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44
나는 회귀했다 44
알란은 일부러 서행했다. 미행이 잘 따라붙을 수 있도록.
그 사실을 깨달은 이휘가 피식 웃었다.
“내 의도를 간파한 눈친데요?”
“일부러 경고하는 것 아닙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
“맞아요. 청와대와 선이 닿은 사람을 건드리긴 싫을 테니까.”
“선이 닿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데요? 혹시….”
“론스터 사건을 생각하는 겁니까?”
“예.”
알란의 눈빛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러시아는 어떤지 몰라도 여긴 러시아가 아니에요. 범법자 한 명 잡자고 청와대로 유인하진 않습니다.”
“그냥 범법자가 아니니까요.”
알란은 심각했다.
“현 정권도 이번 외환위기에 숟가락을 얹은 건 아닐까 걱정되는 겁니다. 휘가 국제적 문제를 일으킨 사실을 볼모로 협박할 수 있어요. 그럼 지금껏 휘가 쌓아올린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테고요.”
아주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휘는 전생에 과거 정권의 부정부패를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어떤 정권은 자신들의 과오가 낱낱이 밝혀질 게 두려워 철저히 베일에 싸인 요원들을 원했고, 어떤 정권은 적대 정권의 과오를 밝히기 위해 요원을 이용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
이해주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대한민국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일으킨 사나운 폭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흔들리고는 있지만 중심을 지키는 인물이다.
번번이 위대한 업적으로 남을 수도 있는 정책들이 가로막혔고, 결국 대통령 임기 동안 뚜렷한 업적 하나 남기지 못한 허수아비가 됐지만 대쪽 같은 의기는 존경할만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휘는 알란이 좋아할만한 대답을 해주었다.
“…이 나라 국민들이 제대로 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길 바라죠.”
“….”
알란은 조금 감동한 표정으로 운전을 했다. 청와대에 들어서자 검문이 있었다. 확인을 마친 뒤, 이휘는 무사히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차를 세운 알란이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이따 봐요.”
휘는 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비서를 뒤따라갔다. 청와대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좁은 밀실에 TV에서나 보던 민정수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군요. 보고는 받았지만 정말 이렇게 어린 학생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휘는 머쓱했다. 이럴 땐 조금 불편하다. 적들이야 그가 어린 학생인 걸 알면 방심하지만 같은 편이면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기 일쑤다. 물론 머지않아 의심의 눈초리는 경악으로 뒤바뀌었지만.
이휘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청와대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군사정권 때 쓰던 곳입니다. 아, 그 시절을 아시려나요?”
“아뇨.”
“무서운 시절이었죠.”
더 이상 자세한 말을 생략한 민정수석이 회상에 빠지려는 찰나.
이휘가 현실로 끄집어냈다.
“떳떳치 못한 말씀을 하시려고 저를 부르신 건가요? 밀실이란 게, 보통 모략이나 음모를 꾸밀 때 쓰이는 것 같아서….”
“하하하, 아닙니다. 정적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뿐이죠. 부정적인 목적으로 쓰일 때도 있지만 때론 투사나 의사들도 애용하는 곳이 아닙니까?”
이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바로 본론을 들을 수 있을까요?”
“좋습니다.”
민정수석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말투도 달라졌다.
“그동안 이휘 학생… 에 대해 저희 나름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처음 조사하기 시작한 건 론스터의 부실채권을 선수 친 후였죠.”
채권을 한 두 푼 가져간 게 아니니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국가 위기의 순간에 엄청난 이득을 봤으니.
그러나 이휘는 이를 알 수 없도록 철저히 개인으로서 움직였다. 자금흐름도 최대한 티 안 나게 관리했다. 부동산 매입이야 어쩔 수 없지만 설마 청와대에서 그같이 작은 움직임을 포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 생각보다 정보력이 대단한데요?”
“금감원이나 국세청도 신경 쓰지 못한 걸 저희가 알고 있으니까요.”
민정수석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드러났다.
“요즘 같은 난국에 사사로운 부분까지 신경 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캐내다보니 전혀 사사롭지가 않더군요.”
이휘가 쓰게 웃었다.
“그런가요?”
“재정경제원에서 협상팀을 바꿨습니다. 물론 대통령 재가가 있었지만요.”
“…예.”
“대선후보 셋이 이미 이번 IMF 협상안에 찬성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협상팀이 바뀌어도 결과가 달라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협상 결과까지 달라졌더군요. 우리는 협상 책임자를 소환해서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이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강하게요? 고문이라도 하셨습니까?”
“어휴, 지금이 무슨 칠, 팔십 년대도 아니고…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요?”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약속했습니다.”
“임기 얼마나 남았다고….”
“뼈아픈 말씀이시네요.”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번 협상을 이끌어내준 협상팀 팀장에게 그럴듯한 이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민정수석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각설하시죠. 제가 뒤에서 수를 쓴 것까지 알아내신 거죠?”
“네. 딱 거기까집니다. 한데 볼수록 이상해서요. 어떻게 열일곱 살짜리 학생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한 걸까? 그래서 부른 겁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결론은요? 가능하다는 건 확인하신 것 같고, 이제 저는 집에 가면 되는 건가요?”
“하하하. 보통이 아니네요.”
민정수석이 머리를 흔들었다.
“평범한 인물이 아니란 건 알겠습니다. 가끔은 그런 인물이 나타나기 마련이죠.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광개토대왕은 열일곱에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을 걸요?”
“크흠. 스스로 미래의 위인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민정수석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렸다.
“뭐, 충분히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릴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제가요?”
“론스터는 튕겨져 나갔고 IMF 협상안도 형평성에 맞게 해결이 됐습니다. 이 두 가지 일 모두 이휘 학생이 해낸 거에요. 하지만 모든 위협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는 자들을 물색해서 뿌리까지 뽑아야 합니다. 밖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잘 알겠지만…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 검찰이나 국정원에서 할 일 같은데.”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특히 저물어가는 권력으로서는.”
이휘가 뺨을 긁적였다.
“저는 믿을 수 있고요? 자본가를 찾으시는 거라면 그것도 한둘이 아닌데요.”
“기업인은 권력을 쫒습니다. 차기 권력은 대선후보들이고요.”
“음.”
이휘는 침음을 흘리며 고민에 잠겼다. 그 모습이 난처하게 보였던지 민정수석이 말을 이었다.
“큰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정세를 읽는 눈을 통해 저희가 마련한 자료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내달라는 것뿐이니까요.”
“제법 긴 시간이 들 거예요. 굳이 이런 일에 개입했다가 다음 정권이 권력을 잡으면 표적이 될 수도 있고요. 제가 아주 곤란한, 이런 일을 한다면 이유는 세 가지뿐입니다.”
“세 가지요?”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걸 생각하려고 고민했던 것뿐이다. 안 그래도 10년 내로 정부의 요직들과 접선하려던 참에 청와대가 먼저 손을 뻗어왔으니, 이휘로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첫째, 자문 외에 제가 가진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철저히 수사해서 처벌해주세요.”
“자료라면…?”
“IMF와의 협상에서 꼼수를 부리려던 자들입니다. 모두가 딴 생각이 있지는 않겠지만, 일부는 반드시 뒷주머니를 찼을 겁니다. 아마 론스터나 다른 외국계 기업들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고요.”
“…그런 자들이 있다면 엄정하게 수사해서 처벌해야할 것입니다.”
이번 정부가 마지막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민정수석의 말처럼 원론적인 계재가 아니다.
“이번 수사에 연관된 사람들 중 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권력이든 돈이든… 어떻게든 막으려 할 겁니다. 제가 추천하는 분께 전권을 쥐어주십시오.”
민정수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보기에 추천하려는 자와 이휘의 사이에도 뭔가 커넥션이 있을지 몰랐다.
“혹시… 그간의 일들이 공직자와 결탁해 벌인 일들입니까? 하긴, 이휘 학생 혼자 저지른 일이라기엔….”
“아닙니다.”
이휘가 딱 잘라 말했다.
“론스터와 결탁한 곳들 중 맨슨글로벌이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국계 무역회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해치려 했고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법무법인 TS의 김상철 변호사까지 엮인 사건인데도요.”
“청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심재정 중수부장입니다.”
심재정 중수부장.
장영훈 변호사와 절친한 사람이자 이휘가 관련된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다.
이휘가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며 느낀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라면 이번 사건을 맡길 수 있다.
“청와대가 백업해주실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심재정 중수부장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청와대가 백업하지요. 대통령께 보고부터 해야겠지만 제 선에서도 충분히 이 정도는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민정수석이 이어서 물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뭡니까?”
“방위산업에 일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방위산업에…?”
“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방위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충분한 자본력을 가졌습니다. 또한 앞으로 몇 백 배, 몇 천 배의 자본력을 가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민정수석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1년 만에 자산이 얼마일지 추산하기도 힘든 자산가가 된 소년이 바로 이휘였다. 대한민국 노른자 땅에 건물만 몇 채를 소유하고 있던가?
“…이유가 뭡니까? 방위산업보다 훨씬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도 많은데.”
“돈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게 돈은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누군가는 거기에 일생을 건다. 아니,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민정수석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든 말든 이휘는 평소다운 겸손함 대신 자신이 가진 미래가치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저는 나와 내 나라가 누구에게도 무시 받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위해 지금 기반을 쌓고 있고요. 제 제안을 수락해주신다면 다음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앞으로 1년. 어떤 리더도 쌓지 못한 업적을 쌓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
밀실을 나선 민정수석은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감성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가능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혜성처럼 등장한 한 소년 자본가의 말에 휘둘려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곤 대통령 앞에 소년이 주고 간 명단 한 장을 내려놨다.
이해주 대통령이 명단에 힐긋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만나보셨습니까?”
“예. 허황된 소리를 늘어놨습니다.”
“그래요?”
“이 나라를 누구에게도 무시 받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멋진 신념을 가진 아이군요.”
“네. 문제는 20년… 아니, 적게 봐도 10년은 빠르다는 게 문제죠.”
“나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이해주 대통령이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 뭔가를 보여줬어요. 이 명단에 이전 IMF 협상팀 책임자 이름도 있군요. 재정경제원 1차관 배성길.”
그들이 예의 깊게 주시하고 있던 자의 이름이 나왔다. 재정경제원 인물 외에도 뒷주머니를 찬 것으로 의심되는 몇몇의 이름이 더 있었다.
민정수석 역시 그래서 소년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한 번 믿어보죠.”
“하지만 대통령님,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능한 정부가 드디어 미쳐서 한 학생의 말에 놀아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예?”
“우리가 놀아나지 않으면 됩니다.”
대통령이 미소 지었다.
“우린 정부로서 주체성을 지키는 겁니다. 이 학생은 우리를 돕는 조력자고요. 이미 조력자의 조건을 갖출만한 충분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걸 국민들이 공감한다면… 나이나 지위를 떠나 누구라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는 정부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아…!”
민정수석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설마 그 학생에 대해 공론화시킬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기대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질 겁니다. 그중에는 우려와 비난이 압도적으로 많을 테고요.”
“그 학생이 본인 입으로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나라를 바꿔보겠다고.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겠다면 공론화가 되는 건 안고 가야할 숙명입니다.”
잠시 입매를 꾹 다물고 있던 민정수석이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기자회견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