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95
나는 회귀했다 95
이휘가 방으로 돌아갔을 땐, 김정판의 몰골이 볼만했다. 서로 묶인 손으로 싸움박질을 벌인 것이다. 결과는 장문택의 승.
장문택의 얼굴도 몇 대 맞은 듯 벌갰지만 김정판은 코가 부러지고 이빨도 몇 개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두 눈은 충혈 되어 있고, 목에는 뚜렷한 손자국이 나있었다. 목을 조른 모양.
“그래서, 결론은?”
이휘가 싸늘하게 묻자 장문택이 대신 대답했다.
“망명하겠다고 했소. 멍청한 새끼!”
그가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김정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야 네 세상이 불바다가 된 걸 느꼈나 보군.”
“….”
김정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휘가 손에 들고 온 전화기를 올려놓은 뒤 장문택을 향해 수화기를 까딱였다.
“전화해.”
장문택이 말없이 수화기를 받아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그리곤 간략하게 한 마디 툭 뱉었다.
“철수해라.”
이어서 덧붙인다.
“다 끝났다. 철수해.”
전화를 끊은 그가 이휘를 봤다.
“되었소?”
“그래.”
이휘가 이번에는 김정판에게 전화기를 밀었다. 김정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올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철수하라우.”
전화를 끊은 뒤 이휘를 본다.
“약조는 지키갔지?”
“목숨은 붙여주지. 알렉세이!”
이휘가 크게 부르자 알렉세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두 놈, 파나마로 보내.”
“살판났군. 개새끼들.”
알렉세이가 두 사람을 끌고 나갔다. 자리에 남겨진 이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상황이 일단락 된 것이다.
그걸 알리듯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휘입니다.”
-우리 공수부대가 평양에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이번 일이 불러올 반향이 얼마나 클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러 정부, 미 정부 쪽은요?”
-두 곳뿐이겠습니까? 아직 발표하기도 전인데 연평도 인근에서 있었던 일로 증권시장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휘는 이미 이럴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방준수에게 국내 주식 중 몇 종목을 골라서 잔뜩 사라고 따로 지시를 해두었고.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차차 안정화 될 겁니다.”
-그렇겠지요. 북진개발사업 선정사업체 명단을 말씀해주십시오.
이게 바로 첫 번째 익은 열매다.
“기업은 뺍시다.”
-기업을요?
민정수석이 놀랐다.
-기업들이 이 사실을 알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휘 씨 주머니에 천문학적인 돈을 채워줄 텐데요.
“푼돈인 거 아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민정수석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길 줄 알았거든요. 보통은 그럴 겁니다.
“구태여 나중에 덜미 잡힐 일 만들 필요 없죠. 중소사업체들 위주로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명단은 저희 쪽에서 보내겠습니다.”
-하하, 저도 못 믿으십니까?
“저는 원래 정치하시는 분들 못 믿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민망한지 잠시 침묵하던 민정수석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십시다. 명단 보내주십시오. 당연히 파트리아 펀드 이름도 들어가겠죠?
“파트리아 펀드는 사모펀드입니다.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요. 빠질 겁니다.”
-그게 무슨….
“대신, 대선물산을 컨트롤 타워로 일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정성그룹도 포함하지 않을 생각인 겁니까?
“2차에 들어옵니다. 1차에서 기업은 제외에요. 그건 정성그룹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의미로, 피도 눈물도 없군요.
쓸 데 없는 소리.
이휘가 말을 돌렸다.
“미국 정부 관련해서는 수석님이 외교부 통해서 접촉해주십시오. 절차대로 가죠.”
-시일이 걸릴 겁니다.
“시일을 끌 수 없을 겁니다.”
-예?
“러시아군이 움직일 겁니다.”
-러시아가 움직여요?
“네. 그쪽 정부와는 얘기 끝난 겁니다. 러시아 공군, 육군이 북측의 알마즈 공장을 통해 이 땅으로 들어옵니다.”
-이휘 씨가 지대한 공을 세운 건 알지만 그 땅이 이휘 씨의 사유지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 군사력을 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중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
“뻔뻔한 놈들인 거 아시잖아요. 주석 지시 한 마디면 개떼처럼 북한에 내려와서 자기네 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설마 그렇게…!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에요. 특히 중국이 잘하는 거고. 놈들은 우릴 만만히 봅니다. 깡패가 괜히 깡패입니까? 약자 상대로 없던 명분도 만들어서 모조리 갈취하니 깡패인 거죠.”
-미국에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좌시하지 않게, 좌불안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러시아군이 움직이면 미군도 생각할 겨를 없이 북한 휴전선 인근 병력을 해체하려 들 겁니다.”
한숨을 내쉰 민정수석이 말했다.
-일단은 지켜보죠. 그건 그렇고, 김정판과 장문택은 넘겨주시죠.
“CIA에 넘기겠습니다.”
-CIA에?
“당근과 채찍. 그놈들 신변을 넘겨서 미국을 달래줄 겁니다. 미국은 북한이라는 범세계적 테러집단을 진압한 것이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도운 게 될 테고요.”
-우리가 주도한 일입니다.
“제가 주도했고, 한국 정부는 도왔습니다. 주어가 저에서 미국으로 바뀌는 것뿐. 제 공은 미국에 잠시 맡기겠습니다.”
-이휘 씨. 이건 역사에 기리 남을 업적입니다. 이휘 씨도 그걸 알기 때문에 이것으로 미국을 달래려 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우리가 군사력을 자의적으로 움직였고, 미국과 한바탕 신경전을 벌여야한다 해도 이 역사적 현장의 주역을 미국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달래기 위해 잠시 맡기는 것뿐이라고.”
-정확히 말씀해주십시오.
“`이 역사적 현장의 주역`이 미국이 아니란 것은 결국 CIA가 밝히고 공개할 겁니다.”
-CIA가요?
상상도 못한 대답에 민정수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립니까? CIA가 미국을 배신하지 않는 한, 자국의 치부를 까발릴 일이 뭐가 있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테니 더 의미가 있는 거죠.”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어디까지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말씀드리긴 이른 것 같습니다. 상황은 계속 바뀌고, 제 생각도 계속 달라질 테니까요. 아직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저 저를 믿고, 제 의견을 반영해주세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북한을 무릎 꿇린 게 저 아닙니까?”
-….
민정수석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핵탄두는, 정말 러시아에 넘기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우리가 숨겼다는 증거는 없죠.”
-장문택과 김정판이 봤을 텐데…?
“국제사범이 증인이 되겠습니까? 어디 숨겼는지 모르는 다음에야 아무런 위협이 안 됩니다. 그래서 러시아에 숨기는 게 가장 안전하고요. 미국에서 러시아를 샅샅이 뒤질 수도, 우연히 찾아낸다 해도 그게 북한의 것인지 원래 러시아의 것인지 알아낼 도리도 없습니다.”
-`맡겨 놓는다`?
“그건 우리 겁니다. 우린 당연히 권리를 행사할 수가 있죠. 우리가 핵무기를 가졌다는 심증이 있다면 우릴 대하는 여러 나라들도 조심스러워질 겁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겠군요.
“핵을 먼저 쥐고, 핵보유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과 승인을 받아내는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제가 아닌 한국 외교부겠죠.”
-그 문제는 청와대에서 직접 신경 쓰겠습니다. 제 소관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집중해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네.”
간결하게 대답한 이휘가 통보했다.
“저는 러시아를 경유해서 귀국하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저희가 신경 쓸 부분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이휘는 나타샤와 함께 건물을 빠져 나갔다. 그러자 다리 건너, 바글바글했던 대대 병력이 먼지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계속 시끄러웠던 것이 철수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그사이 먼저 나간 알렉세이는 북한 수괴 둘을 차에 태운 후였다.
이휘는 나타샤와 차에 타며 말했다.
“호텔로 가자. 좀 쉬어야겠어.”
일을 크게 벌리다 보니 어느 때보다 피곤했다.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던 나타샤가 물었다.
“러시아에 간다고요?”
“핵탄두와 함께.”
“또 와서 핵폭탄급으로 무시무시한 짓을 벌이는 건 아니죠?”
“사과하러 가는 겁니다. 따님을 바로 돌려보내지 않고 위험한 일에 참여시켰다. 뭐 이런.”
“…진짜요?”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농담이었어요. 아버지도 제가 작정하면 못 말릴 년이란 걸 잘 아시거든요. 제가 미쳤다고 오라버니를 팔아먹겠어요? 누워서 침 뱉기지.”
“어째서 누워서 침 뱉기입니까?”
“그럼 아빠가 오라버니를 증오하게 될 텐데,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르는 우리 관계를 시작도 하기 전에 어그러뜨리는 거잖아요. 차라리 제가 혼나고 말겠네요. 설마 자기 딸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감금시킬 수는 있겠죠. 한국에서 사업하겠다는 꿈을 못 이룰 수도 있고.”
“그렇게 어리석은 분은 아니에요. 저를 가두는 게 저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 건지 잘 아는 분이죠.”
“…현명한 아버지군요.”
“휘는요?”
“뭐가 말입니까?”
“부모님이요. 어떤 분들이세요?”
“돌아가셨습니다.”
“아….”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좋은 분들이었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자식 농사는 실패했지만 경영에 있어서는 현명하세요.”
“휘한테 투자하니까?”
“비슷합니다.”
“한 번 뵙고 싶어요.”
“기회가 있겠죠.”
“….”
“….”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타샤가 다시 도톰한 입술을 뗐다.
“이제 얘기해 봐요.”
“뭐를?”
“뭐에요? 러시아를 경유하려는 진짜 이유가.”
이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 싸움?”
“자본의 싸움이 될 수도, 이번처럼 폭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 일본과는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반드시 부딪칠 겁니다.”
“그 싸움에 우리 러시아를 개입시키려고요?”
“네.”
나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작고 어여쁜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계획이 마음에 안 드는데요?”
“그 대가로 구 소련권 나라들과의 관계개선, 과거청산을 할 열쇠를 쥐어줄 생각이에요. 적어도 내부의 적보단 외부의 적과 싸우는 편이 마음이라도 편할 테니.”
“그게 가능하다고요?”
“오래 준비해왔던 겁니다.”
이휘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을 거예요. 그리고 단언하건대, 어떤 식으로든 러시아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는 저랑 싸워야할 거예요.”
“무서운데요?”
이휘가 피식 웃으며 엄살을 떨자 나타샤가 바짝 눈에 힘을 줬다.
“농담 아니에요. 휘가 무서운 사람인 건 알지만, 힘이 세다고 모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유리한 건 사실이죠.”
“나는 내가 가진 무기를 잘 알고 있어요.”
“확실히, 이번에 상대한 놈들보단 훨씬 상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적대하고 싶지도 않고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전혀 다행 같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자 이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죠.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 않아서.”
이휘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적, 아니면 아군으로 나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이나 아군이 아닌 그 중간만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낱 인간관계가 아닌 국가가 개입됐을 땐.
하지만 당분간은, 러시아 대통령이나 이 마음에 드는 영애와 칼부림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사람 일 모르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