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51
나는 회귀했다 51
쉬익!
이휘는 머리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유리 다예프 정도 되는 상대가 칼을 휘두르면 칼의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묵직한 군용나이프더라도 일반인으로 치면 성냥개비를 들고 휘두르는 것처럼 민첩하다.
그 순간 유리 다예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휘의 반응에 적응한 것이다. 그는 이휘가 감각으로 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어깨 움직임을 보고 한 템포 빠르게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끝이다.’
확신하고 뱀이 기어가듯 유연하게 칼을 휘두르자 이휘가 간신히 쿠크리를 들어 튕겨냈다.
카앙!
하지만 그건 유리 다예프가 노린 바였다. 힘을 빼고 있던 유리 다예프는 튕겨나가는 순간 힘을 주며 나이프를 역으로 바꿔 쥔 뒤 이휘가 예상치 못한 각도로 찌르고 들어갔다.
“윽.”
이휘의 목을 노린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살갗을 베고 지나갔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며 피가 흘렀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경동맥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 다예프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휘가 쿠크리를 휘두르느라 어깨의 움직임을 놓칠 때마다 유리 다예프의 칼이 상상도 못한 각도로 찌르고 들어왔다.
퍼억!
옆구리가 저릿했다. 소총탄을 막아낼 정도의 방탄등급을 가진 방탄복이 아니었다면 칼날에 깊게 찔렸을지도 모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갈빗대를 부수는 것 같은 타격에 숨이 막혀왔다. 이휘가 뒤로 물러서며 길이가 긴 쿠크리의 장점을 이용해 후속공격을 펼치려는 유리 다예프의 팔을 베어버렸다.
촤악!
유리 다예프는 팔을 서둘러 뺐지만 기다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순식간에 옷이 새빨갛게 물드는 걸로 봤을 때 상처가 깊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이겨내며 더 가까이 붙어서 이휘의 방탄조끼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동시에 반대손에 든 나이프를 들어 이휘의 얼굴을 향해 내리찍었다.
퍼억!
이휘가 뒤로 떠밀리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뒷다리를 벌려 허벅다리로 버텼지만 안면으로 날아드는 칼날을 막느라 한쪽 팔을 내주고 말았다. 칼날이 뼈에 걸릴 정도로 깊게 들어왔으나 이휘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번뜩였다.
“개새끼.”
이휘가 손에 든 쿠크리로 유리 다예프의 허벅지를 찔렀다.
푸욱!
“크윽.”
지독한 놈.
신음 한 번이 끝이다. 이휘는 그치지 않고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쿠크리로 허벅지 근육을 걷어 내버렸다.
촤악!
피가 분수처럼 터지고.
나이프를 놓치며 이휘의 멱살과 쿠크리를 든 손목을 잡은 유리 다예프가 그를 패대기치려 했다.
그러나 이휘는 교묘하게 다리를 걸며 착 달라붙어서 이마로 놈의 콧대를 받아버렸다.
뻐억!
“커헉!”
머리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지끈거렸지만 유리 다예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큼 타격이 제대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만만찮은 충격을 받은 유리 다예프가 이휘의 멱을 손에서 놨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쿠크리를 든 이휘의 손목을 부술 듯 강하게 잡아 비트는 바람에 이휘도 무기를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서로 빈 손이 된 상태.
삽시간에 우위를 빼앗긴 유리 다예프가 서둘러 이휘의 팔에 박혀있는 나이프를 뽑으려 했다. 그러나 이휘가 한 발 더 빨랐다.
콱!
팔에서 나이프를 뺀 그가 유리 다예프의 품으로 한 걸음 파고들며 칼날을 찔러 넣었다.
푹!
“컥….”
유리 다예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목에 칼날을 박아 넣은 이휘가 양손으로 누르며 무게를 실었다.
쿡- 쿠욱.
텅, 뒤통수를 벽에 기댄 유리 다예프가 입에서 핏물을 토해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로.
어떻게…. 유리 다예프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휘는 미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욱….”
호흡을 조절할 새도 없었다. 자칫 목숨을 허무하게 빼앗길 뻔했다. 목숨 건 도박이 성공한 셈이다.
이휘가 물러서자 유리 다예프의 신형이 벽을 따라 스르륵 무너졌다.
놈의 동공에서 희미하게 발하던 빛이 사라졌다. 마치 정전이 된 것 같았다. 눈을 뜬 채 죽은 놈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휘 역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욱신거리는 팔을 들어 보니 뼈가 허옇게 보였다. 만약 군용나이프가 뼈를 제대로 찔렀다면 뼈에 걸리지 않고 뼈를 부수며 얼굴로 날아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후우.”
옆구리는 욱신거리는 정도. 고통스럽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목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치명상은 없었다. 당장에 과다출혈로 위험하거나 장기가 손상된 것이 아니니 목숨은 건진 것 같다.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운이 좋았어.”
이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러시아를 향하며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유리 다예프를 저격할 생각이었지만 설령 이런 근접전 상황이 오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붙어보니 제압은 고사하고 죽이는 것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만약 더 많은 적들이 도사리는 상태에서 총격전이나 근접전이 벌어졌더라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이휘는 주먹을 쥐락펴락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쉬었으니 이동해야 한다.
‘유리 다예프쯤은 찜 쩌 먹을 정도로 기량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자신이 만났던 유리 다예프가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늙었고 자신은 전성기였으니 당연히 유리했을 수밖에.
그러나 지금은 그의 전성기고 이휘는 피지컬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불리했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지 않았다면 죽는 쪽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몇 수 교환하며 바로 상대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숨 걸고 실력의 일부를 숨겼다. 자신이 유리한 포지션으로 유리 다예프를 끌어들여 목을 딴 것이다.
아직도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돋았다. 그건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이런 작전상황.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전생에 그랬듯 이번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짓 그만해야 되는데.”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은 이휘가 차고에서 벗어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격이 있을 수도, 유리 다예프의 지원군이 있을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하며 수색했다.
그가 그냥 떠나지 않고 이 집안을 속속들이 뒤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유리 다예프가 지원군을 부르지 않았던 게 걸렸다. 자기만 아는 곳이며, 자신만 아는 비밀공간에 외부인을 들이겠냐고 했던 말이 귀에 아른거렸다.
‘뭔가 있다.’
이휘는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일종의 직감이 이곳에서 뭔가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플갱어 둘과 저격수까지 둘 정도로 안전에 민감한 놈이 만약을 대비해 근처에 지원 올 수 있는 부하조차 배치해두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장소를 그만큼 숨기고 싶었다는 뜻이 된다.
만약 수사기관에서 찾아 나설 때를 대비해 바깥과의 통신을 철저히 단절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근처에도 부하를 두지 않았다는 것과 위험한 상황에서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 보면 좀 오버스럽다. 그만큼 위험한 물건이나, 그만큼 귀하게 여기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이휘는 전생의 경험을 활용해 샅샅이 뒤졌다. 여긴 전생에서도 자세히 뒤져본 적 없는 곳이기에 더 신중하게 수색했다. 특히 전생에 유리가 어디에 머물든 꼭 중요한 문서나 물건 따위를 보관하던 공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그리고 마침내.
이휘는 옷장 바닥에서 거꾸로 붙여놓은 뭔가를 만질 수 있었다.
“이건….”
테이프를 떼어낸 뒤 꺼낸 물건은 작은 열쇠였다.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던 이휘는 눈을 반짝였다. 불쑥 유리 다예프와 싸우기 전, 놈이 내리자마자 시선을 줬던 곳이 떠올랐다. 벤츠 G바겐의 트렁크. 거의 닫힌 트렁크 문 사이로 작은 열쇠구멍을 보았던 게 떠올랐다.
별 생각을 안 하고 지나쳤는데 이 열쇠의 크기나 형태와 일치한다.
“…집안이 아니었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고로 돌아갔다. 트렁크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따로 개조한 것 같은 금고가 보였다. 열쇠를 집어넣어 돌리자.
찰칵.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금고가 열렸다. 금고 안에는 한 자루의 권총과 금괴가 한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어림잡아도 500kg은 넘는 듯했다. 그리고 금괴 한 줄, 한 줄마다 저마다 다른 이름이 적힌 명찰이 붙어있었다.
“이게 다 뭐야?”
이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다. 단순히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 때문이 아니다. 금괴에 붙어있는 이름들. 이 이름들 중 일부가 이휘가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 건넨 명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모든 이름을 외운 이휘는 명찰을 다 떼어내서 삼켜버렸다.
러시아 무기를 밀매하려는 자들이야 상관없지만 모라토리엄이 오기 전에 뒤에서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보려하는 자들이 전부 다 잡혀가버리면 안 된다.
러시아의 경제적 혼란은 이휘의 계획과 이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뒤에서 러시아의 경제를 박살내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없다면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롱텀 매니지먼트가 쥐고 있는 러시아 국채는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휘가 러시아 국채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롱텀 매니지먼트만 돈을 벌겠지.
“큰일 날 뻔 했네.”
자신이 직접 오지 않고 한국 정부나 러시아 정부에 유리 다예프의 위치를 넘겼더라면 이 명단은 어떻게든 러시아 정부의 손에 들어갔을 터.
이휘는 유리 다예프랑 싸웠을 때보다 더 철렁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나 롱텀 매니지먼트가 이 사실을 안다면 노발대발하겠지만, 이휘는 그 자신과 한국의 입장 정도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러시아든 롱텀 매니지먼트든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피식 웃은 이휘는 차량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대를 잡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 운전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뻑뻑한 기어를 수동으로 넣고 출발했다. 전생에 비하면 구형도 이런 구형이 없었지만 나름대로 운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
이휘는 공항으로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주 러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국정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이휘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아직 학생이라던 이휘가 직접 운전을 하고 와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이휘가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달려가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이휘가 맥없이 웃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표적을 제거하고 살아 돌아왔으니.
“무기는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추적이 불가능한 것들로 준비한 겁니다. 일단 병원으로 가시죠.”
“그보다….”
이휘는 트렁크를 열었다.
금괴를 본 국정원 직원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이건….”
“압수할 겁니까?”
잠시 눈을 굴리던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휘 씨가 뭘 가져오든 손대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왜죠?”
“비공식적인 작전이니까요.”
“아아.”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량과 금괴는 세탁해서 대선물산 편으로 보내주십시오.”
마치 준비된 듯한 대답에 국정원 직원이 벙 쪘다. 잠시 넋을 놨던 그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렇게 하죠.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러시아 정부나 한국 정부에 전할 말씀이 있으십니까? 대사님이 전달해주실 겁니다.”
“러시아 정부에는 약속한 대로 사건을 깔끔히 묻어달라고 하세요.”
이휘는 러시아 정부를 믿지 않았다. 한국 정부도 못 믿는 판에 러시아를 어떻게 믿을까.
그래서 덧붙였다.
“…만약 딴 마음 품는다면 영영 러시아를 위협하는 흉수들을 찾지 못할 거라고요. 내가 유리 다예프에게서 뭘 얻었는지, 러시아에 협조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라고 전해주십시오.”
국정원 직원은 어리바리하게 눈을 끔뻑이다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적었다.
그걸 적어야 아는 걸까?
고개를 저은 이휘가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에는….”
“말씀하십시오.”
“한 번 더 빚진 거라고, 이 빚은 현 정부가 철수하기 전에 몇 배로 받아낼 거라고 말씀해주세요.”
이휘는 이 말을 전해들을 민정수석의 표정이 떠올라 우스웠다.
이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한국에 돌아가면 그사이 우크라이나에서 납치된 선원들의 무사여부를 보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선물산 정대선.
그 양반에게도 받을 빚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