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86
나는 회귀했다 86
“무슨 생각?”
이휘는 대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차례 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도착했나?
“도착했어.”
짧게 대답한 이휘가 말했다.
“준비해줄 게 있어.”
-이러려고 날 두고 간 거냐?
상대, 알렉세이가 툴툴댔다. 그러나 곧장 들려온 대답은 협조적이다.
-얘기해봐.
“북한에 있는 우리 공장에 파견할 감사팀을 만들어 줘. 시기상 적절하니까 경영진에서도 큰 반대가 있진 않을 거야.”
이휘는 알마즈의 간부들을 서서히 물갈이할 예정이었지만 아직은 회사 운영을 위해 남겨둬야 했다. 따라서 알마즈를 인수한 곳이 어딘지 경영진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저 러시아 정부 지시로 처리한 것이다.
러시아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내, 알렉세이가 대답했다.
-날 정부에서 보낸 줄 알아. 반대할 만큼 간덩이 큰 놈이 있을 턱이 없지. 이놈들, 얼마나 웃긴 줄 알아? 당장에라도 제 목이 떨어질까 내 눈만 마주쳐도 눈치 보기 바쁘다.
…이 역시 얼마 전까지 정권을 휘둘렀던 블라디미르가 이룬 성과였다. 블라디미르는 비명에 갔지만 아직도 그가 자행했던 폭력의 잔재는 남아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이휘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근데 감사팀은 뭐하려고?
알렉세이가 묻자 이휘가 대답했다.
“때가 되면 북한 내부에서 작전을 수행할 거야.”
-….
잠시 침묵하던 알렉세이가 물었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 적진 한가운데서 작전을 수행하는 건 미친 짓이야.
이휘도 알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그냥 적진 한가운데도 아니고, 어설픈 테러집단도 아니다. 자칫하다가 고립되는 순간 한 국가의 군사력 전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100퍼센트 죽는다. 하지만 이휘는 이런 작전을 여러 번 해왔다. 북한을 상대한 적은 없지만, 미국이나 다른 세계 강국을 상대로 만만찮은 보안과 군사력을 갖춘 테러집단을 소수 병력으로 해체시킨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야 한다. 이런 임무는 그가 본 요원 중 최고인 백성범 팀장조차 아직 경험한 적이 없을 테니까. 알렉세이 말처럼 죽을 확률이 100퍼센트인 임무. 작전 성공률 100퍼센트가 아니라면 진즉 죽었을 이휘이기에, 자신의 성공률로 사망률을 깨볼 작정이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필요해. 러시아 최고의 요원들로.”
-미친….
씨알도 안 먹히는 걸 깨달은 알렉세이가 이어서 중얼거렸다.
-…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만두겠다는 말 같진 않다. 죽음을 예감한다는 뜻이다. 이번만큼은 평소 알렉세이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휘가 대답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전혀 믿음은 안 가지만 믿어보지. 항상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으니까.
“준비에 집중해줘. 정부와 협력해도 좋아.”
-이번 작전에 실패하면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그쪽 정부에서 임해주겠나?
“물론.”
이휘가 슬쩍 나타샤를 쳐다봤다. 나타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신을 이 자리에 둔 건지 알 것 같았다. 왜 호의를 베풀었는지도.
“무리한 부탁인 건 알죠?”
“나타샤의 부탁이라면 대통령님도 들어줄 겁니다.”
“아버지는 정에 휘둘리실 분이 아니에요.”
“나타샤가 옳은 말을 하는 걸 아실 테니까. 게다가 저와 대통령님이 지금껏 쌓은 신뢰도 있고요.”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타샤는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어차피 발각당해도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만 죽어나가지, 우리 정부에선 잡아 뗄 거예요. 북한이 우릴 추궁할 수 있을까요? 아뇨.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도 버거운데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리면 북한은 진퇴양난이니까.”
-이 여자 누구야?
알렉세이의 물음에 이휘 대신, 나타샤가 다시 새초롬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요?”
-알렉세이다.
“알렉세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러시아에서 만났으면 당신은 나한테 경례를 올렸어야 할 거예요.”
-…뭐, 고위관료나 그런 건가?
“내 목소리가 그렇게 늙었어요?”
-…..
알렉세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치 회피하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 어쨌든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위험한 작전이야. 러시아 정부쪽에 미리 말해두면 내가 한 번 얘기해서 요청해보지. 아마 미국에서 불러와야 할 거야.
모르긴 몰라도 맞는 말을 거다. 알렉세이 또한 스패츠나츠 출신 부대원이었으니까. 특수부대 간에는 일반인이 아는 것 이상의 정보가 공유되는 편이다. 특히 작전을 수행할 때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미국 요원들과 공조한 적 있나?”
-귀신같은 놈들이야. 전문가 중의 전문가지. 꿈에서라도 그놈들과 싸우는 건 마다하고 싶다.
“그 정도야?”
이휘는 미심쩍게 물었다. 전생에서 자신이 수많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미국에 상주하는 러시아 첩보원들을 만나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래.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진 않지만 소수로 CIA와 정보전을 펼치고, 미국을 내부적으로 전복시키는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면 그놈들이 주축이 될 거야. 그 전까진 나설 리 없지.
“그런 자들을 부를 수 있을까?”
-그건 네가 대통령과 얼마나 친한지, 그리고 대통령이 얼만큼 영향력을 회복했는지가 중요하겠지. 블라디미르 총리도 섣불리 포섭하려 들지 않았던 놈들이니 까다롭긴 해.
“참고하지.”
이휘는 전화를 끊고 나타샤를 쳐다봤다.
“또 왜요?”
“한국에서 진행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작전에 성공하면 북한까지도 가장 먼저 진출할 수 있게 우선권을 약속하죠.”
“부탁은 해보겠지만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제가 소극적으로 도우면, 어쩌면 이 미친 작전을 포기할 지도 모르죠.”
“제가 포기할 것 같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되물은 이휘가 덧붙였다.
“제가 죽을 확률만 늘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죽으면 누가 돕습니까? 한국에서의 사업.”
“무슨 제가 여기 목숨 건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에요. 게다가 오라버니께서 비명에 가시면 우리를 위협할 힘을 가진 사람도 사라지는 셈이죠.”
“그만큼 대통령님을 도울 사람도 같이 잃는 겁니다. 블라디미르 총리가 그렇게 됐다 해도 누군가는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심지어 구 소련권 나라들과도 정리해야 할 앙금이 남아있는 걸로 아는데… 어떤 일이 벌어져도 외부에 든든한 우군이 있다면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아.”
한숨을 내쉰 나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못 당하겠네. 부탁해볼게요.”
“정말로요?”
“대신 직접 가진 마세요. 어떤 사업가가 직접 총을 들고 움직여요? 갱스터도 아니고.”
이휘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근본은 갱스터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군인이 아니니 그 편이 더 가까운 표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가장 잘 하는 일이 이쪽 일인데.
이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의 근본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리고 제가 상대하는 자들도… 난 그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뿐이에요.”
“…거친 자들을 주로 상대하긴 하네요.”
“그런 자들이 부귀영화를 휩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소수일 뿐이고 언젠간 화를 면치 못하겠지만, 그때까지 너무 많은 피해를 끼치고 살아요.”
“제가 지금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히어로랑 얘기하고 있는 건가요?”
“글쎄요.”
이휘는 피식 웃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히어로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걸 탈피하기 위해 노력도 해보고. 이휘는 어떤 의미로는 `특별한` 삶을 살았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일했다. `악`이라고 말하는 테러범을 상대하고, 범죄자들을 잡아넣었다. 그 같은 일을 목숨 걸고 해왔는데 사명감이 없을까?
어쩌면 히어로의 삶을 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할 수 있는 일들에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고.
“어쨌든, 제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방금 통화한 알렉세이도 최고의 실력자지만 실패를 예견했거든요. 성공에 대한 밑그림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면, 이 작전은 무조건 실패합니다.”
나타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우, 몰라.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우리가 뭐 사랑하는 사이, 그런 것도 아니고.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깊어졌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지혜로움. 혹은 현명함.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휘는 알 것도 같았다.
‘다행이야.’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소녀의 호감을 이용하고 싶진 않지만, 아마 그녀는 이휘를 살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의 두뇌회로는 방향을 정확히 틀어서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방준수나 하진성은 아무 소리 못 내고 지켜볼 뿐이었다. 이휘가 데려온 아름다운 소녀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 대충 눈치 챘고,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도 마쳤기에.
지켜보던 알란 역시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도, 겉옷 위로 품속의 차가운 쇳덩이를 만졌다. 총. 그 역시 이번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아마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할 것 같았다.
***
이휘는 이번 작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총력을 기울여도 될까 말까한 작전이다. 빈틈이 없어야 한다. 두뇌를 최대로 가동해서, 그것만으로 해결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유사시에는 사활을 걸고 몸을 써야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런 상황까지 벌어지면 생존률은 정말 0퍼센트에 가까워진 후일 터였다.
비행기 안에서, 알란과 나란히 앉은 이휘가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묻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인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얘기해요.”
“PMC 용병들을 데려가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적인 감정 때문인지, 그들의 실력을 우려해서인지요.”
“당연히 사적인 걱정도 있지만….”
이휘가 덧붙였다.
“근본적인 이유는 실력부족입니다. 이번 작전은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안 돼요. 대원 한 둘 잃는다고 만회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 전원 몰살입니다.”
“저와 알렉세이는 참가시키셨는데, 저희와 그들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전 감각.”
이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살육의 현장에 있어봤던 부류에요. 아닙니까?”
두 눈이 강렬하게 빛난다. 확신 어린 눈빛. 그를 마주보던 알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의문이 해소됐습니다. 어떻게 겉만 보고 그런 걸 들여다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대표님을 보면서 비슷한 직감을 받습니다. 그럴 리 없지만 저나 알렉세이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현장을 겪으셨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확신이 들거든요. 이번 작전을 무사히 마치면 비밀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가로요?”
“아뇨. 부탁입니다.”
“안 돼요.”
이휘가 씨익 웃었다. 말해도 어차피 못 믿겠지만, 믿는다 해도 얻을 게 없다.
모르는 편이 낫다.
그 정도 여지는 남겨둬야 존경과 두려움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다.
“대신, 이번 일을 잘 마친다면 알란에게 더 큰 선물을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