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63
나는 회귀했다 63
이틀 후 늦은 저녁, 검은색 방탄 SUV 열 대가 속속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SUV에서 경호원들이 먼저 내렸다.
어림잡아 사십 명 정도.
마지막으로 루슬란 자카예프와, 블라디미르가 내려섰다.
“휘가 누구지?”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이리를 닮은 자다.
한 눈에 봐도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생각보다 쉽지 않을 지도.’
이휘는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꼈다. 세포가 가닥가닥 깨어나는 느낌.
이런 느낌 속에서 작전을 수행했을 땐, 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제가 이휘입니다.”
“듣던 대로 어린 친구군.”
블라디미르가 눈을 빛냈다.
“놀라운 일이야. 자네 같이 어린 친구가 루슬란을 상대로 기싸움을 하고 나까지 불러내다니.”
그게 뭐 대수라고.
이휘는 입매를 비틀었다.
“별 말씀을요. 칭찬하시기에는 이른데요.”
“왜 그런가?”
“우린 동료가 될지 적이 될지 모릅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내 안마당이야. 내 말 한 마디에 목숨이 오간다는 걸 모르는 건가?”
“블라디보스토크가 안마당이라고요?”
“러시아 전체가 그렇지.”
“그랬다면 저는 러시아로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대리인을 보냈겠죠.”
블라디미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생각보다 이휘가 많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블라디보스토크로 날 불러낸 건가?”
“여긴 현 정부에 유일하게 남겨진 땅입니다. 저도 총리님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곳이죠.”
“머리가 좋군. 머리가 좋아.”
블라디미르가 씨익 웃었다.
“계속 밖에 세워둘 건가?”
“들어가시죠.”
그들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장소를 정하는 것은 이휘가 아니었다.
블라디미르의 경호원들이 한 발 먼저 움직여서 밖에서 저격할 수 없는 위치에 테이블을 당겨 놨다.
블라디미르가 마치 제집처럼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이휘 역시 그 맞은편에 앉았다.
러시안 셋과 자카예프 루슬란은 자리에 착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나운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라도 수작을 부리는 순간 곧바로 총격전이 일어날 것이다.
그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블라디미르는 태연했다.
“자넨 날 잘못 봤어.”
갑작스러운 말에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여길 장악했더군.”
“…!”
이휘는 그야말로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블라디미르는 그냥 떠보는 게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로웠고 눈빛은 확고하며 날카로웠다. 이휘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으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한 건데, 티 났습니까?”
“자네가 솔직히 말하니 나도 그렇게 하지. 난 수 많은 정적들을 제거해왔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야. 생존의 관건은 얼마나 섬세한가에 달려있지.”
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가 났군요.”
“그게 아니야. 내가 알아챈 것뿐이지. 자네는 훌륭하게 준비했어.”
블라디미르는 진심으로 감탄해주었지만 이휘는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럼 뭐합니까? 눈치 채셨으면서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라고 들어온 거야. 내가 문전에서 돌아간다면 내 부하들이 날 겁쟁이라고 비웃을 게 아닌가? 사실은 지금도 신경이 쓰이는군.”
블라디미르가 그의 부하로 위장한 PMC 대원들을 힐끔 쳐다봤다.
이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그가 여유만만한 척 허세를 부렸다면 덜 심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엄살을 부린다는 것은 이쪽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다. 만약 저 태도에 속아 넘어가 수작을 부린다면 블라디미르는 이쪽 전력을 무너뜨린 뒤 난폭하게 목을 조여 올 터였다.
이휘는 그 장면이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부하들을 대체하고 있는 대원들이 전부 이휘가 준비한 용병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현 정부와 결탁했다는 내용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휘도 역전의 기회가 있는 셈이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화가 잘 풀리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좋아.”
블라디미르가 깍지를 꼈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보게. 내가 뭘 도와주면 우리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해줄 텐가?”
“저의 인정이 중요합니까?”
“그건 아니지만 자네가 가진 카드는 받아야겠어. 평화적으로.”
“좋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카드 값을 말씀드리죠. 제가 가진 카드는 러시아 국채이니, 국채를 돈 주고 사가시면 됩니다.”
“내게 팔겠다?”
“돈 많이 주는 사람한테 팔아야죠.”
이휘는 러시아 대통령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제안을 했다. 일부러 진심을 섞어서 제안을 던진 건데 블라디미르의 판단력은 러시아 대통령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러시아 대통령처럼 당황하긴 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현 정부가 무너지면 놈들이 가졌던 사유재산을 싹 다 걷어서 자네에게 넘기지.”
“그 정도로는 택도 없을 텐데요. 제가 듣기로 현 정부 고위 관리들은 그다지 많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경기가 어려우니 그럴 수도 있지.”
“총리님은 아닐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유리 다예프의 집에서 적지 않은 금을 봤습니다.”
“그 금들은 현장에서 모두 사라진 걸로 아는데. 이미 자네가 가져간 것 아니었나?”
“그건 극히 일부의 군자금이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입니다. 명단을 보니 대부분 러시아 군부에 계신 분들이더군요. 대다수가 총리님 사람이고요.”
“놀랍구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블라디미르는 호기심으로 눈을 번들거렸다. 하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결코 우호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닌 현 정부와 거래한다면 자네는 머지않아 후회하게 될 거야.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될 거고.”
“사람 목숨이 허무하죠.”
“그래. 내 정적들은 자신들이 상상도 못한 곳에서,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죽었지. 자네처럼 능력 있고 아까운 친구들이었지만 가는 길이 다르니 어쩔 수 없었어.”
이휘는 그 말을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기 때문에, 과욕을 부리면 안 되는 겁니다.”
“과욕?”
블라디미르가 피식 웃었다.
“아직 내 싸움은 시작도 안 했네.”
“대통령이 그 시작입니까?”
“아니. 그건 전투를 치르기 위한 준비일 뿐이야. 우리의 목적은 예로부터 한 결 같았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거야.”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어떤 나라도 우두머리가 바뀌지 않는 곳은 없어. 대통령 임기 동안 수많은 반대에 부딪치며 많아봐야 두, 세 개의 업적만 완수하기도 힘든 게 사실이지. 어차피 머물렀다 가는 자리에 진정으로 조국을 향한 충성심이 있겠나? 하지만 이 나라는 달라. 나는 영원한 권력이 될 거야. 그게 다른 놈들과의 차이지. 나는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다른 놈들이 헤매고 있을 동안 전투적인 목적 하나를 두고 나라를 운영할 걸세. 결국 세계는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거야.”
미친놈이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휘가 보기에 블라디미르는 그 계획을 차근차근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으니까.
그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휘가 입을 열었다.
“현직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걸 알고 러시아가 소련의 이미지를 벗을 때까지 기다렸겠군요. 그가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심어놓을 때까지. 그 작업이 끝나면 나약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모든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이었어요. 그걸 위해 모라토리엄을 선언, 국민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킴으로서 우민화를 시도하는 거고.”
“당장에 참모진으로 데려오고 싶군.”
블라디미르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탐욕스러운 혀를 놀렸다.
“쓸 데 없는 심리전은 이쯤하고… 선택권을 주지. 한국 정부를 설득해서 우리와 손을 잡게 해. 그렇게만 한다면 러시아 국채의 30퍼센트를 채워주마.”
“한국에 원하는 게 뭡니까?”
“한국은 지금 위기에 처했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할 나라야. 이건 내 밑에 전문가가 분석한 결과이니 믿어 의심치 않네. 그의 추측으론 이번 IMF 협상안을 보니 무사히 위기를 극복해낼 거라더군. 한국은 우리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게 될 거야.”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입니다.”
“미국 대신 우리가 지켜줄 거다.”
블라디미르의 말에 이휘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한국 정부를 설득하라고요? 전 장사꾼일 뿐입니다.”
“유리 다예프를 죽일 때 한국 정보기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았다더군. 날 시험해 볼 생각은 하지 말게.”
러시아 정보기관을 손에 넣었으니 그 정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이휘가 눈을 반짝였다.
“이런 식의 협상을 가장한 협박이라면 루슬란 장군께 맡기면 될 일 아니었습니까? 왜 직접 오신 겁니까?”
블라디미르는 루슬란을 턱짓했다.
“저 친구가 내게 묻더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자네를 상대할 깜냥이 안 된다는 뜻이지. 그래서 직접 왔네. 자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거든. 파트너가 될 거라면 직접 보고 결정해야지.”
루슬란 자카예프는 표정을 감춘 채 고개를 숙였다. 블라디미르의 일침에 치욕감을 느낀 것이다.
이휘가 보기에는 블라디미르가 이 순간에도 일부러 루슬란 자카예프의 속을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다루는 방식이다.
당근을 주고 채찍을 뿌리는 거겠지.
침묵하던 이휘가 입을 열었다.
“거절합니다.”
“뭐?”
블라디미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이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협상은 없습니다. 총리님이 합리적인 리더이길 바랐는데 그저 위험한 야망가였군요. 저는 스포츠카 뒷좌석에 앉을 바에는 승용차 운전대를 잡겠습니다. 루슬란 자카예프,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휘가 갑자기 화살을 날리자 루슬란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확 쳐들었다.
“건방진…!”
그때 굳은 표정의 블라디미르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나? 여길 걸어서 나가지 못할 거야.”
“여기 왔을 때부터 목숨은 걸었습니다. 그리고 총리님이 이곳에 들어왔을 땐, 우리 둘 중 한 명만 멀쩡히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처음부터 협상할 생각이 없었군.”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거지?”
“러시아 총리가 구속될 명분을 긁어내기 위해서요.”
이휘가 눈짓하자 알렉세이가 도청기를 꺼냈다.
그걸 본 블라디미르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자네들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도청장치는 외부에 있습니다.”
“뭐?”
블라디미르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나 이휘는 오히려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덧붙였다.
“도청 내용을 확보한 이상 현직 대통령은 이곳의 군사를 움직일 명분이 생깁니다.”
“그때까지 자네가 살아있을 것 같나? 도청장치를 가져간 놈은? 이미 우리 군에게 붙잡혔을 거야.”
“아뇨.”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이휘 뒤에 서있던 SOBR 출신 부대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더불어 반사적으로 블라디미르 뒤쪽의 대원들이 총을 꺼내든 것은 당연지사였다.
처저저저적!
서로에게 무기가 겨눠지고.
SOBR 출신 부대원 한 명이 복면을 벗었다.
“블리디미르 총리. 당국 내무부에서 당신을 국가반역행위로 체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