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62
나는 회귀했다 62
“그렇습니다.”
이휘의 대답을 들은 모두가 숨을 멈춘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다음 질문을 한 것도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방법을 설명해준다면 우리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곧 블라디미르와 만날 생각입니다.”
“블라디미르와…?”
여기저기서 ‘뭐라고요?’라든지,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같은 물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통령은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자와 만난다는 것은 그자와 결탁했다는 뜻입니까?”
“그 반대죠.”
이휘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SOBR를 찾아온 것도 그래서고요. 아직은 현 러시아 정부를 지지할 생각이 있습니다.”
“아직은?”
“네. 제 제안을 승낙해주신다면 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대가를 원한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대통령이 물었다.
“제안을 말해보세요.”
“세 가지입니다.”
이휘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리고 그중 검지부터 접으며 말을 이었다.
“첫째, 저희가 진행할 방위산업에 파트너가 되어주십시오. 당연히 러시아와 교류할 창구도 설립할 생각입니다. 바로 러시아에요.”
대통령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 말은 한국에 러시아의 무기를 내놓으라는 겁니까? 이번 일을 빌미로 우리 군사력을 빼가려는 것이 목적입니까?”
“차라리 블리디미르가 낫습니다! 여우를 내쫓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일 수는 없습니다!”
꽤나 훈장을 많이 달고 앉아있던 노인이 외쳤지만 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거래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한 무기가 있다면 사들이겠지만 정당한 값을 지불할 겁니다. 당연히 한국 정부와 상의해서 우리가 앞선 무기들이 있다면 그것도 교류할 거고요.”
정상적인 수출입이다.
반대하던 노인네의 흥분이 가라앉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겠군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 러시아 환율이 너무 바닥이라 한국이 무조건 이득입니다.”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의 말에 이휘가 슬쩍 웃으며 중지를 접었다.
“둘째, 러시아가 진 빚을 갚으세요. 지금은 롱텀 매니지먼트가 사들인 국채 말입니다.”
“그 국채와 무슨 상관입니까?”
“정말 손발이 다 잘려나간 모양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롱텀 매니지먼트가 가진 국채를 매입할 계획입니다.”
“계획일 뿐이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제 제안은 국채를 인수했을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인수에 성공한다면… 알겠습니다. 롱텀 매니지먼트처럼 큰 회사가 국채를 팔아넘길지 모르겠지만 시간만 주시면 최대한 갚겠습니다.”
“저는 그런 당연한 얘기나 하자고 말을 꺼낸 게 아닙니다.”
이휘가 칼같이 잘랐다.
“저희는 롱텀 매니지먼트의 투자자고, 러시아 국채를 사들일 겁니다. 이렇게 됐을 때 대통령께서는 할인가가 아니라 100퍼센트 빚을 다 갚으셔야 할 겁니다. 그것도 제가 블라디미르의 위협으로부터 현 정부를 구해냈을 때 50퍼센트, 그 후 대통령님 임기 내에 나머지 50퍼센트도 상환하셔야 합니다. 1년에 10퍼센트 이상씩.”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이를 악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우린 그만한 돈이 없어요. 진심으로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전생에서 러시아는 국채를 안 갚았다. 미국도 세계 군사력 2위인 러시아를 추궁하지 못했다. 그래서 롱텀 매니지먼트에게 알아서 받아내란 식으로 대처했다. 그랬기에 롱텀 매니지먼트 같은 미국 최대의 자산운용사가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휘가 빙그레 웃었다.
“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온답니다.”
“무슨 뜻입니까?”
“돈이 왜 없겠어요? 50퍼센트는 블라디미르의 주머니에서 나올 겁니다.”
“설마…!”
“맞습니다. 제가 블라디미르를 처단할 테니 놈에게서 회수한 자금을 전부 다 내놓으시고, 대통령께서는 향후 3년 내에 50퍼센트를 갚으시면 되는 겁니다.”
대통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블라디미르, 루슬란의 자금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릅니다.”
“저는 대충 알겠던데요. 러시아만한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면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것까지. 어쩌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 전에 이 일로 돈을 번 롱텀 매니지먼트의 경쟁 회사들에게 로비를 했을지도 모르고요. 모로보나 확실한 건 국민들에게 돌아갈 돈을 모조리 횡령했다는 거죠.”
“…!”
대통령의 눈빛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만약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50퍼센트를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대신 더 많은 은닉자금이 나온다 하더라도 이자로 생각하고 내주십시오.”
“귀하의 계획이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우리도 그 자들의 죄목을 널리 알리고 그자들이 횡령한 자금의 출처를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그놈들이 큰돈을 횡령했다면 그 돈은 당연히 국민들에게로 돌아가야 할 테고, 그래야 우리 정부도 똑같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돈 벌 구석을 마련해드렸잖아요. 무기를 파시면 됩니다.”
“….”
“제가 그 이상 고려해야 할 건 아니죠. 지금 궁지에 몰리셨고, 절박하시다면 동아줄을 잡으세요.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도 아무 희망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단언컨대 국민들의 비난은 잠재울 수 있지만 블라디미르 총리의 야망은 잠재울 수 없을 겁니다.”
대통령도, 다른 간부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인다는 것은 이렇게 억울하고, 치욕적이고, 가슴 아픈 일인 것이다.
이들이라고 쥐꼬리만한 대한민국에서 온 기업가 한 명한테 국운을 맡기고 싶을까?
그래서인지 러시아 대통령은 좋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용하겠습니다.”
그 말에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나왔지만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하는 것이다.
이내 이휘가 마지막 손가락을 접으며 입을 열었다.
“향후 10년 간 대한민국의 우방이 되어 주십시오. 말뿐인 우방이 아니라 서면으로 서명한 절대적 우방 말입니다.”
“이거야말로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입니다.”
“블라디미르가 처단되면 총리 자리는 빕니다. 그자의 수족과도 같은 자들이 다 잘려나가면 모르긴 몰라도 내각을 아주 갈아엎는 수준의 개편을 해야겠죠. 더군다나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정권의 권력이 정점에 오를 텐데, 그래도 힘들겠습니까?”
할 말이 있을 턱이 있나?
현재 러시아 정부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아직도 사회주의적인 흔적이 짙은 나라다.
그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잠시 말이 없던 대통령이 거의 십 년쯤 묵은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블라디미르와 루슬란은 어떻게 막겠다는 겁니까?”
“제 제안을 모두 수락하셨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럼 그 이름 써주세요.”
이휘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계약서를 꺼냈다. 뭐든 확실히 해야 한다.
구두계약은 구두계약일 뿐.
국제재판에서도 먹힐만한 서면에 써둬야 후일 딴 소리를 못할 것이다.
***
일이 잘 풀린 덕분에 이휘가 돌아가는 길은 훨씬 더 수월했다.
올 땐 산을 타고 쥐난 다리에 칼집을 내가며 도착했지만 갈 때는 민간차량에 탑승한 채 다른 사람처럼 위장해서 움직였다.
평평한 지름길과 차로 가니 지척이었다.
세 대의 SUV에서 목적지까지 이휘를 경호한 SORB 최정예 대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들과 함께 루슬란 자카예프가 일행을 잡아가둔 저택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총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저저적!
이휘는 피식 웃었다. 러시안 셋과 정대선, 그리고 PMC 용병들이 집안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 보초들이 없는 걸 보고 미리 내부상황을 파악했던 이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휘!”
알란이 반갑게 외치고.
알렉세이가 코끝을 스윽 문지르며 이휘 뒤에 서있는 저것들은 또 뭐냐는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정대선은 직접 와서 이휘를 껴안았다.
“잘 돌아왔다. 이 분들은?”
“내무부 소속 스패츠나츠 대원들입니다.”
“어쩐지 얼굴 가린 것부터 시작해서 범상치 않다더니….”
이휘를 따르는 러시안 셋이야 은퇴한 스패츠나츠다 보니 특별히 감흥이 없었는데 막 현역으로 뛰는 스패츠나츠 열 명이 잘 벼른 칼날처럼 서있으니 정대선은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그 역시 특수부대를 나왔다지만 러시아 스패츠나츠의 위상은 각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의 씰, 델타포스, 영국의 SAS 등과 함께 최강의 특수부대였다.
하지만 정작 이휘는 별 감흥 없는 태도로 다른 동료들과 인사를 주고받더니 모두가 집중할 수 있도록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답한 것은 정대선이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보초 스물일곱 명 중 열두 명이 다쳤다.”
열다섯 명이 남았다는 뜻.
“매수한 자들은요?”
“그중 열 명이야. 나머지 다섯 명은 응하긴 했지만 탐탁찮아했다. 나서기 두려운 것 같았어.”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 명은 확실해요?”
“아마도. 이번에 블라디미르와 루슬란이 잡힐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믿을게요. 그 자들이 돌발행동을 하면 일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까.”
“충분한 돈을 쥐어줬어. 블라디미르와 루슬란은 평생 밑에서 일해도 절대 주지 않을 만큼. 오죽하면 우리랑 같이 일하고 싶다더구나.”
“잘하셨어요. 돈이 끼니 믿음이 좀 가네요.”
“속물 녀석 같으니라고.”
정대선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 이휘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확실히 하죠. 우리랑 같이 일하겠다고 했던 놈들은 배제하자고요. 그럼 몇 명이죠?”
“왜지?”
“충성하는 게 이상해요. 언제 봤다고… 돈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은 못할 겁니다. 훈련 받은 자들이니 가능한 거죠. 배신한 것처럼 구는 법도 배웠을 겁니다. 그 자들은 빼자고요.”
“…알겠다.”
정대선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되면 일곱 명이다.”
“스무 명이 비는데.”
이휘는 눈으로 머릿수를 셌다. 이휘와 세 명의 러시안을 빼고 PMC 용병들과 함께 온 SOBR 대원들만으로 눈대중을 잡으면 총 50명이다. 인원이 충분한 것 같아도 철저해야 한다.
“용병 30명은 자연스럽게 근처로 합류합니다. 위치추적기를 보여줬으니 없으면 이상해요. 유사시에 전투에도 낄 수 있으니까 블라디미르와 협상하는 동안 대기하는 걸로 하고. 혹시라도 복변을 벗길 걸 감안해서 SOBR 대원 열 명이 이곳을 지키던 보초로 변복합니다.”
“여덟 명이 비는데?”
“어쩔 수 없죠. 나머지는 PMC 용병들로 채우고 뒤에 서게 할 겁니다. 그리고 PMC 용병들 중 실전경험 많고 생존력 강한 대원 둘 뽑아서 따로 준비시켜두세요.”
“그 둘은 왜?”
“우리가 포로로 잡히거나 전멸했을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상황을 확인하고 외부에 알릴 사람 한 명씩은 있어야죠.”
“…!”
다들 놀랐다.
설마 포로로 잡히거나 전멸했을 가능성까지 염두할지 몰랐던 눈치다.
하지만 이휘는 안다. 이런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퇴로를 확보하는 거다.
그는 각자 다른 의미로 놀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전부 다 할 일이 생겼으니 준비하자고요. 대어를 낚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