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73
나는 회귀했다 73
인천국제공항을 나서자 도로변에 서 있는 검은색 밴츠 S클래스 세단이 보였다.
그 앞에는 방준수가 선글라스를 쓴 채 V자를 그린 세 손가락을 이마에 붙였다 떼며 인사했다.
“우리 이 대표 오셨는가?”
이휘가 피식 웃었다.
“뭐야, 이 차는?”
“나 면허 땄다.”
“…?”
“첫차로 뽑았지!”
“아아.”
이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준수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타시오.”
“근데 웬 대형세단?”
“할머니 모시는 용이야.”
어이구, 효심 보게?
뒷좌석에 올라탄 이휘는 시트를 두드렸다. 편하다. 명차는 명차구먼. 하지만 이미 미래의 세단을 여러 번 경험해본 이휘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운전할 수 있는 건 부럽네.’
운전석에 앉은 방준수가 백미러를 조절했다. 시트를 바짝 당겨 앉은 것부터, 어째 불편해 보이는 움직임이다. 살짝 불안해진 이휘가 물었다.
“이러다 다 같이 죽는 거 아니지?”
실소가 나왔다. 정말 방준수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탔다가 죽으면 얼마나 허무할까 싶다. 총탄이 빗발치던 현장에서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이래서 사람 인생 종 칠 때까지 알 수 없다. 순간을 소중히 살아야지.
잠시 쓸 데 없는 깨달음을 되새기고 있는데 방준수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내 운전 솜씨를 믿어봐.”
보조석에 탄 알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더 믿음이 안 갈까요?”
“나 러시아어 할 줄 알아요.”
방준수가 째려보자 알란이 입술을 억지로 비틀며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큰 차는 운전하기 더 힘든….”
부아아아앙!
말을 자르며 출발한 차량이 도로 위를 질주했다. 방준수는 도박사다운 태도로 운전했다. 마치 목숨을 판돈으로 올려놓고 밟는 것 같다.
이거,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나 싶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밴츠 S클래스 말고도 스포츠카 한 대가 더 있었다. 방준수가 자랑스레 말했다.
“이건 내 세컨 카.”
“대표도 뚜벅이로 다니는데.”
“너도 나이 차면 살 거 아니야?”
“난 큰 차, 방탄으로 뽑을 거야.”
“무드 없는 녀석.”
눈을 흘긴 방준수는 나란히 걸으며 본격적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놨다.
“…우리가 연계하고 있는 미디어 업체들을 이용해서 러시아를 몰아갔던 거야. 이렇게 판을 깔아두고 미국에 접촉하면 좀 더 효과가 있을 거라고 본 거지. 미국 입장에서도 석유나 무기시장이 걸려 있으면, 명분만 생기고 기회만 되면 무조건 움직일 테니까.”
“소식은 들었지?”
“정 사장님한테 일이 잘 풀렸다고 들었어.”
“맞아.”
“긍정적이긴 한데 그래도 난 러시아보다는 미 정부야. 파트너로서.”
“나도 그래. 하지만 미국은 우리가 쥐고 있는 약점이 없어. 약점을 쥔다 해도 쥐고 흔들지 못할 거고.”
“하긴….”
방준수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어? 러 정부는.”
“일단 러시아를 깎아내리기 위해 준비한 무기는 올스톱시켜.”
“이미 기자들이 터뜨린 이번 러시아 관련 사건에 대한 내막을 기반으로 영화제작까지 들어갔어. ”
“그것도 실화가 아니라 픽션이 가미된 내용쯤으로 전제를 바꾸고.”
“음, 확실히 그렇게 해두면 언제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네.”
“맞아.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특히 형이 집중해줘야 할 것은 이런 국제적 정치적 판도가 아니야.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는 게 급선무지.”
“나쁘지 않아. 러시아는 우리보다 경제적 생활 수준이 낮으니까 러 정부만 협조한다면 장래성이 있어.”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러시아가 주력으로 삼는 무기를 대량 사들일 거야. 그 자금 중 대부분을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로 메꿀 거고. 자동차 관련, 전자, 가구, 조명 등….”
“아! 정성그룹이나 대선물산을 통해 수출입을 한다면 우리한테도 수익이 떨어질 거야. 두 곳 모두 우리가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진 곳들이잖아.”
이휘가 손가락을 퉁겼다.
“그거야. 여기에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더한다면?”
“손해 없이 무기를 사들일 수 있겠어. 러시아는 이미 무기를 개발할 시설들이 갖춰져 있으니 무기 팔아서 돈 버는 거고. 우리도 우리가 기반이 갖춰져 있는 걸 팔아서 수익을 얻는 거고. 근데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만 돈을 쓰겠는데?”
“어차피 나갈 예산이야. 그 예산을 채워줄 거고.”
“어떻게?”
“북한에 원조하는 자금을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지. 부패한 정치인들도 잡아다주고.”
“정치인들을 어떻게?”
“그 일은 차차 준비할 거야.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증거를 잡아다 안겨줄 테고. 그 일은 이번에 신설할 경호팀이 맡을 거야. 전원 용병들로 이루어진 팀이지.”
“지난 작전에서 정 사장님이 고용한 분들?”
“맞아.”
“후우.”
듣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 한숨을 내쉰 방준수가 물었다.
“난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 치고 북한은? 우리가 무슨 수로 정부에서 원조하기로 정해놓은 예산을 막아? 틈만 나면 밥 달라고 난리 치는 놈들인데. 그래서 잃을 게 많은 남한 정부가 쌀 줘가며 달래는 거고.”
“어차피 러시아와 비밀리에 무기 거래를 하려면 한국과 러시아 내부에서 활동하는 북한 첩보원들을 싹 다 제거하는 게 먼저야.”
“…그렇겠지?”
“정보를 흘려서 러시아로 몰아넣은 다음 한 번에 잡는다. 우리 방식으론 잡을 수 없어.”
“하루하루가 전쟁이네.”
방준수가 혀를 내둘렀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잘못 될까봐 자식 전쟁터 내보낸 부모마냥 가슴 졸인다.”
“고마워.”
“그런 말 듣자던 건 아니고. 정보는 어떻게 흘리게?”
“우린 알마즈를 인수할 거야.”
“그런데…?”
“북한으로선 상상도 못하겠지. 러시아 최대의 무기 회사가 우리 거라는 것. 우리 지시에 따른다는 걸.”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알마즈를 통해 북한과 거래를 튼다. 그 과정에서 흘릴 거야. 알마즈가 남한과 비밀리에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걸. 그 상황에서 우리가 러시아로 움직이면 북한 정보원들이 전부 들러붙을 걸? 우리가 비밀리에 러시아와 거래한다는 증거만 찾으면 미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우리와 미국을 싸움 붙여서 적화통일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테니.”
“그거 목숨 내놓고 하는 작전이야. 그러다 정말 증거를 빼앗기면 우리 회사는 한 방에 날아가. 한국 정부에서도 책임을 피하려면 우리 회사를 버리는 수밖에 없고.”
“알고 있어.”
“미국이 재제를 가할지도 몰라. 북한 첩자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일본은 옳다구나 할걸? 안 그래도 미국의 하수인이 따로 없는데 살살 긁어서 우리 나라를 고립시킬 좋은 기회잖아. 걔네 그런 거 잘하고.”
“실수가 없어야겠지. 한 번 모든 걸 걸어볼만해. 이건 단순히 북한 첩자나 잡자고 벌이는 일이 아니야. 그놈들이 사라져야 대업을 시작할 수 있어.”
“….”
순간 할 말을 잃었던 방준수가 물었다.
“네 간덩이 면적은 얼마나 될까?”
“왜?”
“나도 투자에서 실패를 고려하지 않고 이기기 위해 그만큼 치밀하게 배팅하지만, 사실 너처럼 인생을 살면 그 어떤 위험한 투자보다 더 리스크가 크거든. 근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척척 일을 진행하는 게 이상해서. 어쩔 땐 좀 무섭기도 하고.”
이휘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마. 다 잘 될 테니까. 그리고 설령 잘못돼도 우리 직원들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야. 피해라고 해봐야 출근할 직장이 사라지는 것 정도?”
“이미 평생 벌고 싶었던 기준치는 넘겼어. 나머지는 설렘과 즐거움이지. 가끔은 너무 설레서 심장마비가 걸리면 어떡하나 싶지만…. 다른 직원들도 대우에 만족하고 있고. 무엇보다 살 집이 생긴 것에 감동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 같아.”
물론 집을 아주 준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근속하는 이상 집에서 살 수 있다. 일종의 숙소 개념인데 10년 후에는 자기 것이 된다.
이런 조건으로 계약을 했기에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고 있다. 심지어 출퇴근을 강요하지 않고 자율탄력근무를 시행중이지만 지금 누리는 것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뭐, 회사 수익에 따른 인센티브 때문이기도 하고.
이휘가 말했다.
“잊지마. 내가 없을 땐 형이 대부분 관리하니까… 파트리아 펀드는 일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주력할 거야. 일할 마음이 들지 않으면 그 직원은 데리고 있으나마나야. 특히 우리처럼 보안이 중요하고 개개인의 능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곳이라면.”
눈빛이 달라진 방준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네 경영방침에 어긋나지 않게 할게.”
“돈이 아닌 사람을 보자. 알지?”
“오케이.”
마주 웃은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방준수는 이휘의 말 한 마디에 걱정을 완전히 덜어낸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이휘는 자기가 뱉은 말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태연한 척했던 이휘의 뱃속은 그렇지 못했다. 계획을 세울 때마다 뱃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긴장이 된다. 내 결정 한 번에 누군가 위험해지진 않을까, 혹은 이 나라가 통째로 무너져내리는 건 아닐까. 마치 핵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정서가 불안정해진다.
그러나 이휘는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 큰 무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지, 없는지가 그릇의 차이라고. 막대한 권한을 쥐어줘도 그릇이 작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멸한다. 혹은 빼앗기거나.
남들은 `그릇`이라고 표현하지만 이휘가 보기에 그것은 얼마나 비정하고 이기적일 수 있느냐의 싸움이었다. 더 냉정하고 비정한 자가 이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수많은 이들이 부정하고 따뜻한 온정에 기대지만 이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 폭의 역사에 짙은 족적을 남기려 결심한 순간부터 따뜻하고 소소한 행복보다 냉혹하고 화려한 길을 걷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랜 평안은 없겠지만 인생의 한 지점만큼은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요새 갈수록 그 끓는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직은 지칠 때가 아니다.’
이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머리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온정을 버렸다면, 비정해져야 한다면 지금 실행에 옮겨야할 계획은 자명했다.
러시아와 교역을 할 때 확실한 이문을 건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이휘가 핸드폰을 들어 할아버지 이성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돼?
할아버지는 대뜸 성화를 냈다. 그렇다고 `해외에서 총질하고 다녔어요`할 수도 없는 노릇.
이휘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일 때문에 해외에 쏘다니느라.”
-그래, 사내 놈이 일이 먼저라야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하긴, 회사 경영을 부수적으로 여기고 좁은 안목으로 자기 자리만 호시탐탐 노리는 이리 같은 자식들 사이에서 왕좌 따윈 관심도 없이 제 앞길을 도모하는 기특한 손주가 얼마나 반가울까.
자기 손으로 정성그룹을 일으킨 할아버지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직접 이룬 것과 물려받은 것의 차이를 누구보다 더 깊이 알고 있을 것임에.
만약 큰아버지들이 일찌감치 정신을 차렸다면 할아버지가 쓰러진 뒤에도 정성그룹이 그리되진 않았을 텐데.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이휘는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입을 뗐다.
“지금 찾아뵈도 될까요?”
진지한 투로 말한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회사 일에 관해 할 말이 있구나.
귀신 같은 노인네.
괜히 재벌이 된 게 아니다.
이휘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그럼 없던 시간이라도 내야지.
오늘은 손자가 아니라 파트너로서 찾아가는 거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본사로.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한 시간이요.”
-그래. 두 시에 늦은 점심 한 끼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려 전화를 끊은 이휘가 알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성그룹 본사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