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94
나는 회귀했다 94
김정판이 데려온 대대 병력은 움직이지 못했다. 저들의 위대한 수령이 잡혔는데 공격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독재체제란 이래서 모래성일 뿐이다.
이대로 두면 나중에는 누군가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김정판의 숨이 붙어있는 한은 아니다.
이휘는 관제탑에 요원들을 불러들이고 농성했다.
그사이 김정판과 장문택을 대질시켰다.
김정판이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장문택이 이 쌍간나 새끼!”
“내 촌수를 따지면 한참 위야. 네 아바지들도 내게 이러진 못했다.”
“그 입을 찢어주갔서.”
그때 이휘가 끼어들었다.
“지금까진 당신들 둘이서 서로 덜미를 잡고 싸우는 형국이었지만 지금은 둘 다 아무 것도 아니야.”
싸늘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이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결국 모든 일이 이리 된 것은 이휘 때문이다. 그런 원망과 서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눈빛을 받고 있던 이휘는 떼쓰는 애들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인간이 수명을 다해가거나, 궁지에 몰리게 되면 애가 된다.
그건 북쪽을 호령하던 호랑이 새끼와 늙은 여우도 다를 게 없었다.
두 마리 짐승 같은 놈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이휘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이젠 사이좋게 굴 때도 됐잖아.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마.”
“….”
장문택은 말없이 들었고 김정판은 여전히 눈을 희번덕거렸다.
“여길 나가면 네 사지를 찢어 죽여주갔서.”
“그럴 일은 없으니까 고민할 것 없어.”
이휘가 말을 이었다.
“장문택.”
“…말해라.”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 이휘의 말씨까지 맞춰가며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김정판을 설득해. 그리고 삼촌과 조카 사이로, 오순도순 지금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거야. 대신 너희 왕국이 아닌 타지에서.”
“…망명하란 소리군.”
“그게 가장 깔끔하다는 걸 알 텐데. 지구상 수많은 폭군들이 물러날 때를 몰라서 끔찍하게 죽임 당했지. 하지만 오히려 스스로 물러난 자들은 평화롭게 여생을 마무리했어.”
김정판이 허옇게 눈을 뒤집어 깠다.
“죽고 싶네? 감히…!”
“감히.”
이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지랄 지랄 하지마라. 네 경호부장처럼 죽고 싶지 않으면.”
그때 장면이 떠올랐는지 김정판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기세는 시들지 않았다.
“차라리 죽이라!”
이휘는 냉정한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장문택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제 운명공동체다. 김정판이 죽으면 당신도 죽어.”
그 말만 남긴 이휘는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덜컥.
문이 선뜻 안 열린다. 힘을 주자, `어맛!` 소리와 함께 힘이 풀렸다. 딴청을 피우고 있는 나타샤가 보인다. 청진기마냥 귀를 대고 엿들었던 모양이다. 이휘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뭐합니까?”
“하, 하긴 뭘 했다고 그래요?”
나타샤가 얼굴을 붉힌다.
다행히 거짓말에 능통한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하긴, 거짓말도 떳떳하지 못할 때 치는 거지 이 여자는 평생을 공주처럼 살아왔다. 누구한테 둘러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닙니다.”
이휘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알렉세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협조하던가?”
“그럴 리가.”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지. 왕좌를 내려놓으라는 건데.”
“협조하게 될 거야. 장문택은 생존이 우선인 자니까.”
“왜 이렇게 번거롭게 구는 거냐? 블라디미르 때처럼….”
“그땐 현직 대통령이라는 대안이 있었지.”
이휘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 저 두 놈이 죽어버리면? 놈들을 따르던 자들이 악에 받쳐 싸우려 들 거다.”
“그만큼 충성할 거라고 믿는 건가?”
“충성하는 게 아니지.”
이휘가 덧붙였다.
“저놈들이 가졌던 권력을 승계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돼. 국가의 원수를 처단해야만 저놈들이 가진 권력을 고스란히 얻을 수 있지. 이미 숙성될 만큼 숙성된 권력을 한 입에 집어삼킬 길이 있는데 포기할 것 같아?”
알렉세이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은 체를 했다. 하지만 나타샤는 정확히 이해한 모양이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저 자들은 그대로 놔둘 거예요? 당신이 얘기한 저 자들의 측근들. 저 자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접촉해서 일을 벌이려 들 거예요. 성공만 하면 그것도 저 자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만큼 큰 권력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알렉세이가 대신, 더 정확히 집어주었다.
“그냥 둘 리가 있소?”
“네?”
“이휘 저 지독한 놈이 후환이 될 것들을 그냥 둘 리가 있겠냐는 말이오.”
“그럼 어떻게…?”
이휘가 대답했다.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려고요? 한국은 저 자들을 가두기에는 너무 좁아요.”
“CIA.”
“…CIA에 넘긴다고요?”
“북한은 미국한테도 골칫거리입니다. 적당히 이용해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도무지 말을 안 듣는 작자들이라… 오히려 중국의 수족 같이 보겠죠.”
“그래서요?”
“세계 경찰을 표방하고 있는 미국이 비승인 무장을 하고 국민들을 학대하며, 학살을 자행하는 북한의 김정판을 검거했다… 이건 군소 테러조직이나 카르텔 조직을 족치는 수준의 업적이 아니죠.”
아무리 미국에서 신경 쓰는 멕시코 카르텔이나 IS 등의 마약, 테러 집단들이 강한 군사력을 갖췄다 해도 한 국가를 표방하는 북한에 비할 바는 아니다.
만약 그런 북한의 수괴를 검거해서 법정에 세운다면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세계 경찰국으로서 위엄을 세우는 것은 물론 눈치를 보며 슬슬 신경을 긁던 다른 범죄조직들까지 제대로 겁을 줄 수 있다.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란 것은 그만큼 적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다.
나타샤는 이휘의 목적을 읽었다.
“공을 돌리는 대신 세계 각지의 시선을 모조리 미국에 돌리고, 당신은 더 깊게 숨으려는 거죠? 우리 러시아에 그랬듯이.”
“상황은 좀 다르지만….”
살짝 민망해진 이휘가 콧등을 긁적였다.
“비슷합니다.”
그나저나 좀 의외다. 눈앞에서 북한 경호부장을 끔찍하게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하는 걸 보고도 나타샤는 조금도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다.
나타샤가 말했다.
“제 앞에서 이런 얘길 하는 이유는 러시아에 원하는 게 있는 걸 테고요.”
여기까지 예측하다니!
이휘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군사력을 좀 빌립시다.”
“군사력이요?”
“네. 북측과 왕성한 거래를 트려면 러시아도 어느 정도 지분을 넣어놓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지분이 군사력?”
나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이 가만히 있겠어요? 물론 이것도 생각해두셨겠지만.”
“미군도 원하면 확장, 주둔시키죠 뭐.”
“예?”
“대가 받고.”
“무슨 대가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며 매 년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북이 완전히 한국에 병합된 후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명분이 사라져요. 그땐 우리가 아시아의 거점을 제공해주는 대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죠.”
“아니, 그걸 미국이 받아들이겠어요? 지금까지 미국에 한국에 주둔하면서 도운 게 얼만데.”
“경찰국이니 도운 겁니다. 돈도 받았고. 서로 고마울 것도, 의존할 것도 없는 관계죠. 사업과 마찬가지에요. 특히 나랏일은 자국의 손익을 따지지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후우. 미국이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안다 해도 책임을 묻기 힘들어지겠네요. 현 정권을 쥔 미합중국 대통령조차 업적을 위해서라도 거부할 수 없겠어요. `미국의 위엄을 보여서 북한을 무릎 꿇린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까.”
“맞아요.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을 더 오래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는데 이 작은 반도의 사정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나타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무슨 한국 대통령이랑 대화하는 줄 알았어요. 그 모든 건 한국 정부와 국회, 각개부처가 동의할 때 실행 가능한 것 아닌가요?”
“북한을 통째로 떠다 바치는데 그 정도도 못해주면 안 되죠.”
“상식적으론 그럴지 몰라도 오라버니 말처럼 국익은 냉정한 법이잖아요?”
아마 서로 싸우고 물어뜯느라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소모할 것이다.
그 와중에 자기 이권까지 챙기려니 상황이 더 악화될 테고.
결국 힘들게 얻은 북한마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의 개입으로 남의 입에 떠먹여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자칫 개 같이 되면 틈을 보다 일본까지 개입할 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휘가 없다면`의 가정.
이휘는 그 꼴을 전생에서 무던히 보아왔고, 그때마다 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기다리느라 때로는 허망하게 전우의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으로 인해 또 다시 전우를 잃기도 했다.
그 지긋지긋한 회의감에 절어서 UDU를 퇴역했고,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개인 에이전트가 돼서 의뢰를 받았다.
이런 경험이 있는 이휘이기에 다시 한 번 그때 같은 일이 반복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진짜 무서운 것은 지금 상대하는 것과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닌, 욕망과 탐욕에 얼룩진 내부의 적이다.
“…봐서 알겠지만, 그래서 한국정부부터 내 편으로 만든 겁니다.”
“현 정권도 독재는 아니에요. 그 정도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없죠.”
“국민들이 있죠.”
이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국민들이 바로 보고 판단한다면 그 의지를 선봉에서 이끌어주라고 국민의 혈세로 월급 주는 기관이 정부와 국회입니다.”
“민주주의.”
“그래요. 현 정부가 옳은 결정을 내린다면 나, 그리고 개개인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현 정부를 지지할 겁니다. 국민들이 준 힘을 가지고도 아무 것도 못한다면 자신들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되죠.”
이휘의 눈을 보던 나타샤의 동공이 떨렸다.
“…이런 얘기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블라디미르 총리와 닮았어요.”
“….”
“아직 아버지와 블라디미르 총리가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던 시절에, 그 사람도 제게 비슷한 광기어린 눈으로 똑같이 말했죠. 무능한 정부는 불필요하다. 네 아버지나 나 같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낫다고.”
“어쩌면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휘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떤 점이 다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정치에 `정` 자도 모르면서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펼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은 잘못된 것을 정정하는 것. 잘못 뻗은 가지를 쳐내고 나무가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신념을 잃는다. 힘을 가지고, 힘을 쓰다보면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휘는 이미 죽었다 살아난 몸.
그 점이 가장 달랐다.
군인이라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져서?
남들과 다른 신념을 가져서?
아니, 그런 것들은 오히려 보상심리를 일으키고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휘는 죽음 속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고, 부귀영화가 주는 자극이 얼마나 끝없는지 알 수 있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 마약 같은 성질이라는 것을. 따라서 돈을 벌고 권세를 누리는 것보다 목숨 걸고 전생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겁먹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신념을 잃는다면, 저 역시 블라디미르 총리가 그랬듯 누군가의 손에 비참하게 죽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