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68
나는 회귀했다 68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이렇게 예쁠까?’
이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예쁘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뭐랄까, 분위기 자체가 다른 느낌?
살아있는 인형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 순간 러시아 대통령 안톤이 어깨를 툭 쳤다.
“앉읍시다.”
그는 웃고 있었다.
하긴, 저런 미모의 딸아이를 가졌다면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표정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숨겼는지 알겠나?’ 묻는 듯했다.
이휘는 눈길을 거두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빤히 쳐다봐서 실례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일시적으로 반짝인 소년의 눈빛을 못 본채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안톤이 제대로 소개했다.
“이쪽은 내 아내 로자.”
“안녕하세요, 영부인.”
그말에 로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러시아의 영웅을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휘는 예를 다했다.
상대가 전생에는 TV속에서나 보던 러시아 영부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영애보단 못하지만 젊었을 적에는 충분히 미녀로 이름을 날렸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에 온 뒤로 일부러 여기 음식 위주로 맛봤습니다. 맛있더라고요.”
“호호, 저도 언제 한 번 한국에 가보고 싶네요. 지금까진 못 가봤지만 앞으로는 갈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요.”
그녀가 흘깃 남편을 보았다.
그러자 안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거요. 부인. 그럼 듭시다.”
그 말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자리에서 주로 말을 한 사람은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이휘를 배려하며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그사이 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던 안톤이 식사가 끝날 때즈음 입을 열었다.
“고민해봤습니다.”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영부인이 물었다.
“저희는 일어날까요?”
“아니오, 부인. 부인뿐 아니라 러시아 국민 전체가 알아야할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니.”
이휘의 표정이 덩달아 굳어졌다.
“여기서 얘기합니까?”
“난 가족들과 국민들에게 무엇도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계속하시죠.”
본인이 그렇다는 데야.
고개를 끄덕인 안톤이 말을 이었다.
“많은 내적 고민이 있었지만 고민은 깊고 짧게 하라는 말이 있듯이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 대답은 칼, 아니면 꽃입니다.”
“칼과 꽃…?”
“그렇소.”
“칼은 협박이겠죠?”
“방금 협박당한 것 때문에 복수하는 건 아닙니다.”
안톤은 미소 지었지만 왠지 살의가 느껴졌다. 이런 기감에 민감한 이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진 무기가 없으실 텐데요.”
“그런 섭섭한 소리를. 우린 세계 군사력 2위의 강대국이요.”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까?”
“필요하다면….”
안톤이 덧붙였다.
“전쟁이라도 불사하겠습니다.”
이휘는 기가 막혔다. 잠시 잊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와 맞서 싸웠던 사람이란 것을. 방침은 다를 지언정 그는 세계 최고의 깡패 국가 중 한 곳인 러시아의 대통령이다.
“설마 이렇게 나오실 줄 몰랐는데요.”
“우리가 언제 국제사회의 눈치를 봤습니까? 국민들도 우리가 끌려 다니는 것보단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것을 원할 거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럼 꽃은 뭡니까?”
이휘는 일단 묻고서 머리를 굴렸다. 러시아를 눈에 보이지 않는 무기로 압박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다. 아니, 이렇게 나오면 자신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
질문을 받은 안톤이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걸 전부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략혼이요.”
“뭐요?”
“아직 어리니 놀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흔한 일이었어요.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이휘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안톤이 덧붙였다.
“동맹과 결속을 단단히 해줄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죽인 원수가 아닌 이상 관계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 열쇠기도 하지요. 어떤 계약서보다 강한 효력을 가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한국의 부호들도 자식들 정략혼을 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던데? 난 러시아 대통령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략혼은 어디까지나 서로 얻을 게 있을 때 성립됩니다. 러시아에는 제 인생을 걸고 얻을만한 뭔가가 없어요.”
“여성의 무기는 미모란 말도 있지 않소.”
안톤이 빙그레 웃으며 영애를 쳐다봤다. 그래, 미모는 인정한다.
이휘는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성을 흐릴 생각이 없었다. 전생의 아내가 아니라도 이런 식으로 결혼하긴 싫다.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영애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영애의 마음이 어떨지도 모르고. 러시아인들이 원래 그런 건지 표정만 봐선 도저히 모르겠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거고 아직 결혼할 생각도 없고요.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도 따로 있습니다.”
이 이상 확실한 거절은 없다.
그러나 안톤은 당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건 아직 결혼은 안 했다는 뜻이로군.”
“저 아직 십대에요!”
“이십대를 준비하기 좋은 나이지. 당장에 결혼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약혼 정도로 해둡시다.”
“미치겠네.”
이휘는 자기도 모르게 한국말로 툭 뱉어놓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결혼도 아니고 약혼이라면 먼저 하고서 방법을 모색해도 된다.
아니, 설령 결혼을 한다 해도 현대사회에선 최악의 경우 이혼을 하면 된다.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현대사회에선 정략혼 같은 문화가 익숙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물린 관계라면?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가는 이 때문에 나중에 발목을 잡힐 우려가 있었다. 물러나지 않아야 할 때 이런 식으로 물러나면 지금은 편해도 앞으로의 협상도 난항을 겪게 될 가능성이 컸다. 영애가 이 혼담을 어떻게 생각할지보다 그점이 중요했다.
이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어쨌든 거절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돼요. 저는 아까 집무실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진행할 겁니다. 얘기가 잠시 이상한 길로 샜는데, 대통령님이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건 곤란해요. 우리가 어떻게 회복한 이미지인데 그렇게 놔두겠습니까? 전쟁까지 각오했다는 것은 이휘 씨를 그냥 보내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러시아를 도운 조력자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
“죽이지 않아도 방법은 많아요. 우리 러시아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풍족한 휴가를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휴가 같은 소리 하네!
“감금하시겠다는 겁니까?”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저희는 수많은 방위업체 중 한 곳을 요구한 것뿐입니다.”
“이건 국격의 문제에요. 이휘 씨의 공격으로 국격이 떨어지는 나 대통령이 일개 한국의 사업가에게 휘둘려 국가의 자산을 내주는 거나. 차라리 당당한 대통령으로 남겠소.”
이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휘는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하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방준수도 옆에 있을 것이다.
하진성이 조마조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협상결렬입니다.”
-그런…
“진행해주세요.”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위험한 상황이라거나….
“그 부분에 대해선 준비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휘가 전화를 끊었다. 아마 안톤은 그가 한 말만 들었을 것이다.
안톤은 아무런 반응도 안한 채 태연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럼 이제 우린 적이 됐군요.”
“비공식적으로 일을 처리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러시아에 공짜로 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요. 충분히 배려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한국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충분히 군사적 원조로 포장해서 감춰둘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여기까지 생각을 안 해보신 건 아닐 테고… 국가와 방위업체 간에 알려져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추측은 자유요. 굳이 막을 생각 없습니다.”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부인과 영애가 함께 일어나려 하자, 그가 말했다.
“오늘 하루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넌 남아서 궁 내부를 안내해드리거라.”
영애가 말 없이 다시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하는데 고분고분 말에 따른다.
이내 안톤이 덧붙였다.
“그럼 편안하게 묵으시길.”
그가 약간 촉촉한 눈길로 딸아이를 보는 영부인과 나가자, 이휘는 영애와 단 둘이 남게 됐다.
영애가 물었다.
“식사는 어떠셨어요?”
“얹힐 것 같습니다.”
영애가 피식 웃었다.
“그럼 소화 좀 시키시다가 구경해요.”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뭐가요?”
“내가 당신을 인질로 잡으면?”
영애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요?”
“….”
이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크램린 궁에서 영애를 인질로 잡는 순간 어디서 날아 온지 모를 총알에 머리통이 터져나갈 게 빤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여길 빠져나간다 해도 러시아는 절대 못 빠져나간다.
그것도 성공하면?
평생 도망 다녀야할 것이다.
“잠깐 생각해 본 겁니다.”
영애가 다시 웃었다. 조금도 무섭지 않은 태도다.
“그나저나 왜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겁니까? 그쪽도 아직 어린 것 같은데.”
“열일곱 살이에요.”
“그런데 왜…?”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으니까요. 저한테는 오늘이 그날이에요.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건 그쪽 같은데요?”
“제 얘기 못 들었어요?”
“정말 아버지 말씀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한국 정부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글쎄요. 러시아 대통령과 당신. 한국 정부가 어디 손을 들어줄지 궁금하네요.”
뭘 알고 하는 말일까?
그 생각은, 그녀의 다음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당신이 가진 카드는 한 장뿐이에요. 칼은 칼집 안에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죠. 당신이 자본력으로 공격하는 순간 러시아는 한국을 압박할 명분이 생겨요. 그땐 어떻게 하려고 하죠?”
이휘는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했던 얘길 들은 겁니까?”
“아뇨. 두 분 분위기를 보니 알겠던데요? 이휘 씨가 가진 건 자본력뿐이잖아요.”
“….”
할 말을 잃은 이휘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대통령님의 지낭이 바로 옆에 있었네요.”
“제가요? 아버지는 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세요. 너무 바쁘신 탓이겠죠.”
“…숨긴 겁니까? 그런 통찰력을?”
“그랬어요. 제가 너무 뛰어나면 아버지가 빨리 시집보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안 그래도 러시아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을 때 여기저기 혼담이 오갔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보내지 못한 이유는 제가 망나니인 줄 알았기 때문이고요.”
“망나니라고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별 거 없어요. 공부 안 하고 놀러 다니고. 오죽하면 언론에 제 얼굴을 숨기셨으려고요.”
“그건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런 것도 있겠죠.”
순순히 인정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창피한 것도 있으셨을 거예요. 아, 그래도 선은 확실히 지켜가며 놀았으니 오해하진 마세요. 그래봐야 보여주기 식으로 셀럽 흉내 좀 냈을 뿐이니까.”
“왜 나한테 변명해요?”
“우리 결혼할지도 모르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난 여자가 있습니다.”
“내가 더 매력적일 수 있는 거고요.”
“나한테 왜 이래요?”
“우리 아버지와 대등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총리밖에 못 봤어요. 그 사람은 아빠뻘이고요.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겠죠. 그런데 내 또래에 그런 아빠를 궁지에 몰아넣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심지어 러시아를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영웅이죠. 드디어 저와 맞는 짝을 찾았으니 강하게 대쉬하는 것뿐이에요.”
“미치겠네.”
이휘가 또 다시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그녀가 물었다.
“자꾸 뭐라고 하는 거죠? 아까도 그러던데.”
“그냥… 황당하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하지만 난 아버지 생각과 달라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멋진 사람이라도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내게 중요한 건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라거나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 문제들이 어찌 되든 당신이 살아있는 한은, 우리 둘 관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대통령이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했어도, 전쟁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다.
“한국 정부가 순순히 러시아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내가 이번 협상에서 패할 거라고요.”
“물론이죠. 저는 러시아 국민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이휘 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과하다 싶을 만큼…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감금하려는 거고요.”
“젠장.”
이휘는 등을 기댔다.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상 빠져나가려 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협상이 완전히 결렬됐다는 거다. 이런 식이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어떤 비난을 받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영애의 정략혼까지 생각할 정도면….
그런 그때, 영애가 말을 이었다.
“제가 도와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