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82
나는 회귀했다 82
안가를 빠져 나온 이휘는 알렉세이에게 지시했다.
“저놈들은 먼저 보내줘. 우리와 동선이 겹치면 의심받기 쉬우니까.”
“알겠다.”
“그리고….”
“…?”
“알렉세이, 넌 당분간 여기 남아.”
“내가?”
“그래. 이번에 네가 일 처리하는 걸 보고 생각보다 더 큰 일을 맡겨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음.”
알렉세이는 감동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휘가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 풀진 말고.”
어깨를 툭 친 이휘가 차로 가려는 순간 알렉세이의 굵직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고맙다.”
“…?”
이휘가 돌아보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조국에 떳떳하게 돌아오게 해줘서. 나는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으로 키워졌지만, 정작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당신 조국을 위한 일이 아니야.”
이휘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과 내 조국이 같지도 않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끝까지 신념을 지킬 거다.”
“내가 당신 조국에 해가 된다면?”
“우선은 너야. 이휘. 너는 나와 가족들의 은인이다. 너는 날 소모품으로 대하지 않고, 나도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니야. 내것부터 지키고 나라를 생각한다. 네가 러시아에 해를 끼친다면 나는 말리겠지만, 말릴 수 없다면 널 믿을 거다.”
빈말이 아니란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느껴졌다.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 이휘가 피식 웃었다. 미녀를 보면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감동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점점 더 많은 일을 맡을 수 있을 거야. 음지보다는 양지에서 `우리`를 위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거야.”
“다들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평생 군인으로 산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 그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할 수 없으니.
알렉세이가 말을 이었다.
“아니, 욕심을 버린 지 오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욕심이 없으니 지금도 충분히 만족해. 만족이 곧 행복이지. 내가 널 따르는 건 즐겁기 때문이야.”
“위험한 일을 해도?”
“성취감이 있다. 전우애도 느끼고. 이렇게 깊은 감정은 회사생활로는 충족이 되지 않지.”
맞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전쟁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휘가 쓰게 웃었다.
“알마즈는 믿고 맡길게.”
“그래.”
이휘는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알란, 뒷좌석에 백성범이 타고 있었다.
안가에서 출발하자 이휘가 백미러로 백성범을 보며 물었다.
“생각 좀 했어요?”
“했습니다.”
“결론은 여전히 보고하는 걸로?”
“이미 보고했습니다.”
“이상한데요? 그럼 전화가 와야 하는데.”
“CIA 정보를 북측에 넘기겠다는 것만 빼고 전했습니다.”
이휘가 눈을 살짝 치켜떴다. 당연히 백성범이 보고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 융통성 있는 양반이 아닌데.
이게 무슨 조화지?
“왜 그러셨습니까?”
“지금껏 그쪽이 한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더군요.”
“제가 한 일이요?”
“괜히 내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그쪽이 한국 정부를 등진다면? 문제가 커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요. 위에서 내려온 명령만 수행할 겁니다.”
“그런 생각도 합니까?”
“저는 군인이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위에서 날 제거하라고 하면 바로 이행하시겠군.”
“물론입니다.”
이휘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비상식적인 행보를 걷다 보니 누구보다 고지식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의 태도까지 변하고 있었다.
“중간에서 헤어집시다.”
***
백성범은 이휘와 함께하며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이휘 자체에 대한 것은 잘 모르지만, 그가 하는 일은 한국 정부나 UDU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이었다. 특히 미 정보기관 CIA와 북한, 양측 정보를 두 손에 나눠 쥐고 흥정을 할 때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왜 입대했으며, 목숨 걸고 고된 훈련을 마쳤던가? 그리고 왜 임무를 수행하는가? 이 나라를 위해서다. 그냥 제 3자로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직접 바꾸기 위해 UDU에 들어간 것이다. 한데 이휘는 정보전을 펼치며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이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위화감이 든다. 극도의 공포심이었다. 만약 이휘가 이리 큰 힘을 쥐고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땐 어떻게 막아야 할까!
백성범은 권력이 반드시 썩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누구도 오랫동안 권력을 쥐면 안 된다는 주의였다. 사람이란 원래 권력을 가지면 없던 욕심도 생긴다.
실은, 그래서 모든 것을 보고했다.
돌아온 대답은 `지켜보라`는 것이다.
북한 파견 임무로 신뢰를 쌓고 이휘와 관계를 유지하라는 지시였다.
자신을 믿고 이휘가 무슨 일을 진행하면 그 정보를 공유하라고 할 심산인 것 같았다.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
백성범이 뭐라 제동을 걸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에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는 별 성과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휘가 굳이 더 캐묻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자는 나를 믿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거다.’
백성범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계처럼 지시 받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신 같은 부품의 운명이라지만 정말 강한 적을 만나면 긴장되기 마련이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에.
***
간첩들을 풀어주고, 백성범을 북한으로 보내고, 알렉세이에게 러시아 무기회사 알마즈와 관련된 일들을 맡긴 이휘는 알란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1등석이었기에 특별한 불편함은 없었다. 한 사람이 옆좌석에 와서 앉기 전까지는.
“또 보는군요.”
이휘에게 잡혔던 CIA 요원이다.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여기 있습니까?”
“우린 동부아시아 지부에요. 한국에서도 일을 봅니다. 아, 불법적인 첩보활동은 아니니 오해하지 맙시다.”
“굳이 옆자리에 앉은 건?”
“우연입니다, 우연. 어차피 바로 옆도 아닌데 너무 그렇게 까칠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1등석 사이의 간격은 넓다. 하지만 이휘는 감시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까지 맞춘 우연이라니 것 참 기막힌 우연이네요. 저번에 당한 걸로는 부족했습니까?”
“무슨 그런 살벌한 말씀을.”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느끼기에는 내 뒤통수에 총을 겨눈 사람입니다.”
“앞으론 그런 일 없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겨누게 될 지도 모르죠.”
“글쎄, 감시가 아니라 연락책 정도로만 생각해 두십시오.”
“연락은 따로 하면 되는 거고. 지금 세상에 인편이 웬 말입니까? 미국 수사기관이면 보안도 최고일 텐데.”
“….”
CIA요원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
이휘는 잠깐 이마가 지끈거렸다. 당장에 멱살을 잡고 이 비행기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떠 있을 때 떨어뜨려도 좋고. CIA가 이렇게 밀착해버리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다. 하지만 생각만 할 뿐, 아무리 이휘라 해도 CIA를 건드릴 수는 없다. 오늘부터 무장 테러집단으로 전향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모를까.
그 순간 기분 좋은 향기와 함께 두 사람 좌석 사이 복도를 지나쳤다.
어딘가 익숙한….
‘설마.’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향기를 뿌리고 다니는 사람.
얼굴도 그 향기만큼이나 특별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휘는 소름이 끼쳤다. 안 그래도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될 처지에, 뜬금없는 불청객이 한 명 더 추가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이휘의 생각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앞자리에 앉은 소녀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선그라스를 벗으니 더욱 확실해졌다. 실눈을 뜨고 잠든 척 위장하고 있던 CIA요원이 자기도 모르게 뒤척일 만큼 충격적인 비주얼.
“제가 얘기했죠?”
“….”
“러시아에 올 일이 있으면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자고.”
“그렇게 말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얘기했어요.”
“약속했습니까?”
“저는 했다고 생각해요.”
“후우.”
“귀찮게 안 할게요.”
“저를 따라왔을 리는 없고. 비행기는 왜 탄 겁니까?”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요? 출국 시간도, 좌석도 맞췄는데.”
“대통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맞아요.”
러시아 대통령의 딸, 나타샤가 풋사과 향기가 날 것 같은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깊게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슬쩍 CIA요원을 쳐다본 그녀가 의자 뒤로 사라져버렸다.
이휘는 굳이 그녀를 쫓아가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 때가 되면 알게 될 일이다. 그보다 그녀의 눈치에 놀랐다. 이 자리에 있는 CIA요원을 의식하다니. 소속까지 알아채진 못했겠지만 고단수다.
‘이 정도면 CIA가 아니라 동네 북 아니야?’
그때 알란이 어깨를 어깨로 툭 밀며 씨익 웃었다.
“뭐에요?”
이휘가 묻자 그가 대뜸 되물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린애에요.”
“어린애는요. 보스도 어리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양반이 안 될 소릴. 이휘의 진짜 나이를 알면 식겁하겠지만 그렇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쉬어둬요. 한국에 도착하면 할 일이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비행이 시작되고 정작 이휘는 한 숨도 못 잤다. 옆에는 CIA요원, 앞에는 나타샤가 있으니 100만 대군한테 포위된 느낌이다. 적한테 어딜 끌려 갈 때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잠을 청하는 자신인데.
‘아니지. 나타샤 때문이야.’
CIA요원은 문제가 안 된다. 당장에 무슨 수작을 부릴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나타샤는 아니다.
‘경호원 한 명 없이, 어쩐 일이지?’
새삼 궁금해진다. 자세하게 물어볼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리 존재가 노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러시아 대통령 영애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아직도 러시아는 다른 소련권 나라들과 이런저런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타샤가 다시 얼굴을 쏙 내밀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봐요.”
“당신은 사업가죠?”
“사업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대외적으론 그렇게 말하기도 하죠.”
“그럼 사업에 대해 잘 알아요?”
“그런 건 왜 묻는 겁니까?”
“저 사업해보려구요.”
“….?”
이휘의 표정이 굳었다.
“사업하려고 한국에 온다고요? 러시아에서도 할 수 있는데? 미국도 아니고 한국을?”
“네. 아버지한테 제 포부를 말씀드렸거든요. 러시아에서 공주님처럼 뭔가 할 게 아니라 외화를 벌고 싶다고. 마침 한국은 우리 쪽과 거래도 하고 있고요. 당신도 있어서 아버지가 그나마 좀 안심이 되시나 봐요. 한국은 치안도 좋다면서요?”
치안이야 확실히 세계 정상급이다. 미국만 가도 따뜻한 지방에는 노숙자들이 발에 채일 만큼 많으니까. 한 눈만 팔아도 물건을 털리고. 차 안에 물건 놔두면 유리창도 깨는 나라들이 수두룩이다.
“네, 뭐….”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외국인한테는, 뭐.”
“제가 가는 게 싫어요?”
크고 맑은 눈빛. 그저 순진한 꼬맹이는 아니란 것쯤은 안다. 머리가 비상하고 통찰력도 있는 아이라는 것도. 하지만 사업은 다른 이야기다.
“무슨 사업을 할 생각입니까?”
푸른 눈동자에 장난기가 감도나 싶더니,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