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80
나는 회귀했다 80
이휘는 무전을 끊고 움직이려 했다.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CIA가 냄새를 맡았다면 최대한 자리를 피해야 한다.
위치를 옮겨서 다시 상황을 살핀다. 머리는 그 후에 굴려도 늦지 않다.
그런 그때.
이휘는 뒤통수에서 차가운 쇠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젠장.”
중얼거리는 순간 영어가 날아와 박혔다.
“천천히 일어나.”
이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격지점에 도착해서 순식간에 기차 안에 탄 놈들을 처리하다 보니 정작 주변 경계가 늦어졌다.
저격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격지점 확보와 안전. 적에게 발각당하는 순간 1순위 표적은 저격수로 바뀐다. 총탄과 포격이 쏟아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들은 저격수부터 제거한다.
그걸 모르지 않았는데, 전쟁터가 아니라고 너무 안일했다.
상대가 다시 말했다.
“세 번 말하지 않는다.”
충분히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것이다. 신중하게 굴기야 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 정부라면 설사 일이 틀어져도 완벽하게 덮을 수 있으니까. 더욱이 장소가 러시아 땅, 특히 이런 산속에서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도 아는 이상 저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범위에 한계가 사라진다.
“알겠어.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이휘는 총에서 뗀 양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 채 무릎부터 끓고, 그 다음에 상체를 곧게 편 채로 하체를 일으켰다. 그를 무장해제 시킨 상대가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조사 받기에는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데.”
“그건 내가 판단한다. 데려가서 조사할지, 보내줄지, 아니면….”
그는 말을 잇지 않고 물었다.
“묻는 말에 대답해.”
“돌아서도 될까? 서로 눈은 보고 대화해야지.”
“헛소리.”
쇳덩이가 머리통을 민다. 상당히 불쾌했다. 예의 따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헤어스타일 망가지게….”
“지금 이게 대화 같나?”
“별 거 아니야. 사춘기 소녀처럼 예민하게 굴지 마.”
“죽고 싶어?”
험악하게 소리 지르는 것이 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적어도 아직까진.
여기서 돌발행동을 한다면 그 생각- 아니,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만 오버하지 않으면 총 맞을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딱 한 번.
그 한 번을 위해 이휘는 순순히 대답했다.
“뭘 새삼스레 묻고 그래? 북측에서 러시아 무기상과 거래를 텄다. 우린 그 증거를 찾기 위해 투입된 거고.”
“너에 대해 알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사업가 중 한 명. 포브스에서도 널 취재하고 싶어서 혈안이라더군.”
“내가 벌써 그렇게 유명해졌나?”
“…네가 취재요청을 거절했고. 스스로에 대해 숨기고 있더군. 한국에 있던 우리 국민이 사라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 론스터가 철수한 뒤 네가 그들의 성과를 독차지했더군. 시치미 떼면 재미없어.”
“좋아, 좋아. 역시 CIA네. 대단해.”
다시 한 번 총구가 뒤통수를 밀쳤다.
“기업가가 북측과 러시아의 무기 거래를 캐내기 위해 저격수가 되진 않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미치광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지. 평범하게 살아온 10대 소년이 어느 날 인수를 시작했다. 론스터가 추진하던 일을 가로막고 그 성과를 독차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기업, 우리 IT회사까지 손을 댔지.”
이 정도는 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었던 이휘가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되나?”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너처럼 기상천외한 놈들은 간혹 등장하니까.”
역시 CIA. 스케일이 다르네.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 기상천외한 젊은 사업가가 러시아에서 벌어질 뻔했던 쿠데타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번에는 무기를 들고 러시아에 와서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자들과 북측 요원들을 저격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심지어 우리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들을 대동해서 일을 벌였다면 더더욱. 한국 정부에서 꾸민 일인가?”
“아니야. 설령 맞다고 하면 내가 대답하겠어? 당신 같으면 대답할까?”
“번거롭게 만들지 말지.”
“번거롭게 만드는 건 당신들인 것 같은데. 어차피 내가 처벌 받는다 해도 러시아 정부를 통해 처벌해야 돼. 안 그래?”
“뭐?”
“북측 요원들은 철저히 비밀리에 유지되는 조직원들이니 인적사항이 등록되어 있지 않을 테고, 러시아 정부는 날 풀어주겠지. 당신 말처럼 난 러시아의 영웅 비슷한 거라서… 이번에도 영웅적인 일을 했고.”
“역시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을 러시아에 넘겼을 때 얘기야. 러시아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널 빼내려면 한국 정부에선 이를 시인해야할 거다.”
“잔머리가 잘 굴러가서 알아낸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
“혼자 왔군.”
이휘는 주위에 누가 더 있나 살피며 시간을 번 것이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만약 인원이 더 있었다면 같이 왔을 테고 청각에 잡혔을 터였다. 반면 따로 저격수를 배치했다면 지금 서있는 포지션이 저격 가능한 지점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유일하게 저격이 가능한 경로는 미국 놈이 막고 서있으니까.
미국 놈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이휘가 그 자리에서 앉으면서 뒤로 등허리를 눕혔다. 동시에 그를 따라오려던 총신이 어깨 위로 지나갔다. 순식간에 놈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며 소총이 들린 팔뚝을 두 손으로 휘감은 이휘가 어깨를 들어올리며 팔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우드득!
“억!”
짤막한 신음과 함께 놈이 발버둥치려 하는 순간, 이휘가 그대로 발등을 찍어버렸다.
퍼억!
“컥….”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놈의 육체가 멈칫한다. 이휘는 앞으로 나가면서 쪼그려 앉으며 놈을 매쳐버렸다.
콰당!
“커헉….”
놈이 자빠진 채 몸을 뒤틀었다. 막 잡아 올린 물고기 같았다.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한 이휘가 떨어진 소총을 쓸 듯이 주우며 놈의 면상을 겨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총을 빼앗아서 상황을 뒤바꾼 것이다.
“진정되면 일어나 봐. 다시 얘기하자.”
“….”
놈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놈은 어기적거리며 무릎 꿇고 앉더니 이휘를 올려다봤다.
“…젠장.”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는지 괴로운 표정이다. 그를 빤히 보던 이휘가 총구를 내렸다. 어차피 근접전으로 붙으면 이쪽이 필승이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CIA 요원들이 제아무리 고강도 훈련을 받는다 해도 실전에 대응하는 능력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패착은 이휘의 상황파악능력이나 대담성, 정확한 실력을 상상도 못했다는 거고.
이휘가 말했다.
“당신 소속부터. CIA지?”
“….”
“알겠어. 미 정부를 위해 국제적인 임무를 맡는 조직이라는 것 정도만 해두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우린 우리 나름대로 북측을 감시하고 있어. 대한민국 군사력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되나?”
“북한이 러시아 무기회사와 거래하고 있다는 건 우리 쪽에도 중요한 정보다.”
“그렇다고 해서 다 된 밥에 재 뿌리면 안 되지. 이런 식이면 수사에 혼선이 올 수 있어. 내분으로 우리만 자멸하게 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반복된 물음에 이휘가 대답했다.
“공조하지.”
“공조?”
“우리가 얻는 정보를 당신들과 공유하겠다. 단, 조건이 있어.”
“말해.”
“이번 건 관련해서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
“책임자를?”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딜이 생각났어.”
“우리가 너와 거래할 거라고 생각하나?”
“백 퍼센트.”
이휘는 씨익 웃었다.
CIA를 이용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이용하는가, 이용당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
“나를 보자고 했다던데.”
CIA 동부아시아 지부 소속 팀장은 냉철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백인 남자였다. 배가 나왔지만 체격이 좋았다.
“맞습니다. 공조를 제안했죠.”
“우린 당신네 도움이 필요 없소. 솔직히 말하지. 당신네가 가진 정보를 내놓고 꺼지시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전부야.”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휘는 `말이 통하게 만드는` 마법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지금 미국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내드린다면요?”
“뭐요?”
단박에 믿을 리가 없다.
이휘가 말했다.
“당신들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건들 중 가장 골치 아픈 사건의 핵심정보 몇 개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 같은 소릴 해야지. 당신이 우리보다 앞서있다는 거요?”
“아직은 아니지만 앞설 수 있죠. 제가 순식간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앞선 정보들 덕분입니다. 조사해보시면 아실 텐데요.”
“웃기는 소리!”
“정보부터 받아보고 말씀하시죠. EPA의 선임고문인 존 빌을 조사해보십시오.”
“…존 빌?”
누군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지금은 중국에 체류 중입니다. 본인 업무는 안 보고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에서 1급 기밀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EPA 측에서 따박따박 돈을 받고 인센티브까지 챙기며 여행을 하고 있죠. .CIA를 사칭하는 사기꾼입니다.”
“잡범이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잡범입니다. 잡히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같은 짓을 반복할 테고요.”
“정보가 약한데?”
“신뢰를 얻기 위해 공짜로 제공하는 정보입니다. 본격적인 정보교류를 하려면 서로 트레이드가 되어야 하죠. 그 사람을 조사해보시고 믿음이 생기면 그때 다시 얘기하시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이야기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범죄행위를 적발해낸다는 것은 다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알아맞히는 것만큼이나 기적 같은 일로 비춰질 터였다.
동부아시아 지부 팀장이 물었다.
“우리가 이 거래에 응할 것 같소?”
“세계 최고의 위조범 프랭크 에버그네일을 기억하십니까?”
프랭크 에버그네일.
17살 때부터 신분위조, 지폐위조 등 수 많은 사기행각을 벌였던 프랭크 에버그네일은 5년 간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가 21살 때 FBI가 검거했으나 그 후 프랭크는 연방정부를 돕는 조건으로 감형되며, 다른 사기범들을 색출했다. 심지어 미래에는 금융범죄 예방 및 문서보안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아 법률 공무원이나 FBI요원들을 지도하고, 수많은 곳에서 강의를 하고, TV에도 출연한다. 이휘는 그 점을 콕 짚어 말했다.
“프랭크의 경우만 봐도 사기범과 손잡고 사기범을 잡을 생각을 하는 게 당신네 나라 아닙니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저와 손잡지 못할 이유가 없죠. 저는 한국인이고, 심지어 기업가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 중 한 곳이고요. 컨트롤 할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을 발견했다면 묵혀두지 말고 쓰세요. 그게 팀장님 승진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