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5
나는 회귀했다 5
쉬익!
좌측의 백인이 먼저 칼을 휘둘렀다. 고삐리들을 상대할 때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감각적으로는 현역 때와 큰 차이가 없다.
팍!
날카로운 칼날이 두꺼운 천으로 된 겉옷에 스크래치를 남기며 지나갔다.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놈의 팔을 겨드랑이로 잡은 이휘가 우측에서 달려드는 덩치 큰 백인을 보았다. 놈은 동료의 칼질이 무위로 돌아가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칼을 잡은 반대 손을 먼저 뻗었다.
콱!
멱살을 잡고 거꾸로 고쳐 쥔 칼을 들어올린다. 그대로 찍으면 휘의 가슴팍이 난자될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휘가 탁자를 박차고 뛰어오르며 놈의 팔꿈치를 무릎으로 쳐올렸다.
퍽!
그러자 공교롭게도 겨드랑이에 팔이 껴있던 놈의 관절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우득!
“끄흡.”
팔이 부러진 놈이 주먹으로 뒤통수를 후려치려다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우측 백인이었다.
이놈은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팔꿈치를 가격당하고도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놈의 칼날이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휘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푹!
공격을 적중시킨 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휘의 눈빛을 본 순간 그 자리에서 표정이 얼어붙었다.
‘무슨….’
세관직원이라 했다. 평범한 직원이 아니란 것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참이다. 그래봐야 신분증을 들이밀지 않는 걸 봐선 인천바닥을 잡고 있는 한국 갱단에서 보낸 놈이겠지. 그렇게 여겼다.
한데 눈빛이 달랐다. 칼을 맞았음에도 오히려 냉정해지는 것은 이런 상처나, 이보다 더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백인은 등골이 서늘해져서 급히 나이프를 회수하려 했으나 이휘가 팍 따라붙었다. 칼에 찔렸는데 당황하긴 커녕 오히려 접근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전문가!’
백인의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지는 순간.
반대 손으로 백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이휘가 칼에 맞은 손을 뻗었다.
푹!
“억!”
손가락 두 개가 눈알을 터뜨리며 들어왔다. 칼보다 더 위력적인 한 수였다. 백인은 그 자리에서 볼썽사납게 고꾸라지며 탁자를 박살냈다.
우당탕!
“끄아아아아아악!”
백인이 비명을 질렀다.
이휘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상황을 훑었다. 들어올 때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 터. 비명소리까지 울려 퍼졌으니 머잖아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허나 이놈들은 신원이 불확실한 밀수범. 심지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한 차례 싸움을 벌이기까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조사할 게 넘치니 아마 시간 좀 잡아먹을 터였다.
“야!”
이휘가 외치며 백인 둘을 놔두고 한국놈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으으으으!”
한국놈이 나 죽네 소리를 질러댔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정태수에게 다시 외쳤다.
“이 새끼 잡아!”
“아!”
정태수가 달려와서 한국놈을 뒤에서 껴안았다. 그래도 맘모스보단 낫다. 만약 맘모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주접을 떨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르지.
정태수가 자신은 쫄지 않았다는 것을 티내듯이 재차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이제 어떡해?”
그 태도가 썩 마음에 든 휘가 미소 지었다. 어쩌긴 뭘 어째?
“튀어!”
두 사람은 한국놈을 끼고 모텔을 달려 나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허억, 허억… 씨발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태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한국놈이 바락바락 악을 썼다.
“너 이 개새끼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닥쳐, 이 씨발새끼야!”
퍽! 퍽퍽퍽!
정태수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국놈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던 거겠지만.
겉옷을 벗어 팔뚝의 상처를 누른 휘가 말했다.
“그만.”
그 한 마디에 정태수가 발길질을 멈췄다. 놀랍게도 그는 연안부두에 오기 전과 다르게 이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긴, 한국에선 이태원에서나 볼 법한 무시무시한 백인 둘이 칼을 들고 설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처치하는 걸 봤으니 아무렇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휘는 아까 자신이 보여준 솜씨의 영향인지, 정태수의 발 아래서 덜덜 떨고 있는 한국놈과 눈높이를 맞췄다.
“네가 소리질러봐야 경찰에 잡혀가는 시간만 단축돼. 네 미국 친구들 둘 다 잡혀갔을 거야. 그러니까 닥치고 내 말 들어.”
끄덕 끄덕!
“가족은 있냐?”
“예! 어린 딸이…”
“까지 말고.”
휘가 빤히 쳐다보자 한국놈은 속내가 훤히 읽히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온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없습니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책임질 가족이 있으면 이 짓거릴 하겠어? 특히 너 같이 이기적인 새끼가.”
그렇게 말하는 이휘는 무척 어려보였다.
얼굴만 보면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외모가 오히려 더 큰 위화감을 조성했다.
한국놈이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필요 없어. 심플하게 가자. 네 선택은 두 가지야. 미국놈들이야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야겠지만 넌 가지 않아도 되잖아. 우리한테 밀수품을 넘기고 잠적해라.”
“그건… 전 그럼 죽습니다. 그놈들, 무시무시한 놈들이에요.”
“지들이 인터폴이야? 네가 한국에 숨으면 어떻게 찾아?”
“….”
“다시 밀수에 손대면 찾겠지. 재수 없으면 딱 마주칠 수도 있고.”
“그게… 제 생계수단입니다.”
휘가 피식 웃었다.
“내가 바라는 대답이 아닌데. 한 번만 더 묻는다. 대답여하에 따라 널 경찰에 넘길지, 개밥으로 던져줄지, 아니면 모른 척 해줄지 결정할 거야.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직접 찾기 귀찮아서 묻는 거니까. 밀수품 어디 있냐.”
“….”
잠시 말이 없던 한국놈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2, 29번 컨테이너….”
“태양의 눈물은?”
“29번….”
“이래야지.”
휘는 멍하니 서있는 정태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국놈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연안부두, 엔데버호, 12번 컨테이너에 밀수품이 숨겨져 있으니까 사람 보내라고 전해.”
“너 우리 아버지한테 사람 붙여 달라고 했던 게….”
“세관과 엔데버호 놈들 눈 피해서 밀수품 수거해야 하는데 나 혼자 뛰어다니면 급습할 수 있겠냐?”
“미친새끼.”
정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국놈을 쳐다봤다.
“이 새낀 어쩌게? 우리가 풀어주자마자 일러바칠 텐데.”
이휘가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과연 한국놈의 눈빛 깊은 곳에서 반짝하고 딴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피식 웃은 이휘가 말했다.
“못할 거야. 그때까진 처자고 있을 테니까.”
“뭐?”
한국놈이 묻는 순간 이휘가 손날로 뒷목을 가격했다. 그러자 한국놈의 눈알이 휙 돌아가며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 모습에 정태수가 부르르 떨었다.
“시발, 무슨 첩보영화야?”
틀린 말은 아니다.
어깨를 으쓱인 이휘가 말했다.
“힘이 부족할까봐 걱정했는데, 된다 야.”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했다고? 죽은 거 아니지?”
정태수가 서둘러 코밑에 손을 대 숨을 쉬는지 확인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은 죽었다 깨도 맞짱 안 뜬다. 시발, 내가 누구한테 발길질을 했던 건지… 맘모스 이 멍청한 돼지 새끼.”
누가 양아치 아니랄까봐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이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이라도 한 방 먹여줄까 고민했지만 알고 보면 정태수 입장에선 억울했다. 이런 장면을 봤는데, 욕을 모르면 모를까 아는 이상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심지어 정태수는 액션영화를 더럽게 좋아하는 한 남자로서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약간 맛이 간 후배 놈이라고 생각하던 이휘가 멋져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다 불쑥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근데 왜 12번 컨테이너만 얘기하래? 분명 저 새끼가 29번 컨테이너에도 뭐가 있다고….”
“네 아버지가 약속한 거다. 29번 컨테이너에 있는 물건은 내 거야.”
“진짜로?”
이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29번 컨테이너를 기억하는 걸 보니 눈치는 있는 놈 같은데 왜 이렇게 얼빵하지? 내가 알아낸 건데 그 정도도 못 가져가냐? 옛말에, 이런 속담이 있어.”
“….”
“욕심은 화를 자초한다.”
진짜 그런 속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태수는 비슷한 맥락으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네가 가져가라. 아버지한테는 12번 컨테이너만 얘기할게.”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다 끝난 거 아니야?”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12번 컨테이너 털 동안 넌 나랑 29번 컨테이너로 간다. 전화만 해.”
“….”
이휘는 정태수와 함께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정태수가 전화를 거는 동안, 이휘는 한쪽 귀를 열어둔 채 태양의 눈물을 떠올렸다.
태양의 눈물은 보석이다.
그냥 보석이 아니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보관된 리전트 다이아몬드와 한 쌍으로 취급 받던,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옛 프랑스 왕실의 보석이다.
이 보석은 루브르박물관에서 사라진 후 1997년 3월, 밀수꾼들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휘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월드컵이 한창이던 2010년, 비밀리에 이 보석을 찾는 비공식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때 정태수가 나왔다.
“전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휘가 공중전화박스에서 등을 뗐다.
“가자.”
“치료는?”
“이 정도는….”
이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말해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격전의 순간에 일부러 동맥이나 정맥이 흐르지 않는 부위를 대줬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