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45
나는 회귀했다 45
[청와대는 이번 IMF 협상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조력자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로 인해 기존 IMF에서 제안한 협상안의 불리한 조항을 드러낼 수 있었으며 위협이 될 수준의 외화자본 유입을 대폭 하향 조정하여…. (중략)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하나 되어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을 천명했습니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집에 돌아가자마자 방준수가 물어왔다. 살이 많이 빠졌는지 얼굴이 반쪽이다.
“미국에서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녔기에 얼굴이 그렇게 핼쑥해?”
이휘가 딴청을 피우며 물을 따라 마시는 사이 미간을 찡그린 방준수가 TV를 검지로 가리켰다.
“저거! 네 얘기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IMF 협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조력자! 너밖에 더 있어?”
“더 있을 수도 있지.”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청와대 대변인이 어떻게 알고 기자회견을 연 거야? 네 정체를 밝히기에 1년은 일러. 2000억? 그냥 돈 좀 있는 자본가일 뿐이야! 돈도 아니라고. 우리처럼 어린애가 그만한 돈 가진 걸 알면 사방팔방에서 다 뜯어먹으려 들걸?”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하려고 형한테 돈세탁을 맡긴 거 아니야?”
“건물은? 그건 어쩌게?”
“그래 봐야 푼돈이라고 생각할 거야. 정성미디어랑 같이 하는 사업이 잘 될 거라고 생각도 안 할 테고.”
“넌 어쩜 그렇게…!”
‘태평하냐’고 물으려던 방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어휴, 내 입만 아프지.”
“그나저나… 미국 다녀온 건 어떻게 됐어?”
“널 만나보고 싶대.”
“그래?”
이휘가 눈을 바짝였다.
“응. 미국 가는 일정은 언제로 잡을까?”
“부르자.”
“부른다고?”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만찮은 협상이 될 거야. 여러 가지로 홈그라운드에서 진행하는 편이 유리해.”
방준수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확실히… 시차나 문화 차이로 인한 컨디션이나 심리적 부담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진행하는 편이 낫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테고… 투자가 간절한 스타트업 회사들이니 한국까지 오는 것도 마다치 않을 거야. 오히려 자기들이 멋진 비즈니스맨이 된 것 같아서 묘한 자부심을 느낄지도?”
서로 다 아는, 굳이 분석할 것도 없는 일을 주르륵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이휘는 빙그레 웃었다. 방준수의 이런 모습이 그리웠으니까.
정신없어서 못 느꼈는데 서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오랜만에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명단 줘봐.”
방준수가 미국에서 작성해 온 명단을 건넸다. 명단을 본 이휘의 눈이 번개 치듯 번뜩였다.
‘역시….’
방준수의 능력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회귀자도 아닌데 이휘에 버금가는 통찰력을 가진 것이다. 리스트에 있는 10개 스타트업 회사 중에 전생의 이휘가 아는 이름은 3개. 이 3개 회사가 들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기 그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휘가 나머지 회사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전생에 좀 더 깊은 지식이 있었다면 멋진 투자처를 몇 곳 더 늘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휘는 자신이 아는 세 개 회사 이름에 밑줄을 쳤다.
“여기, 여기, 여기. 세 곳만 부르자.”
“알겠어.”
“내 이름 대고 컨티넨탈 호텔 스윗룸으로 잡아. 최고급으로 모시자고.”
“스타트업 회사 CEO들 아주 헤벌레 하겠네.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겠어?”
호텔을 가지니 이런 게 좋다.
“욕먹지 않도록 확실히 하자고. 비행기 표도 퍼스트로 보내주고.”
“알겠어.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야 체면 살릴 수 있어서 좋지만… 걔들은 안 그래도 급한 처지라고.”
“투자야 받아주겠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이휘가 덧붙였다.
“하지만 인수 제안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뭐?”
방준수가 눈을 부릅떴다.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네가 IT에 대해 뭘 안다고….”
“경영은 창업주한테 전적으로 맡길 거야. 지분도 줄 거고.”
“근데 왜 굳이 인수하겠다는 거야?”
“필요시에, 경영에 관여하기 위해서.”
“으음.”
방준수가 침음했다. 설마 자신이 가져온 세 개 회사를 모두 인수하려 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지 않을까?”
“돈이 문제가 아니야. 억만금을 줘도 팔지 않을 테니까.”
이휘는 전생에서 우연히 봤던 기사를 떠올렸다. 페이스노트의 맥 저커버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YOHOO!에서 인수제안을 했을 당시로 꼽았다.
왜냐고?
당시 YOHOO!는 창업 2년 차 스타트업 회사에 불과했던 페이스노트의 가능성을 보고 10억 달러(한화 1조 2천억)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으니까!
당시 맥 저커버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그 나이에 청년 CEO가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 회사를 1조 2천억에 넘기지 않은 것은 말도 안 되는 자부심이었다.
지금 방준수가 가져온 회사들이 페이스노트는 아니지만 미래에는 그 이상 성장할 회사들이기에 CEO들의 자부심만은 비슷할 터였다.
직접 실리콘밸리에서 그들을 만나본 방준수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려운 협상이 될 거야.”
“돈만으론 안 돼. 회사를 마음껏 키우게 해줘야지. 그들의 아이디어를 세계에 보일 수 있게 해주는 거야. 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야.”
저커버그를 학교 밖으로 꺼내준 것은 숀 세브린이다. 그가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그랬기에 저커버그는 그를 페이스노트의 초대사장이자 공통창업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휘야 미래를 아니 이런 접근방식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방준수는 미래를 전혀 모르고도 그 생각에 공감했다. 단지 돈으로 해결을 볼 수 없다고 여긴 것.
“나도 네가 준다던 돈 때문에 움직인 건 아니었으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한 거지. 그 친구들한테도 너의 비전을 보여줘야 해. 네가 더 큰 판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지. 단순히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게 아니라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확신! 내 인생을 세상에 대한 반항과 혁명으로 만들어 줄 것 같은 믿음 말이야.”
굳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 뭐… 그래야지.”
“그래서, 방법은 생각해뒀어?”
그제야 이휘가 씩 웃었다.
“물론. 그전에 확실히 해야할 게 있는데.”
이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방준수는 흠칫했다.
‘뭐야? 이중인격자야?’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휘가 깜짝 놀랄만큼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 러시아 놈들한테 우리 사업내용을 다 까발렸어?”
“무슨 소리야?”
“알란이 모라토리엄 때 러시아 국채를 사들이려는 걸 알고 있어서 말이야.”
“알란… 네 경호원이?”
이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방준수는 얼음덩어리를 옷속에 집어넣은 것처럼 놀랐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라니?
“알란한테 얘기했던 거 아니야? 나랑 형밖에 모르는 건데. 알란이나 알렉세이 앞에서 얘기할 때도 한국어로….”
이휘는 말을 하다 멈췄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런 멍청할 데가!”
그가 발작적으로 외치자 방준수의 표정이 점점 더 의문으로 일그러졌다.
“대체 뭐야? 왜 그러는데?”
“하하하, 완전히 속았네. 이런 발칙한 새끼.”
“…?”
방준수는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휘는 한참이나 더 웃었다.
완전히 방심했다.
알란은 늘 그림자처럼 서 있었지만 모든 걸 관찰하고 있었던 거다.
심지어 한국어까지 몰래 배워가며.
그걸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이휘를 따를지, 유리를 따를지 결정한 뒤 이휘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방준수가 아무리 촉새라도 그런 이야기까지 떠벌렸으랴 싶었는데 방준수가 아니었다.
이휘 자신이 방심하고 알란에게 주절거린 격이다.
‘긴장이 풀렸어.’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알란을 탓할 수도, 방준수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란이 한 번도 한국어를 안 쓴 것은 음흉하지만 이휘가 물어본 적도, 듣는 걸 막은 적도 없으니.
그는 방준수를 향해 화제를 돌렸다.
“아니야. 내가 의심했어. 미안해.”
“대체 뭔데?”
“형이 우리 사업 내용을 떠벌린 줄 알았거든.”
“야!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딴 짓은 안 하거든?”
“그래, 알아. 그럴 리 없지. 그래서 확인한 거야.”
“쳇. 진짜 기분 나쁘네. 의심받은 건 짜증 나지만 뭐든 확실히 하는 게 좋긴 하지. 앞으로도 그런 일 있으면 멋대로 오해하지 말고 확실하게 물어봐! 알겠어?”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이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부탁할 거 있어?”
방준수가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흠, 나도 사업 하나 시작해 볼까 해서. 네 일 도우면서 돈도 많이 모았고. 돈은 써야 제맛이지.”
“알아서 해. 일에 지장만 주지 말고.”
“어…?”
“왜?”
“그게 땡이야? 바로 허락해주는 거?”
“형이 형 돈 쓴다는데 나한테 왜 허락을 받아?”
“어… 음, 그건 그렇지….”
“무슨 사업인데?”
“음, 그게… 재단 사업이야. 우리 할머니 알지? 소일거리도 드릴 겸, 어르신들 모시는 양로원을 크게 해보려고. 하다가 괜찮다 싶으면 요양원이랑 보육원도 같이.”
이휘는 피식 웃었다. 전생에 사채시장에서 떼돈 벌고 그렇게 기부 활동을 했다더니 천성은 못 속이는 모양이다.
“좋은 일이네. 해.”
“하하하하… 나 엄청 망설였는데. 쿨하네….”
이휘는 어깨를 으쓱이곤 화제를 전환했다.
“믿을만한 언론사 명단 넘길 테니 몇몇 기자만 초대해서 기자회견 좀 준비해줘.”
그의 시선을 TV를 향해 있었다. 아직도 청와대 발표가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이휘의 정체에 대한 것은 한 줄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문제다.
“…아마 2차 공식발표 땐 나에 대한 정보를 흘릴 거야. 지금은 국민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화제거리로 삼는 거고.”
“그런데 네가 맞불을 놓겠다고? 기자회견 해서?”
“맞불이 아니지.”
“어?”
“추진기 달아준다니까 제대로 달려주려고.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지. 지금 같은 시기에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화젯거리가 필요해. 청와대에선 나를 대상으로 삼은 것 같고.”
“영웅이 천하의 역적이 되는 건 한순간이야. 지금처럼 계속 힘들어지다간 IMF 협상에서 한 일이 오히려 배신행위가 될 수도 있어. 지금이야 이성적으로 같은 200억 달러 지원에 조건을 개선한 정부를 칭찬하고 있지만 살기 힘들면 남 탓으로 돌리는 목소리가 나오겠지. IMF의 협상안 초안을 따랐으면 외화의존도는 높아졌을망정 당장은 경기가 좀 풀렸을 거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열일곱 살짜리 어린애잖아. 세상 모든 부모들이 나를 자기 자식 보듯 할 걸?”
“이미지 마케팅을 하겠다는 거야?”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 만든다고 했지?”
“어… 그렇지?”
“우리병원에 이야기해서 형이 운영할 양로원과 협력사업 추진할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우리 회사에 편입시키자. 형이 하고 싶은 사업 다해. 대신 하나만 끼워줘. ‘IMF 금융위기 탈출 기금’.”
“너 설마….”
“이번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거야. 첫 기부자는 내가 될 거라고. 건물로 번 임대수익, 올해 ‘시네마천국’에서 벌어들인 수입 전부 다 기부할 거야.”
“세금 감면 효과 있겠네….”
방준수는 수전노처럼 말했지만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웃이 처한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이휘의 의지에 감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휘의 입장에선 희생정신 외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어차피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휘를 국민들의 가십거리로 만들며 공식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바에야, 제대로 이용당해주고 ‘금 모으기 운동’과 흡사한 역사를 자신이 주도한 것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이건 플랜 B였다.
***
며칠 후.
이휘의 예측대로 이해주 대통령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대변인이 아닌 자신이 직접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 선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국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이해주입니다. 저는 임기 동안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지 못했고, 대통령이 가진 권한을 십분 활용해 위기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도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변명이지만 이러한 내막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 경제를 뒤흔드는 적폐세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제보자로부터 그들의 명단을 입수했고 오늘부로 대통령 권한을 발휘하여 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발본색원할 것을 천명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하고 반드시 후대에 떳떳한 세상을 물려주도록 하겠습니다.]기자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 제보자가 누굽니까?] [한국은 아시아 어떤 나라보다 탄탄한 기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제위기에서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는 IMF의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적폐세력의 긴밀한 공작이 있었습니다. 제보자는 이번 IMF 협상을 유리하게 만든 정부의 조력자입니다.]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정부의 조력자라고 하셨는데, 그게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부가 하는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면 국민들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표정을 굳힌 대통령 이해주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놀랍게도 이번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도운 사람은 고위직 종사자도, 다 큰 어른도 아닌 열여덟 살의 한 소년입니다. 그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