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56
나는 회귀했다 56
모든 시선이 이휘에게로 쏠렸다.
가만히 서있던 이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럽시다.”
“그럽시다…?”
하진성의 딸아이, 전생의 아내, 하수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투가 어째 좀 이상했던 것이다.
이휘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옆에 가서 섰다. 익숙한 베이비로션 향이 풍겼다.
“찍어요.”
그 말에 하수연이 ‘아!’ 탄성을 터뜨리더니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제 아비에게 주었다.
하진성이 사진을 찍고 난 뒤 돌려주자 하수연이 활짝 웃었다.
꽃이 피는 것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이휘는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걸 참았다.
이런 젠장.
도무지 태연할 수가 없었다. 저 자그마한 손을 당장에라도 움켜잡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행동들이 지금은 추행이 되어버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영영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고개를 저은 이휘가 하진성에게 가자고 하려는 순간, 그가 먼저 물었다.
“딸애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알렉세이와 방준수가 이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가자는 눈치다. 심지어 방준수는 얼굴까지 벌게진 것이, 설마 저 짐승 같은 놈이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린… 아니, 중학생을 보고 관심을 드러내는 건가 싶었다.
정강이를 발로 차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그 심리가 드러났는지 방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니다.”
이휘는 고개를 돌려 하진성을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일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요.”
하수연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날씬하고 작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 밥 먹고 왔어요. 괜찮아요.”
“그래?”
하진성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에 가서 쉬고 있어. 아빠 밥 먹고 들어가마.”
“네. 천천히 드시고 들어오세요.”
하수연이 나머지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이휘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지웠다.
마음 같아선 불고기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하수연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녀의 요리솜씨는 일품이었다. 어려서부터 장인 밥상을 차려드렸다던가?
하지만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적어도 아직은….
‘그새 생각이 바뀐 건가?’
이휘는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욕심이 들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그녀의 마음을 양보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그녀는 이휘를 만나 행복했을까?
인생의 절반을 독수공방하고, 그마저도 천근만근 걱정을 안고 살았는데.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
막말로 전생에 자신을 사랑했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니까.
이휘는 착잡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고기집에 도착해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느 정도 집중력을 되찾은 것은 식사를 마무리하며 하진성이 입을 연 시점이었다.
“그런데 저는 왜 찾으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저희 파트리아 펀드에서 하진성 씨를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연봉은 두 배 드리죠.”
“저를요?”
“이번 협상을 잘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도 있지만 우리 쪽에서 제안한 협상안 자체가 합리적이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쪽도 자신들이 너무 불리하다 생각했으면 손해를 보고서라도 이번 협상을 거부했을 테니까요.”
가만히 듣던 하진성이 물었다.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가 어떻게 괜찮은 협상안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실 텐데요.”
“왜 제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죠?”
“예?”
“저희 파트리아 펀드의 정보력은 상상 그 이상입니다.”
“…!”
하진성은 제법 놀랐으나 이휘로선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파트라이 펀드의 정보력이 아닌 자신만의 정보력이었지만.
세상 그 누가 미래의 정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더도 필요 없다.
10년, 20년 후 미래로 10분만 다녀온다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미래에 잘 나가는 기업을 몇 곳만 알아서 투자하면 되니까.
이게 바로 이휘가 자신이 살았던 미래의 시점까지 금맥이 마르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이유였다. 돈보다는 명예와 대의에 치중하는 이유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
침묵하던 하진성이 재차 물었다.
“그것만으로는 제게 협상 팀을 맡기고, 나아가 저를 귀하의 회사로 스카웃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혹시 제가 아닌 정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제 인맥을 원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이휘는 딱 잘라 말하며 피식 웃었다. 설마 이런 얼토당토않은 걱정을 하고 있을 줄이야. 청렴한 줄은 알았지만 이 순간에도 자신이 더러운 일을 하게 될까 걱정하는 걸 보니 절로 신뢰가 갔다.
“분명 저는 대한민국 정부와 연관성이 있지만 이는 파트리아 펀드가 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처럼 위험해지실 일도 없고요. 그저 하진성 씨의 지식과 경험을 빌리려는 것뿐입니다.”
“두 배라는 연봉액수도 그렇고, 혹시 이번 일로 제가 퇴직하게 돼서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시는 것 아닌지요?”
“제가 왜요?”
“예?”
“저는 제안을 했을 뿐이고 선택은 하진성 씨가 하신 겁니다. 제가 책임감을 느낄 이유가 없죠.”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있는 그대로 보세요.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말했듯 우리 정보력은 하진성 씨 상상 이상이고,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하진성 씨의 업무능력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 의심이 간다면 2년 계약직으로 하고, 2년 후 재협상을 하시죠. 어떻습니까?”
“음.”
하진성은 고민하듯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어라, 방금 입가를 씰룩거린 것 같은데?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파트리아 펀드나 십대에 CEO가 된 이휘 씨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 안에 소속돼서 일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죠.”
“모르실 걸요.”
끼어든 것은 방준수였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모르실 거예요. 저는 파트리아 펀드를 만들 때부터 있었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요, 뭐. 이 자식이 무시무시한 놈이란 것밖에는….”
한숨을 내쉰 그가 덧붙였다.
“아무튼 그래도 뭐,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장인어른.”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을 듣는 순간 이휘는 자기도 모르게 방준수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퍼억!
“으악!”
방준수가 간신히 식탁에 코를 박지 않은 채로 오만상을 쓰고 이휘를 쳐다봤다.
“왜 이래?”
“장인… 후우. 아무튼 그게 뭐야? 지금 업무적인 얘기 하고 있는데 장난 치고 싶어.”
“우씨. 예민하긴.”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준수는 꼬리를 말았다. 이휘는 슬슬 이놈과 전생의 장인을 붙여놓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거, 잘못생각 한 거 아니겠지?
이휘가 아는 장인은 제 딸을 끔찍이 아끼는 데다 방준수 같은 승부사 스타일은 여러모로 불안하고 위험하다 여겨서 두 사람을 이어줄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지만 괜히 신경이 거슬렸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게 ‘허허’ 웃은 하진성이 말했다.
“…확실히 의외성이 다분한 분 같긴 합니다. 지금까진 어른보다 더 어른 같았는데 또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으시군요.”
“제가요?”
이휘가 발끈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친구 분이 제 딸애한테 관심 있는 것 같으니 질투하신 것 아닙니까?”
놀리려는 수작 같았지만 제법 정확한 추측에 이휘는 속이 뜨끔해서 얼버무렸다.
“무슨….”
“하하하! 진짠가 본데요? 제 엄마를 닮아서 확실히 미인이긴 합니다.”
원래 이렇게 팔불출이셨나?
하긴, 대다수 아버지들이 자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쁠 것이다. 하수연은 객관적으로 봐도 수준급 미모를 가지기도 했고. 분명한 건.
“확실히, 아저씨를 닮은 건 아닌 것 같긴 해요.”
“그래요? 그래도 머리는 나를 닮아서 아주 계산이 빠릅니다.”
그렇게 계산이 빠르면서, 왜 자신을 선택했을까. 이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요.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있는 것 같던데요.”
“암, 그렇고말고요. 둘째가라면 서럽습니다.”
방귀소리도 우렁차고요.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킨 이휘가 피식 웃었다.
“…저랑 사진 찍어달라는 것 보고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방준수를 의식해서 한 소리다. 날 좋아하니까 넌 꺼져라. 뭐 그런 뜻.
다행히 하진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요. 이휘 씨 팬입니다. 아마 친구들한테도 자랑할 거고요. 그래도 아직 안 됩니다. 저는 딸애를 보낼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뭐 이런 얘길 이렇게 진지하게 해?’
농담일 게 분명한데도 순간 가슴이 울렁거린 이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인기 많거든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을 텐데 우리끼리 너무 김칫국 마신 것 같군요.”
대화가 일단락되자 이휘는 계약서를 꺼냈다. 펜을 쥐어주자 한 번 내용을 훑은 하진성이 서명을 마쳤다.
“이제 됐군요.”
“억대 연봉을 받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저희 파트리아 펀드를 믿어주신 보답으로 새 집이 제공될 겁니다.”
“집이요?”
“네. 강남에 저희 회사 소유 건물이 몇 채 있거든요. 곧 한강변에 아파트도 올릴 계획이고요.”
“아….”
하진성은 미처 파트리아 펀드가 얼마나 큰 자본력을 가진 회사인지 실감했는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뒤로부터 이휘를 바라보는 하진성의 표정에 더욱 큰 신뢰가 생겨 있었다.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성도 이 기쁜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러 가야겠다며 서둘러 떠났고, 이휘와 알렉세이, 그리고 방준수도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에 타자마자 방준수가 입을 열었다.
“너 아까 걔한테 관심 있어? 어째 보자마자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
운전석에 있던 알렉세이가 한 술 더 떴다.
“그런 눈빛을 본 적 있지.”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그런 눈빛이 어떤 눈빛인데?
대충 뒷말을 예측한 이휘는 굳이 묻지 않고 방준수에게 쐐기를 박았다.
“진지하게 조언 한 마디 해도 될까?”
“응?”
“형도 알겠지만 난 내 걸 빼앗기는 꼴은 못 봐.”
“그, 그래…? 나라를 위해서 쓰는 건….”
“더 큰 명예로 돌아올 거니까 빼앗긴 게 아니지. 안 그래?”
“….”
“아까 그 애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만약 형이 관심을 가진다면 나랑 목숨 걸고 싸워야할 거야.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갖는 법. 내 모든 걸 걸고 형을 이겨주지.”
눈을 희번덕거리는 모습에 방준수는 기가 질려버렸다. 이휘가 ‘모든 걸 걸고 이겨준다’고 하는 순간 그의 상대들이 모조리 어떻게 됐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 이휘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하진성 씨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인 건 그분이 경제학의 대가라서야. 감각은 형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이론적으론 더 박식할 거고,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문을 내고 있어. 두 사람의 성향도 정 반대지. 아마 같이 다니면 서로에게 많은 걸 배우고, 또 다른 사람과 협상할 때에도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야. 싸우지 말고 잘 화합해서 일을 진행해봐.”
그가 진지하게 말하자 방준수의 눈빛 또한 가라앉았다. 이미 방준수의 머릿속에는 아까 본 하수연이 아닌, 앞으로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가득 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