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83
나는 회귀했다 83
“미디어요.”
“미디어?”
“네. OTT.”
“OTT?”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인수한 구글, 넷플릭스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하겠다는 거다. 이건 너무 뜬금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타샤는 자기 나름대로 명분을 갖다 붙였다.
“한국은 미디어 강국이잖아요.”
“누가 그래요?”
“저도 조사했어요. 드라마, 영화. 아시아에서 가장 장래성이 밝은 나라예요.”
이것 봐라?
이휘가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뚱했던 표정에 활기가 돈다.
“일본도 있는데?”
“일본인들이 창의적인가요?”
“허구헌날 참고 살아서 창의력이 폭발합니다.”
나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앙증맞다.
“무슨 소리에요? 뭘 참아요?”
“사람들 자체가 그래요. 속내를 안 드러냅니다. 그래서 과장된 리액션을 하고. 거기서 창의력이 나오는 거죠. 만화나 에니매이션 쪽 사업이 잘 되거든요.”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일본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스포츠, 문화산업에 장려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은? 일제, 군사정권… 그렇게 억압을 당하며 살았지만, 한 번도 굴복하지 않았어요. 역사에 맞섰죠. 문인들조차 무기 대신 펜대를 잡고 싸웠어요. 그게 창작이에요. 전투적인 문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아지려는 움직임. 그게 얼마 전 외환위기를 극복할 원동력이 됐고, 아마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는다면 일본을 앞지를 수 있을 거예요.”
“생각보다 많이 아네요.”
“기본이죠. 워낙 책도 좋아하고. 하지만 제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데이터니까, 겪어보려고요.”
똑똑한 여자애네.
대화하는 재미가 있어서, 이휘는 조금이라도 자두려던 생각이 싹 달아났다.
“우리나라를 굉장히 좋게 봐주는 건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왜 하필 미디어입니까? 다른 사업도 많을 텐데.”
“제 얘기 하나도 안 들었어요?”
“창의력이 꼭 미디어 산업에만 필요한 건 아닙니다만.”
“그건 그렇죠. 하지만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뭔가를 한다면, 면적과 인구에 영향받지 않는 분야가 가장 비전이 있지 않을까요?”
“합격.”
“네? 뭐가요?”
“그냥 창업할 겁니까?”
나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저더러 밑에서 일하라는 건 아니죠?”
“왜요? 정답인데?”
“저 누구 밑에서 일해본 적 없어요.”
당연하다. 러시아 대통령 영애가 누구 밑에서 일을 해봤으려고. 하지만 이휘는 씨익 웃었다.
“아마 앞으로도 누구 밑에서 일 못 할 겁니다.”
“어라? 무슨 꿍꿍이에요?”
“그러니까 제 밑에서 일하라는 겁니다. 시장조사 끝날 때까지만 용병 식으로. 돈 잘 주고 간섭 안 합니다. 저 같은 보스는 없어요.”
“어쨌든 본인이 보스 하겠다는 거잖아요?”
“싫습니까?”
“아뇨.”
나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너무 쉬우면 남자들이 별 매력을 못 느낀다던데, 어쩔 수 없네.”
혀를 쏙 내미는 모습을 보며 이휘가 멀뚱멀뚱하게 쳐다봤다.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겁니까? 나이답지 않게.”
“저 책 많이 읽는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오빠도 나이답지 않거든요? 진짜 나이답지 않으신 분이 저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풋.”
이휘가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추측이 있어요.”
“무슨 추측?”
나타샤가 호기심을 보였다.
이휘가 계속했다.
“첫째, 한국의 미디어 산업에 뛰어들려는 이유는 다시 한번 지난번 같은 미디어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가 그렇게 순진해 보여요? 이제 시작해도 오라버니를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거든요.”
“그 정도도 생각 못할 동생이 아니지. 얼마나 영리한데. 그 정도는 인정합니다. 업계에 발을 담가두면 상대가 물밑에서 뭔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미디어를 택한 것 아닙니까?”
“노 코멘트 할게요.”
“반대로 내가 미디어로 찔렀을 때 반응이 온 걸 보면 귀국의 가장 허술한 부분이 그쪽인 것 같기도 하고. 보안이 철저한 장점과 비례하는 단점이랄까. 말하자면 빛과 그늘의 양면성. 아닙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귀엽게 시치미를 뗀다.
피식 웃은 이휘가 말했다.
“굳이 외국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건 러시아의 장점을 그대로 둔 채 단점을 해결하려는 걸로 보이고. `평생 아버지의 딸로 살다가 제 인생을 찾으려고 무작정 뛰쳐나온 철부지 공주님`으로 보여지려는 위장전술 같기도 하고.”
“제가 철부지가 아니라고 확신하네요?”
“철부지가 그런 용기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데?”
“무식 쪽은 아닌 것 같고.”
“철딱서니가 없어도 용감하고요.”
“그건 철딱서니가 없는 게 아니라 성격이 그냥 그런 겁니다.”
“본인 얘기죠?”
이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노 코멘트. 어쨌든 내 밑에서 일을 배우는 것은 승낙한 겁니까?”
“맞아요.”
“이제 가보세요. 한국에서 봅시다.”
이휘가 눈을 감아버리자 나타샤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의자 뒤로 사라졌다.
“다 왔거든요.”
***
‘미친 듯이 부럽군. 저런 미녀를 얻다니. 나도 10년만 젊었어도 도전해 봤을 텐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CIA요원은 불쑥 상대가 이휘라는 생각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상대가 되어야지 꿈이라도 꿀 텐데 자기가 10년 아니라 15년이 젊었어도 이휘의 상대는 안 될 것 같았다. 이휘가 어떤 인간이든 이미 포브스에서 집중하는 사나이니까.
‘거물이야, 거물.’
CIA에서 일하면서 거물들을 여럿 접했다. 대부분 범법자들이지만 `거물`은 다르다.
세상 모든 종류의 거물들은 남들은 못 따라가는 자신들만의 확고한 뭔가가 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쁜 쪽으로 발전하면 범법자가 되고 좋은 쪽으로 발전하면 양지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불쑥, `러시아`라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여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내용을 들으니 이휘 못지않은 거물과 연관된 여자인 것 같다.
하긴, 저런 미모를 가진 여자가 평범한 성격을 가졌다면 다른 나라도 아닌 러시아에서 멀쩡할 리 없다. 죽었거나 유명세를 탔겠지.
CIA요원은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소름이 좍 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는 힐끔 눈알을 굴려 이휘를 보다가 확신하고 말았다. 갈수록 확신은 강해졌다.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거야.’
저 여자도 나름대로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것부터 영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휘는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자신에게 청부를 하고 있었다. CIA를 통해 여자를 감시하라고.
‘하. 놀아나 줘야 하나?’
맙소사, CIA를 부려먹어서 저 여자의 움직임을 손바닥 안에 두려 하다니.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러시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확실해진 것 둘.
‘애인은 아니었어.’
그리고 그 애인으로, 자신은 가망이 없다는 거다.
***
이휘는 비행기에서 내렸다. 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나타샤랑 열띤 토론을 벌인 후유증인 듯했다. 제법 얼굴이 알려졌기에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샤한테 야구모자를 푹 눌러씌웠다.
동의 없는 행동에 나타샤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해요?”
챙 때문에 조막만한 얼굴이 안 보인다, 서로. 덕분에 이휘는 순간 설렐 뻔한 느낌을 지우며 말할 수 있었다.
“그 얼굴로 공항에서 돌아다니면 내일 인터넷에 뜰 겁니다.”
“그래서요?”
“예?”
“저 회사 할 건데 홍보효과도 누리고 좋죠, 뭐.”
제정신인가?
그럴 거면 러시아 대통령이 왜 숨겼겠나?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나타샤가 피식 웃었다.
“장난이에요. 모자 감사.”
“갑시다.”
이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떠밀며 여객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공항 게이트를 나설 때쯤 뒤에서 은근히 따라붙는 CIA요원의 위치를 확인한 뒤 나타샤의 허리를 슬쩍 감았다.
“아?”
살짝 벌어진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검지를 입술에 붙인 이휘가 인파 속으로 섞였다. 나타샤는 겁내는 표정이 아니라, 얼굴이 새빨갰다.
두리번거리고 있는 CIA요원과 멀어지자 이휘가 속삭였다.
“더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왠일인지 허둥거리는 게, 설마.
이휘는 그 이유를 찾고는 충격을 받았다.
“허리 감은 것 때문에?”
“…알면 빨리 놔줄래요?”
이휘는 피식 웃었다. 이게 뭐라고? 어린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놀리고 싶고 짓궂어진다.
“싫은데.”
“빨리요. 저격수가 머리를 쏠 지도 몰라요.”
그말에 이휘의 표정이 굳었다. 허리에 둘은 팔을 빼며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풋` 웃음을 터뜨린 나타샤가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겁니까?”
“사업하려면 거짓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던데.”
“그 책은 읽지 마요.”
“왜요?”
순진무구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요물이다. 역시 여자는 어려도 여자구나.
이휘가 고개를 저었다.
“사업은 진실성이니까.”
“하하하.”
그녀가 맑게 웃자 이휘가 물었다.
“뭐가 웃깁니까?”
“그냥요. 진실하게 블라디미르 총리를 잡으셨나 싶어서….”
“진실하게 잡았습니다.”
“제가 다 들었는데요. 기가 막힌 함정을 파셨다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숨긴 겁니다. 그리고 사업도 아니었고.”
“알겠어요. 거짓말 하지 않기. 앞으로 많이 가르쳐주세요, 보스.”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도 이휘는 그녀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 나갔다.
먼저 나간 알란이 밖에서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휘가 게이트를 나서기 전에 먼저 나와서 공항 상황을 파악한 뒤였다. 경호원이니, 경호원의 임무를 하는 거다. 뭐, 말도 없이 사라져주는 것이 전과 달라서 뭔가 자리를 비켜준 느낌이긴 했지만.
알란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잠깐 고민하던 이휘가 말했다.
“청와대로.”
“거긴 왜요?”
물은 것은 나타샤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 사업하려면 이것저것 걸리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그럼 대사관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과정은 간결할수록 좋으니까.”
이휘가 알란에게 말했다.
“갑시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나타샤는 알란이 아무렇지 않게 시동을 거는 것을 보며 입을 닫았다. 이휘가 러시아에서도 크렘린 궁을 드나들 만큼 귀빈인 것은 맞지만, 설마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청와대에 부탁할 정도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나보다 더 힘이 센 것 같네.’
러시아에서 러시아 대통령의 영애라면 정말 대통령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빼곤 대부분 할 수 있다. 대통령한테만 허락 맡으면 모든 게 가능해지니까.
그렇다 해도 외국에서 온 친구를 무슨 대사관 데려가는 것 마냥 크렘린궁으로 데려가진 못한다. 나타샤는 어째 자신이 본 이휘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