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55
나는 회귀했다 55
구글, 넷플릭스는 결국 이휘의 파트리아 펀드가 내민 계약서에 싸인을 마쳤다.
그들과 로비에서 악수를 나눈 이휘는 방준수와 함께 차에 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방준수였다.
“후우,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네가 미국에서 힘들게 데려온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칠 줄은 몰랐어. 그 사람들의 가능성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팁이 뭐야?”
이휘가 슬쩍 웃었다. 방준수도 알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런 상황에서 이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면.
“팁이랄 건 없어. 아쉽지 않은 포지션을 취하는 거지.”
“아쉽지 않은 포지션?”
“어차피 설득 안 될 사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설득이 안 돼. 내가 누군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만용이고 오만이야.”
“아주 원론적인 얘긴데?”
“바꾸려 안달하면 안달할수록 상대는 슬그머니 한발 물러서기 마련이거든. 내가 아는 건 상대도 알지. 내 생각을 읽히고 있다고 생각해야 돼. 어떻게든 혹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진실성을 보이는 거지.”
“예를 들면?”
“이 계약에 깨져도 죽으란 법 없잖아. 또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면 돼. 우리가 절대 쫄릴 게 없는 싸움이지. 그러니 우리가 계약을 ‘해주는’ 거야. 난 형이 이번 같은 상황에서 항상 그런 입장이 됐으면 해.”
“말이 쉽지… 그게 되나.”
“그래서 철저히 준비한 거잖아.”
방준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전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 같긴 하다. 실리콘밸리에서 내 나름대로 기업평가를 하고 데려올 때만 해도 자신있었거든. 근데 한국에 와서 내가 책정한 가치가 거절을 당하니까 막막하더라. 돈으로 꼬시려 했는데 안 넘어오니까.”
“그들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걸 생각해보고,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하하하.”
너무 명쾌한 해답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무나 하진 못한다.
특히 큰돈과 회사의 미래가 걸린 자리에서 배짱을 튕기긴 쉽지 않다.
아무리 자료가 철저히 준비되어 있어도 말이다.
적어도 방준수는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이휘는 자기도 모르게 ‘인질협상이나 취조를 하다 보면…’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협상가들은 인질의 안전확보를 위해 상대를 침착하게 만들고, 공감대를 얻고, 상대를 최대한 진정시켜서 방심을 유도하지만 이휘는 아니었다.
인질 협상은 철저히 기싸움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그가 투입한 작전의 경우 목적이 1순위, 인질의 안전은 2순위였기 때문이다. 취조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다. 고문으로도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자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캐내야 하는 만큼 지금보다 손에 쥐고 있는 카드도 적고 잘 훈련된 자들이라 대답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휘는 이 같은 사실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감이지. 이런 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피식 웃은 방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너한테 뭔가 있긴 한가 봐. 네가 말하면 헛소리 같지가 않으니… 사실 나랑 있을 땐 뭔가 무시하는 눈치였거든. 이런 어린 동양인 꼬마 놈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뭐 이런.”
“하하, 그럴 거였으면 안 왔겠지.”
“머리 좋은 것과 사업 파트너로 삼는 건 다르니까. 반신반의 했을 거야. 저쪽도 투자를 받으면 사업을 빠르게 진척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와본 걸 테고.”
“그럴지도.”
“근데 널 처음 봤을 때랑 네 얘길 들었을 때랑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더라. 그게 감이든 뭐든 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았어.”
자꾸 얼굴에 금칠을 해대니 이휘는 안면이 씰룩거릴 지경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오늘 저녁은 집에서 안 먹을 거야.”
화제를 돌리자 방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우리 일을 도울 사람을 한 사람 더 섭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정확히 말하면 형이 당하고 있는 무자비한 노동력 착취를 조금 더 합리적으로 절약할 수 있게 만들어줄 사람이랄까.”
“그게 누군데?”
“전 재정경제원 국제경제관리관.”
“설마….”
“맞아. 이번 IMF 협상팀 팀장.”
“맙소사. 근데 왜 ‘전’이야?”
“경제부총리, 재정경제원 1차관, 2차관까지. 전부 다 이번 IMF 기획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했어.”
“아니, 우리나라가 더 유리한 조건에 200억 달러를 받을 수 있게 됐는데 그게 잘려 나갈 이유가 돼?”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지.”
“국제경제관리관도 먼지가 묻어있었다는 거야? 그럼 넌 먼지 묻은 사람을 책임자로 앉혔던 거고?”
“자기 아랫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하면 어떻게 잡아내겠어? 책임만 지는 거지.”
“그럼…”
“맞아. 그게 터지면 차관 선까지 피해가 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박한 거지. 그냥 나갈래, 가족까지 싹 다 털리면서 조사 받고 끝낼래.”
“너무한 거 아니야? 믿기 싫은 얘긴데… 그 사람한테 직접 들은 거야?”
“아니. 청와대 민정수석의 추측이야.”
방준수가 눈을 부릅떴다. 민정수석과 이휘가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현 정부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한 민정수석이 한 말이라면 흘려 들을 수 없다.
“정치판이 더럽다더니 진짠가 보네.”
“상상했던 것 이상. 애초에 흠 없는 사람을 중용하지 않아. 서로 약점을 쥐고 있어야 돌발행동을 못 할 테니까. 쓸데없는 신념 지킨다고 자리 꿰차고 난 다음에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잖아.”
“그래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적당한 자리에 올라서 올바른 신념을 펼치려 하면 되도 않는 약점까지 만들어가며 끌어내리고?”
“실무는 능력 있는 사람이 봐야지. 그래야 권력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들만 추진하고, 그 공헌만 자기 것으로 만들지. 중간자리가 꼬리 자르기도 제일 편하고. 아랫사람이 문제 일으키면 딱 중간에서 자르면 되거든.”
“하.”
“기가 막히지?”
“내가 이래서 공직에 뜻을 두지 않은 거야.”
“원래는 관심 있었어?”
“누가 없겠어? 고등학교 때 얼마나 한국의 지성인으로서 우리나라의 위엄을 세계에 알리고 돌아와서 국가에 헌신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민사고에선 그렇게 가르치나?”
“뭐… 비슷해.”
이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초기에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한 모양이다.
“그래서 뜻은 있었다?”
“맞아. 내 자유로운 성격에 잘 맞진 않지만 만약 돈 버는 게 아니라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나랏일을 하고 싶었어.”
“그럼 형은 정말 잘 된 거야.”
“뭐가?”
“내 옆에 서면 둘 다 할 수 있거든.”
방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그 말도… 네가 가는 방향이 딱 그거네.”
그사이 두 사람이 탄 SUV를 세운 알렉세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다 왔다.”
평범한 아파트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휘가 차에서 내려 전화를 걸었다. 몇 동인지, 몇 호인지 알고 있었지만 걸음을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안에 아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자신을 모른다. 신호음이 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안 돼.’
최대한 만나는 건 피할 생각이다. 자신과 너무 깊게 얽히게 하고 싶진 않았다. 직장에서 잘릴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신념을 강행한 그녀의 아버지, 전생의 장인에게 높은 임금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마련해주는 것. 그게 다였다.
그때 전화를 받은 장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왔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회색 SUV.”
-예.
잠시 후 전 재정경제원 국제경제관리관 하진성이 1층으로 내려왔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하진성은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세 사람 모두와 악수한 그의 안색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후련해보이기도, 살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하진성이 물었다.
“생각보다 좋아 보이죠?”
“…그러네요.”
이휘가 미소지었다. 공직에 뜻을 품은 사람이 명예롭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오히려 개운한 눈치다.
“앞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퇴직금도 있고, 평생 후회할 결정을 하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다 이휘 씨 덕분이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이 나라의 민정수석도 존대하는 사람한테요? 됐습니다. 저도 은혜를 입었고요.”
“은혜라니… 가당찮아요. 괜한 바람만 넣었을 뿐이에요.”
“봐요. 말하는 것도 다 큰 어른 같다니까.”
하진성이 호탕하게 웃고는 방금 악수를 나눈 알렉세이와 방준수를 힐끔 쳐다봤다.
“이분들도 이휘 씨 일을 돕는 분들이겠죠?”
“맞습니다.”
“그럼 차는 두고 같이 갑시다. 요 근처에 맛있는 불고기집이 있어요. 이분은 외국 분 같은데 불고기 좋아하시려나?”
이휘까지 쳐다보다 알렉세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하하, 그럼 가시죠.”
하진성이 앞장섰다. 그들이 우르르 아파트단지를 나서려 할 때였다.
맞은편에서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하진성이 반갑게 눈을 치켜떴고, 그는 몰랐지만 뒤에 있던 이휘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하진성이 외쳤다.
“딸!”
이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전생에 아내. 자신도 사진으로만 봤던 모습.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소녀가 이쪽을 향해 활짝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헤어스타일도 다르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모습이었지만 이휘는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앳된 모습에 안 그래도 터질 것 같던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뭐야?”
알렉세이가 그를 보며 눈을 치떴다. 웬만한 상황에선 절대 드러내지 않는 감정표현이다. 그의 시선을 쫓은 방준수는 아예 자리에서 펄쩍 뛸뻔했다.
“이휘…!”
이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시선은 오로지 전생의 아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처럼 아름답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다시 보기 힘들 만큼 어여쁜 소녀였다. 전생에서도 이휘를 동료들로부터 나라 구한 구국 공신으로 만들어주었던 아내의 미모는 시간을 거슬러도 큰 차이가 없었다.
분위기만 다를 뿐.
딸아이와 포옹한 하진성이 그제야 고개를 돌리다가 이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과, 이휘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눈을 치떴다.
이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전생의 아내도 토끼 눈을 뜨고 있어서, 이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정말 궁색한 변명을 하고 말았다.
“아… 제가 오래전에 아버지를 여의어서 이럴 때가 있어요. 아빠와 자식을 보면….”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었지만 하진성은 사과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딸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아빠가 한참 어려 보이는 고등학생에게 존대를 하는 걸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휘가 떠올랐다.
“아? 설마…!”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이휘를 유심히 훑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서,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비련의 남자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눈가를 붉히며 화살처럼 눈길을 쏴대고 있어서 이상하던 참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TV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 아닌가?
심지어 이번에 아버지 일을 크게 도왔다던 그 소년이었다. 실제로 보니 바로 알아채지 못했는데 화면에서 본 것만큼이나 잘 생겼다.
괜히 또래 여자아이들한테 슈퍼스타마냥 큰 인기를 끄는 게 아니었다.
하진성의 딸아이, 미래의 아내.
그녀는 대뜸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저, 사진 한 장 찍어주시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