 대표를 이 자리에 모시게 됐소.”
“회장님 그게 무슨…?”
이주완이 대표로 물었다.
그에 이성환 회장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휘 대표는 우리 회사가 위기에 빠진 시점에 결정적인 자문을 해준 것도 모자라 우리 회사가 신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사업장을 제공해줬다.”
“사업장이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듣기로 하고… 고 사장.”
“예, 회장님.”
이휘 옆에 앉은 고현석 사장이 마이크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입을 열었다.
“우리 정성그룹의 신사업 ‘시네마천국’은 저희 정성미디어에서 맡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서울 내에만 ‘시네마천국’이란 이름으로 27개 극장을 설립, 운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모든 주주들이 심장이 멎은 것처럼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정성그룹의 자금사정상 지금 같은 위기상황에 다른 지역도 아닌 서울에 27개 극장을 갑자기 만든다는 것은 무리수였기 때문이다.
자연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휘에게로 쏠렸다.
이휘가 입을 열었다.
“이 사업의 총괄책임자는 고현석 사장님이십니다. 저는 투자만 했을 뿐이고요. 흑자가 날 때까지 제 건물에서 무상으로 극장을 운영하실 수 있도록 허가를 내드리고 그 대가로 저는 ‘시네마천국’의 최대지분을 받았습니다.”
이주완 사장이 이를 갈며 주변을 살폈다. 계열사 사장, 부사장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지금껏 관심도 없던 이휘가 비치는 게 보였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낸 이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회장님과 고 사장님의 재가가 있었고, 경쟁사인 JGV가 모르도록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다른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국민들이 거리로 나앉는 판에 위기를 기회인 양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모습은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는 판단이 뒷받침됐습니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이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아버지와 최측근인 고현석 사장, 이휘의 공작임이 분명했다. 정성미디어라는 있으나마나한 계열사를 붙잡고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있던 고현석 사장으로서도 새롭게 등장한 후계자, 이휘의 존재는 암흑 속의 광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사장단 회의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히는 것은, 1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이휘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주환은 온 몸이 떨려서 분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장들과 부사장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더더욱 그랬다. 잔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아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성환 회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이 자리에 말도 안 되는 파장을 불러온 음흉한 조카 놈이었다.
이휘가 뒤에 서있는 알란에게 자료를 넘겼다. 알란이 자료를 뿌리고 나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고현석 사장님과 상의한 결과 정성미디어는 지금 보고 계시는 자료에 있는 ‘멀티플렉스’ 사업에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멀티플렉스’ 사업은 두 가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휘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첫째, 복합상영관 구조로 단관극장 체제를 깨는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차차 중지가 올라갔다.
“둘째, 극장과 같은 건물에 식당, 쇼핑 시설이 들어설 것입니다. 밥 따로 쇼핑 따로 영화 따로가 아니라 한 건물 안에서 모든 용무를 해결하는 겁니다. 이는 상호 간에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일으킬 것입니다.”
“…!”
미래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었지만.
1998년인 지금은 충격적인 아이디어였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이때 사업내용보다 이휘의 존재가 더 거슬리는 이주완 사장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조카에게 존대를 하는 자체가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는 내색하지 못했다. 자신까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면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장들, 부사장들이 더욱 동요할 테니까.
그를 천천히 마주본 이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경영이나 운영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고현석이 나서줄 차례.
고 사장이 입을 열었다.
“자문은 받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경영진보다 더 선진화된 제안을 던지고, 구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분입니다. 우리 정성미디어는 앞으로도 이 대표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생각입니다.”
“마치 다 된 사업인양 말씀하시는구려.”
이주완이 태클을 걸었지만 고현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잘 되게 만들어야지요. 제 목줄도 여기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 변방의 장수인 제게 기회를 주셨으니, 한 번 목숨 걸고 매진해볼 생각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현석은 회장과 이휘를 향해 짧게 목례했다.
이제 자세한 사업 이야기가 오갈 시간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 이휘는 그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실례지만 저는 선약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러시게.”
이성환 회장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이휘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사장도, 사장단도 아니니 누가 잡을 명분도 없었다.
그가 나간 회의장 안쪽의 분위기는 마치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했다.
이주환 사장 역시 폭우를 직격으로 맞은 사람처럼 얼얼한 지경이었다.
막간의 정적을 틈타 슬쩍 비서를 부른 그가 귓속말로 지시했다.
“내 조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그를 오랫동안 모셔온 비서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났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이성환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흔든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장과 부사장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계속 진행합시다.”
***
폭탄을 터뜨리고 나온 이휘는 알란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가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이유는 단순했다. 할아버지의 부탁을 착실히 이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큰아버지를 지나치게 몰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것. 딱 그 정도면 족하다.
그러기 위해선 큰아버지가 싸울 생각마저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운전하던 알란이 말했다.
“미행이 붙었습니다.”
“놔둬요.”
이휘는 지금 청와대로 가고 있었다. 민정수석이 비밀리에 접선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IMF 협상장에서의 일 때문이라는 것은 어린애라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