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78
나는 회귀했다 78
이제부터 쇼 타임이다.
여러 사람을 대동하고 참석한 UDU 소속 팀장-`소대장`- 백성범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 사업가의 이미지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이휘는 그 뒤에 선글라스를 쓰고 국정원 북파공작원들과 함께 경호원으로 위장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합류했기에, 북에서 파견 근무하던 국정원 요원들도 알지 못했다.
오직 백성범 팀장만 안다.
이휘는 무전을 받았다.
-좌우 건물에 저격수 한 명씩. 기차역까지 감시원 여섯 명이 배치되어 있음. 각각 여섯 명씩 탑승한 차량 네 대가 기차역에서 대기 중. 계속 동선 체크 중입니다.
“대기.”
북측 간첩들이 숨은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고 받은 이휘가 속삭였다. 정확히 인원이 맞아 떨어지는 걸 보니 알렉세이에게 눈을 떼지 말라고 했는데 빈 틈 없이 일을 수행한 것 같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렉세이가 알마즈 협상자로 등장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는 백성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반갑습니다.”
백성범도 미소 지었다. 그는 근육질 몸을 숨기기 위해 옷을 잔뜩 끼어 입은 상태였다. 해서 그저 헬스를 열심히 한 풍채 좋은 사업가,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고강도 훈련을 받은 군인 특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임무 특성상 위장·잠입할 일이 많은 UDU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미세한 버릇 하나까지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을 익힌다.
“체격이 좋으시구만.”
알렉세이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이 상황에서, 저 정신 나간 놈은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 같다. 대번에 백성범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쪽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를 악무는 것이 보인다.
알렉세이와 힘겨루기를 못하고 당해줘서일까, 아니면 저마저도 위장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알렉세이가 피식 웃으며 손을 놓더니 계약서를 꺼냈다.
“빨리 빨리 처리합시다. 오래 얼굴 맞대고 앉아 있어봐야 피차 좋을 게 없을 것 같으니….”
“그전에 확실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백성범이 손아귀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근래 귀하가 북측 인사와 접촉했다는 얘길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건물 밖 북측 저격수 둘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감청하고 있을 것이다.
도청기 성능이 그리 좋진 못하지만 두 사람이 워낙 가까이 있어서 사소한 숨소리 하나까지 잡아낼 정도는 된다.
바꿔 말하면 백성범과 알렉세이가 얼마나 멋진 연기를 펼치느냐에 따라 상대를 보다 확실히 속여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알렉세이와 백성범은 즉흥적으로 기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소?”
“헛소문이 확실합니까?”
백성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하하, 이거야 원… 우리가 남측 편이라고 생각하오? 우린 러시아의 방위산업을 책임지고 있지만, 이런 거래들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거요. 그러니 계약서에도 비밀엄수조항이 있는 거고. 즉, 우리가 북측과 거래하든 말든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란 거지. 아쉬운 쪽은 우리가 아니오.”
알렉세이는 북측과 상대할 때보다 적당히 매너를 지켰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백성범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군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배우를 했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인 연기다.
“솔직히 우린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더 드릴 테니 북측과 거래를 끊으십시오. 양쪽과 거래한다면 우리 쪽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정보가 새어나갈 우려도 있고요.”
알렉세이가 지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요? 흐흐흐, 내가 또 이런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지. 한데 문제가 좀 있어요. 당장에 큰돈을 받는 게 중요치 않다는 거요. 앞으로 북측과 거래하며 벌어들일 돈이 얼만데 그걸 포기하겠소?”
“우리가 거래를 접는다면?”
“어, 그건 곤란한데.”
알렉세이가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진짜 괜찮겠소? 미국이 당신네 나라에 무기를 막 내줄 리는 없을 테고. 그러면 거래할 곳이 우리밖에 더 있나?”
백성범이 이를 갈았다.
“우리 쪽에 더 많은 거래량을 주십시오. 그건 괜찮겠죠? 가격은 섭섭잖게 쳐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우린 이득만 보면 되는 입장이라.”
활짝 웃은 알렉세이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자, 그럼 싸인하시지요.”
백성범이 싸인을 마치고 계약서를 교부한 뒤, 알렉세이가 물을 탔다.
“그나저나 이제 한 배를 탔으니 얘기해줄 수 있겠지? 정보는 어디서 난 거요?”
“무슨 정보 말입니까?”
백성범이 모른 척 되묻자 알렉세이가 대답했다.
“이거 왜 시치미를 떼시나. 우리가 북측과 접촉했다는 것. 어디서 얻은 정보냔 말입니다.”
“북측에 연락책이 있습니다.”
“이런… 정보공유를 부탁해도 되겠소?”
“당연히 안 됩니다.”
“왜 이러시나. 좋은 건 같이 좀 씁시다. 혹시 압니까? 우리가 남몰래 남측을 확실히 밀어줄지. 그만한 정보를 알아낼 정도면 다른 중요한 기밀정보도 잔뜩 쥐고 있다는 건데. 안 그렇소?”
“확답을 주신다면 공유하도록 하죠. 우리도 힘들게 심은 자니까요.”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먼저 신뢰를 보여주면 위에다 얘기할 때 큰 힘이 되어줄 거요.”
묻는다고 툭툭 털어놓으면 어설프다. 어설프면 함정인 것이 들킨다. 백성범이나 알렉세이는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기싸움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모든 것이 백성범의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계략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래도 이휘가 보낸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고 온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이휘가 내부 기밀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노출하고, 민정수석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내면서까지 백성범을 콕 집은 이유였다.
이번 작전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가 필요하다.
백성범은 그 기대치에 넘치도록 부응했다.
“이번 거래에 참여했던 자들 중에 우리가 심은 자가 있습니다.”
“알겠소.”
딱 잘라 대답하자 백성범이 눈을 크게 떴다.
“더 묻지 않는 겁니까?”
“거기까지만 알면 됐소. 많이 알아봐야 머리만 아프지. 어쨌든 이번에 온 자들이라면 내 머릿속에 모두 있으니 그중 한 명이란 것 아니오.”
백성범은 찜찜한 내색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죠.”
불편한 기색을 있는 대로 드러내자 알렉세이가 피식 웃었다.
“여부가 있겠소?”
백성범과 경호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남아있던 알렉세이가 도청장치를 향해 말했다.
“이거 돈을 따로 더 받아야겠는데? 남측 간자를 알아내줬으니… 내가 이번 거래에 대해 소상히 밝힌 건 그 젊은 대좌밖에 없소. 방금 만난 남측 돈귀신 놈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아는 것 같았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는 천천히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쪽 계약서는 확보했으니 이제 당신들 차례야. 방금 나간 자들을 잘 처리하고 오길 바라오. 그래야 우리 관계에 차질이 없을 테니.”
***
백성범과 이휘는 각각 다른 차량에 탔다. 물론 방탄차량이었다.
차량 두 대가 각기 다른 길을 골라 출발했다.
이휘가 총기를 점검하는 체육관 관장을 향해 물었다.
“긴장되십니까?”
“긴장해야할 건 우리가 아니라 방금 협상자 행세를 하던 남자 같은데… 북측에선 우릴 최대한 살려둘 생각일 거야. 그래야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겠죠. 우리가 다른 사람을 협상자로 내세울 수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 챘을 테니.”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뒷좌석에 탔던 국정원 요원 두 명의 눈빛이 변했다.
이휘는 백미러로 그걸 놓치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백미러를 살짝 비틀며 체육관 관장에게 신호를 주었다. 이는 함께 모스크바에 오는 길에 두 사람이 맞춰둔 신호였다.
그 다음 이휘는 국정원 요원 둘이 의심할 새도 없이 핸들을 확 틀었다.
“이런!”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지만 이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보조석의 체육관 관장 역시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뒷좌석 두 사람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가드레일을 받은 차량의 엔진룸에서 연기가 뿜어져 올랐다. 본넷이 엔진룸 안쪽까지 말려들어와 있었다. 이휘와 체육관 관장은 잽싸게 차에서 내려서 뒷좌석에 정신줄을 놓고 있는 요원 둘을 끌어냈다.
“설마 그 말이 진짜일 줄이야.”
체육관 관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북파공작원 둘이 적으로 변해서 돌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북파공작원을 여러 명 만난 적이 있던 이휘는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열 명 중 한 둘이지만 이중스파이나 북측에 큰 보상을 약속 받고 배반한 자들이 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휘는 차에 탄 후 일부러 신분을 노출해서 두 사람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과감한 조취를 취한 것이다.
턱 밑을 짚어 쓰러져 있는 두 요원의 맥박을 확인한 이휘가 말했다.
“두 놈 데려가세요.”
“알겠다. 이쪽도 문제가 생길 뻔했는데 저쪽이라고 안전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작전대로 진행합니다. 저쪽도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을 거예요.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이휘는 자기도 모르게 `저를 최고로 만들어준 최고의 전투원이자 교관입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백성범은 진짜배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일축했다.
“믿을만한 사람이요.”
***
이휘는 작전대로 저격 포인트에 가서 대기했다. 산 위였고, 저 멀리 깔려있는 레일을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기다리면 기차가 지나갈 것이다.
주변이 개활지라 저격에 용이했다.
이휘는 경호원들을 비롯해 알렉세이 쪽과도 연결되어 있던 주파수를 바꾼 뒤 물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백성범 역시 역에서 무전 이어폰을 바꿔 꼈는지 짤막하게 대답했다.
-요원 8명 중 3명이 적으로 의심됨. 북측 요원 32명 전원 같은 기차에 탑승 예정.
살벌한 내용이다.
적들은 도망칠 구석이 없는 기차 안에서 일을 벌일 텐데, 내부자까지 35명의 적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셈이다.
반면 백성범이 의지할 것은 그 자신과 배반하지 않은-`혹은 아직 모르는`- 아군 8명뿐이다.
그럼에도 이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저격포인트에서 대기 중입니다. 1킬로미터마다 나오는 개활지에 저격수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개활지를 지날 때까지 각 한 명에서 두 명 제거 가능합니다.”
-수신완료.
두려움은 물론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묵묵한 목소리.
그 후로 더 이상 무전이 들려오지 않았다. 백성범이 무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내, 저 멀리 터널에서 어스름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기차가 터널을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이휘는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대며 숨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