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58
나는 회귀했다 58
러시아 대사는 이휘가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직접 마중 나와서 집무실로 안내했다.
“오랜만입니다.”
악수를 나눈 그가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지난번 언질해주신 덕분에 본국에서도 이번 모라토리엄을 뒤에서 조장한 자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답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두면서 뒤에서 이를 조장한 자들을 색출해낸다?
썩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답기도 하고. 하지만 러시아 대사의 표정에서 이휘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직감이지만, 무시할 수 없다.
“그거 잘됐네요. 그런데 조국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마당에 너무 침착하신 것 아닙니까?”
“왜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우리 화폐가 종이쪼가리가 됐는데요. 우리 국민들에게 이번 겨울은 정말 힘든 겨울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그저 묵묵히 제 일을 할밖에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러시아 대사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습니다. 왜 당국이 준비한 비행기가 아니라 비밀리에 배편을 타고 돌아오신 겁니까? 그것도 저희에게 일언반구 없이요. 제 조국을 은혜도 모르는 나라로 만드시면 곤란합니다.”
“비공식작전이었는데 소란을 피워서 되나요.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오는 편이 깔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희는 이휘 씨를 존중합니다만, 다음에는 꼭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러시아 국민을 죽인 보답이요?”
“하하하, 폐부를 찌르는 농담이시군요. 놈은 범죄자였고 납치범들이었습니다. 우방 국가 한국의 국민들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선원들이 다치지 않았던가요?”
“예?”
“아, 방금 그렇게 들은 것 같아서….”
“아… 하하하. 제가 보고 받은 바로는 그랬습니다.”
“선원들은 대선물산 배편으로 러시아에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에선 피해보상 외에도 추가비용 등 모든 비용을 책임질 생각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제가 궁금한 건 따로 있습니다.”
“예?”
이휘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러시아에 파견 갔던 PMC 용병들도, 우리병원의 누구도 그간 외부와 접촉이 없었습니다. 인질들 중 누구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정보란 뜻이죠. 아, 납치범들 외에는요.”
“그게 무슨….”
“아직 정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생사여부만 알렸을 뿐.”
“….!”
러시아 대사가 흠칫하는 순간 이휘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타이가 꽈악 조여지며 러시아 대사의 얼굴이 벌게졌다.
“커헉!”
“설마 그새 유리 다예프랑 결탁했던 놈들이 러시아 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건가?”
“….”
말이 없던 대사가 넥타이를 움켜쥔 이휘의 손등을 탁탁 쳤다. 그제야 이휘가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느슨히 풀어주며 입을 열었다.
“얘기해.”
“루슬란 자카예프란 자가 있다.”
“그놈이 뭔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러시아 육군 중장.”
“그래서.”
“근래 유리 다예프와 연결된 자들을 조사하던 정보부 요원 전원이 사망한 채 발견됐어. 그자의 짓이지. 심지어 러시아 정부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끔 밀어붙인 것도 그자다.”
이휘의 표정이 변했다. 싸늘한 눈초리로 러시아 대사를 훑은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쪽에 붙었구나.”
“….”
러시아 대사가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란 뜻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놈은 개소리를 지껄였다.
“…잘 들어. 네 장래성이 아까워서 하는 얘기니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내가 속한 외교부도 장악된 상태야. 너도 유리 다예프 일에 얽혀있는 이상 결코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모든 걸 바칠 각오로 루슬란 자카예프에게 충성해. 그럼 살 수 있다.”
“싫은데.”
“뭐?”
“내가 그럴 놈처럼 보였어?”
“루슬란은 유리 다예프 같은 잔챙이랑은 달라!”
당연하다.
세계 군사력 2위의 러시아 육군 중장.
심지어 상황을 보니 단순한 육군 중장이 아니라, 현 러시아를 장악하다시피 한 절대권력인 모양이다.
“알아. 심지어 루슬란이 블라디미르 총리와 결탁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
“…!”
러시아 대사가 눈을 부릅떴다.
“너… 유리 다예프를 찾아갔을 때 뭔가를 본 게 맞구나.”
“루슬란이 그러던가?”
“이젠 나도 널 지켜주지 못한다.”
“아이고, 무서워라.”
딱딱하게 대답한 이휘가 말을 이었다.
“근데 어쩌지? 이런 식이면 나도 루슬란을 가만히 못 두겠는데.”
“하하하하하, 이 미친놈이….”
“좋은 기회잖아? 러시아의 영웅이 될 기회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 나라 정부가 나서도 막지 못할 일을.”
“정부는 못 막아도 나는 막을 수 있지. 루슬란에게 전해. 내가 쿠데타의 명분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루슬란은 명분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루슬란은 명분 따위 안중에 없을지 몰라도 이 모든 계획의 우두머리인 블라디미르는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 그럼 나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목숨을 부지할 시간?”
“어. 그리고 반격을 준비할 시간.”
“왜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거냐?”
이휘가 피식 웃었다.
“당신한테도 누굴 따를지 선택할 기회는 줘야지. 외교부 전체가 놈들 손에 놀아나고 있을 뿐 자의로 놈들에게 협력한 건 아닐 것 아냐? 루슬란에게 애걸복걸하라는 방법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날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던 보답이다.”
이휘가 바로 자리를 뜨려 하자 다급해진 러시아 대사가 물었다.
“대체 무슨 수작이냐? 난 루슬란 자카예프에게 네 정체를 알렸다.”
“근데?”
이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숨기거나 속일 생각도 없었어. 지금 네가 루슬란에게 무슨 얘길 하든 난 나를 지킬 카드가 있다. 그 양반은 날 죽이고 싶어 안달할 테지만 블라디미르는 내가 가진 카드가 궁금해서라도 놈을 막아줄 거야. 내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해도 그건 변치 않지. 놈들이 날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이상 결코 서두르지 않을 테니까.”
“네가 가진 카드… 블라디미르에게 명분을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대체 네가 가진 카드가 뭐냐? 자세히 얘기해. 그래야 훨씬 더 큰 호기심을 가질 테니까.”
“그게 아니라 당신이 어디 줄을 잡을지 판단하기 위해서겠지.”
날카롭게 일침을 가한 이휘가 말을 이었다.
“내 카드는 롱텀 매니지먼트. 미국 최고의 자산운용사다.”
“롱텀 매니지먼트….”
러시아 대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롱텀 매니지먼트는 휴지조각이 된 러시아 채권 때문에 지금 파산 직전의 대위기를 맞이했다. 파산하지 않기 위해 발에 땀 나게 자금을 대줄 투자자를 찾고 있어. 기존 투자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부탁한다는데, 곧 우리 파트리아 펀드에도 오겠지.”
“그래서? 그게 러시아의 권력자들과 무슨 상관이지? 애초에 그들은 돈을 갚을 생각이 없어. 그러니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테고.”
“그건 러시아 채권이 여전히 비쌀 때 얘기지. 러시아가 화폐개혁을 강행할 것도 아니잖아? 언젠간 갚아야 할 빚을 저렴한 가격에 상환하고 새출발할 수 있다면 그들은 영웅이 될 거다. 정당하게 정권을 교체할 명분이 생기겠지.”
“하.”
러시아 대사는 입을 멍하니 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물렸군.”
“맞아. 블라디미르는 외통수에 빠진 거야.”
그러나 러시아 대사는 쉽사리 수긍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명분이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보여주기에 불과해. 명분이 없다 해도 현 러시아 정부에는 그들을 막을 권력자가 없다.”
“이해를 못했군. 그건 그들이 쿠데타가 계획대로 진행됐을 때 얘기고. 그들이 정당성 따위는 무시한 채 반란을 일으킨 것을 미국이 알게 된다면?”
“그건…!”
“심지어 유리 다예프는 반란의 증거가 될만한 내용을 남겼다. 그 내용이 모조리 내 머릿속에 들어있고.”
이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죽여도 내가 가진 정보는 미국 정부에 흘러 들어갈 거야. 내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러시아 대사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간 이휘의 행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이었다. 그가 아는 이휘는 치밀하고 무서웠다.
“…이건 전쟁이 될 수도 있어. 미국이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아닌 이상 발을 뺄 거다.”
“아니.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지면 미국이 총대를 메고 나설 거야.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완전히 체제를 이룩한 러시아지, 지금의 반쪽짜리 러시아가 아니다.”
“….”
“당신도 잘 선택해. 러시아 정부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어. 블라디미르는 요직에 앉아 기반을 닦으면서 천천히 자기 세력을 넓힐 생각이야. 그는 차차 러시아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현직 대통령을 살려둔 거고, 그의 팔다리를 모두 자르는 작업부터 하고 있는 거야.”
블라디미르는 정말 무서운 자다. 그의 오른팔인 루슬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휘는? 그리고 이휘가 등에 업으려는 미국은 어떠한가?
러시아 대사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가장 난처하게 물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빌어먹을.”
“욕은 마음껏 해. 하지만 그 분노가 가라앉았을 땐 이성적으로 판단이 섰길 바라지. 내 생각을 루슬란에게 전하면 우린 모든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다. 나로서도 더 이상 러시아와 악감정으로 엮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야.”
한숨을 내쉰 러시아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견은 잘 들었다. 그대로 전하지. 루슬란 중장이 당황하겠군.”
“그런가?”
“유리 다예프의 정보를 네가 가로챘다는 것만 알지, 설마 네가 러시아 채권을 쥐고 있는 미국 최대의 자산운용사를 좌지우지할 영향력까지 가졌을 줄은 상상도 못할 테니까…. 마치 이 상황을 알고 꾸민 일 같군.”
“사실 이렇게 짜증나게 돌아갈 줄은 몰랐어. 역시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고. 사실 롱텀에 쥐고 있는 러시아 채권이나 싸게 사서 나중에 반값이라도 받아낼 생각이었거든.”
“…!”
러시아 대사는 기가 막혀서 아침에 먹은 빵이 얹히는 느낌이었다.
이휘는 입맛을 다시며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 국제관계를 들썩일만한 대형사고를 치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잘 생각해보라고 해. 내가 지금 블라디미르의 편에 설지, 현 러시아 정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뛰어다녀야할지 모두 그쪽 손에 달렸다고.”
***
러시아 대사관에서 나온 이휘는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러시아 대사에게는 블라디미르와 루슬란을 도울 의향도 있는 것처럼 내비쳤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대선물산을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끊어져선 안 된다. 앞으로 진행할 방위산업을 위해서라도.
이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사이 수화기 뒤편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삼은 울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무슨 사건이 터진 거야?
방준수다.
이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진성 씨와 처음 호흡 맞출 일이 생겼어. 롱텀 매니지먼트에 연락해서 러시아 채권을 사겠다고 해. 필요한 금액도 재투자하겠다고. 그 조건으로 롱텀 매니지먼트의 지분 51퍼센트를 요구해.”
-사실상 매입하라는 것 아니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크셔 헤서웨이나 JP모건 같은 대형 투자사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회사를 헐값에 가로채려 들걸? 제값 쳐줄 때 파는 게 훨씬 낫지. 심지어 우린 투자운용 및 회사경영에 필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야.”
-그동안 롱텀이 올린 수익률을 보면 꿀매입 같긴 한데… 어쨌든 러시아 채권은 실패였어. 다시 그런 실패가 없을 거라고 장담해?
“지금은 우리가 없지만, 그땐 우리가 있으니까. ‘필요 이상’ 관여하진 않겠지만 최종결재 및 자문은 우리 역할이야.”
-적게 일하면서 수익은 최대치로 늘리겠다?
“그래. 나아가 윌 스트릿에서 가장 큰 투자운용사 중 한 곳을 매입하는 거니 투자할 돈에 비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문제는 우리가 가진 돈으로 그 회사를 살릴 수 있냐는 거야!
“없지.”
이휘가 너무나 당연한 듯 대답하자 방준수가 벙 쩠다.
-뭐?
“없다고. 택도 없어.”
-근데 뻥카를 치라고?
이휘가 피식 웃었다.
“걱정마. 그 돈은 우리의 블라디미르와 루슬란이 지불할 거니까.”
-블… 뭐?
“블라디미르, 루슬란.”
-그게 누군데?
하얗게 미소 지은 이휘가 대답했다.
“현 러시아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쿠데타 세력의 주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