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81
나는 회귀했다 81
이휘를 돌려보낸 CIA 동부아시아 지부 소속 팀장 존 허드슨은 전화를 끊고 말했다.
“특이한 자로군.”
“…죄송합니다.”
이휘에게 사로잡혔던 요원이 말했다. 그러나 존 허드슨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사실이었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우리보다 앞선 정보를 쥐고 있다. 이후에 계속 그런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것도 허언은 아니겠지.”
“그럼 진짜로…?”
“그래. 중국에 CIA를 사칭하고 다니는 놈이 있다더군.”
“아…!”
“실력은 어떻던가?”
요원의 얼굴이 벌게졌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네가 당했겠지. 자네, 테스트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잖아?”
“한두 번 실전을 치른 솜씨가 아니었어요. 예전에 현역 델타포스 대원들과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치 그들을 보는 것처럼 노련했습니다. 상황판단, 대처, 실전기술까지요.”
“그래, 그것도 그건데….”
존 허드슨이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게 진짜 문제야.”
“머리요?”
“우리가 놈의 존재에 대해 드러난 부분만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자라는 반증이지. 내 직감에는 아직도 감춰진 부분이 많은 자다.”
“어쩌시렵니까?”
“일단 보고해야지.”
“그리고요?”
CIA 동부아시아 지부 팀장이면 이휘 정도는 자기 선에서 처분을 결정할 권한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잠시 침묵하던 존 허드슨은 요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내 선에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놈에 대해 알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젠장, 말년에 골치 아프게 됐군.”
***
이휘는 CIA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뒷수습이었다.
허름한 폐건물.
평범한 풍경이지만, 이 폐건물은 러시아 정부에서 제공해준 안가다.
철통같은 보안을 가진 곳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건물 안에 있는 이휘의 앞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포박에 재갈까지 문 채로 무릎 꿇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만날 줄 상상도 못했던 알렉세이를 보고 경악했고, 뒤따라 이휘가 들어오자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이휘가 물었다.
“성과는?”
“아직.”
알렉세이가 되물었다.
“CIA 놈들과는 어떻게 됐나?”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들은 아니었어.”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마라. 머릿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야.”
이휘도 잘 알고 있다. CIA는 철두철미한 조직이다. 무섭도록 차갑게 사고하고 판단한다.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세계 각지의 테러범, 마약범 등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걱정 마. 어렸을 때 007에서 보던 제임스 본드가 마냥 허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건 허구가 맞다. 아무리 쏴도 총알이 안 떨어지더군.”
“어쨌든, 그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는 소리지.”
“킬킬, 나도 알아. 장난 좀 쳐본 거다.”
“네가 장난도 쳐?”
“오늘은 기분이 좋거든.”
알렉세이가 으스스한 눈길로 잡혀온 북한 놈들을 쳐다봤다.
“이놈들은 내가 요리하고 싶은데….”
“아직 안 돼.”
이휘가 이어서 물었다.
“너한테 맡기면 반 죽여 놓을 거잖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반만 죽여? 이런 놈들은 그냥 죽어버릴 때까지 몰아붙인다는 각오로 심문을 해야 입을 열기 마련이다.”
역시 무식한 놈.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때가 어느 땐데 그런 무식한 방법을 써?”
“이놈들은 네가 자주 이용해 먹는 돈이나 뇌물이 통할 놈들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던 놈들과 똑같이 보면 곤란해. 협상이 통할 것 같나?”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이휘가 한 놈의 재갈을 풀었다. 놈은 바로 혀를 깨물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인상을 팍 쓰며 바락바락 외쳤다.
“내가 남쪽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네놈들 자본주의에 물들 것 같나?”
이휘는 그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빤히 그를 쳐다봤다. 그가 다시 소리치려 했다.
“나는….”
“니들도 알잖아.”
이휘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얼렸다.
“지금 못 죽는 이유가 뭐지? 자결해. 너 아니라도 다른 놈이 많이 남았으니까.”
“….”
“결국, 북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 때문 아닌가?”
“닥쳐라.”
“감시를 받고 있겠지.”
“헛소리.”
“너희가 이렇게 임무도 실패하고 잡혀버렸는데… 가족들을 가만히 놔둘까?”
“우리는 우리 의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럼 죽어봐.”
이휘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결하지 못한 채 이휘를 노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이휘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원하는 걸 주지.”
“뭐?”
놈이 눈을 부릅뜨다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수로?”
“방법은 많아.”
이휘가 알렉세이에게 물었다.
“백 팀장은?”
“몸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말하고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다.”
역시, 놀라운 인내력이다.
지장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필요하다.
“백성범 팀장을 좀 모셔와.”
“그러지.”
알렉세이가 나갔다.
재갈이 풀린 놈이 눈알을 굴리더니, 문이 닫히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서 이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깨로 이휘의 가슴을 겨냥한 채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휘에 대해 정말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다. 만약 실력의 10분의 1만 알았더라도 이런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로 막았다.
콰앙!
백성범 팀장한테는 쪽도 못 쓰던 놈이었지만 온 몸이 근육질이라 파괴력이 무시무시했다. 의자가 튕겨져 날아가는 동시에 놈이 박치기를 하려 했으나 이휘는 손을 뻗어 목 줄기를 움켜쥐었다.
“컥!”
그 다음 발로 놈의 무릎을 한 대 갈겼다.
우득!
뼈가 부러지며 놈이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놈을 지나치듯 움직이며 뒤로 돌아간 팔을 잡아 뽑았다.
우드득!
“커헉!”
놈이 뒤로 나뒹굴며 버둥거렸다. 어깨가 탈구된 것이다. 순식간에 한 팔과 한쪽 다리뼈가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 이휘가 다른 북한 놈들을 바라봤다.
“또 포박 푼 놈?”
“….”
그들의 낯빛에 절망감이 스쳤다. 한 줄기 기대감을 품었는데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포박 일부를 풀었던 대장이 가장 만만해 보이는 놈한테 순식간에 당했으니, 희망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알렉세이는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새 또 뭔 일이야?”
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성범은 짧게 눈을 빛냈다.
“…평범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말에 가시가 있다. `이런 실전적인 관절기를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묻는 듯한 표정. 하지만 이휘는 대답해 줄 말이 없어서 둘러댔다.
“어렸을 때 우연히 배웠습니다.”
“거짓말을 하시려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편이 낫습니다. 저는 명령을 받았고, 명령을 수행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요.”
이휘는 조금 머쓱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귀신같은 양반.
나름 숨긴다고 숨기며 상대했는데 쓰러진 자의 모습만 보고도 자신의 수법과 실력을 간파한 모양이다.
백성범이 물었다.
“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아, 그래야죠.”
이휘가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이놈들 모두 백 팀장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직접 상대해봤으니… 백 팀장님이 전원 다 몰살시킬 수 있었다는 것도 알 테고요.”
백성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이휘가 말했다.
“북한에 알마즈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공장을 통해 이번에 국정원 북파요원들을 빼돌렸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북한에 매수된 상태였지만, 이번 건을 통해 우리가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알마즈는 러시아 정부가 손에 쥔 무기회사이니 북한이 함부로 할 수 없고요. 말하자면 북한 내 치외법권인 셈이죠.”
백성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군요.”
“북한에 가서 몇 가지 일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저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곧 지시가 내려올 겁니다. 이미 얘기 끝났거든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여기 있는 북한 간첩들의 가족들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인력은 실력 있는 용병들로 충분히 붙여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몇 명이 있어도 북한 내에서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백성범은 어떤 의구심이나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지시 한마디에 인연이 전혀 없는 이휘를 위해 목숨을 건다니.
이휘는 전생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일이었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결코 백성범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보가 샐 위험은 적습니다. 이 자들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백 팀장님을 고발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해줘야겠죠.”
드디어 이휘의 의도가 밝혀지자, 재갈을 물고 있는 북한 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쓰러져서 끙끙거리던 놈이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더니 이휘를 쳐다봤다. 이마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서 그런지 흙투성이었다. 하긴, 뭐가 대수겠나. 이들 모두 여기저기 다친 상태다.
“차라리, 차라리 우리 가족들을 빼내주시오.”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이렇게 된 것, 이제 부탁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당신들의 효용가치가 사라져. 당신들 가족이 도망치면 북측에서 배신한 걸 알아챌 테니까. 당신들은 동료를 잃고 보고하기 위해 달아난 거야. 문책은 기꺼이 받겠다고 해.”
“아마 새로운 책임자가 내려올 거요.”
“그 자는 우리가 처리하지.”
“의심 사는 건 시간문젭니다. 그러면 우리 가족들을 가만히 놔둘 리 없어요.”
“…믿음도 줘야겠지.”
“…?”
그런 게 가능한지 믿지 못하는 표정이다. 이휘가 보기에도 북한은 이들이 확실한 정보를 가져가지 않는 이상 이들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CIA 내부 정보를 주지.”
“뭣!”
다른 이들도 화들짝 놀랐다. 재밌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던 알렉세이마저도 벽에서 등을 떼며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백성범도 물었다.
“이것도 상부와 상의된 내용이오?”
“한 명씩 물어봐줬으면 좋겠는데.”
이휘가 말을 이었다.
“먼저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된 사항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는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백성범이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얘길 다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CIA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방대한 정보들이 있어요. 북한이 아무리 많은 정보를 쥔다 해도 미국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바보들이 아니에요. 액션을 취하는 게 고작이지, 놈들은 생존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철저히 권력자들에 의한 체제기 때문에 체제가 무너지길 죽기보다 싫어할 테니까요. 자기들, 대대손손 호사를 누릴 자기 후손들을 생각해서 생존을 위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 사견을 말씀드리자면 미국이 우방이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을 자극하는 게 됩니다. 한국이 위험해질 겁니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만 따르세요. 제가 원하는 것도 딱 거기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백 팀장님이 있는 곳에서 이런 계획을 공개하는 것은 유사시 모든 정황을 알고 있어야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단지 그뿐입니다.”
“…상부에 보고할 겁니다.”
“그러세요, 그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휘가 덧붙였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
이휘가 너무 갑작스러운 폭탄발언에 휘말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간첩 대장을 노려봤다.
“이 정도면 북한 지도부의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겠지?”
“물론…”
놈은 대답하면서도 `그렇게 하면 너희가 곤란하지 않겠냐?`는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칼을 겨누던 사이에 걱정하는 멘트도 웃기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휘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신 당신이 알게 되는 모든 정보를 우리와 공유해야 할 거야. 그렇게 하는 이상 북측에 있는 가족들은 안전하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들 가족을 남쪽으로 보내주지.”
“그, 그게 사실인가?”
눈빛에 격정이 깃든다.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만 보면 당신들도 전부 한국 국민이잖아? 하루 빨리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우리 계획에 최선을 다해 동참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