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96
나는 회귀했다 96
러시아로 가는 길, 나타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요.”
“네.”
“알란과 알렉세이가 안 보이는데…?”
“먼저 떠났습니다.”
나타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시국에요?”
“네. 이 시국에.”
“어디로 갔는데요?”
“그야 모르죠.”
“이럴 거예요?”
이휘가 피식 웃었다.
“파나마를 경유해서 한국에 들어갈 겁니다.”
“파나마요?”
나타샤가 눈을 치떴다.
“설마 김정판과 장문택을 귀향 보낸….?”
“맞아요.”
“대체 무슨 꿍꿍이에요?”
때마침 이휘가 전화기를 들고 일어났다.
“잠시 전화 좀.”
“흐음.”
나타샤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있었지만, 이휘는 개의치 않고 객실을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알란.”
-이제 곧 출발합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알렉세이는?”
-흥분하더군요. 오랜만에 재밌는 일을 맡겠다고.
“오랜만에…?”
-살 떨리는 일만 하다가 제 입맛에 맞는 일감을 맡아서 좋은가 봅니다. 아무래도 국가나 기업을 상대하는 것보단 비슷한 부류를 상대하는 편이 수월하니까요.
“만만히 보진 마세요. 개중에는 노련한 자들이 다수 있을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자들도 부지기수일 테고요.”
-알겠습니다.
“시기 맞춰서 CIA를 보낼 겁니다. 그전까지 어느 정도 밑그림은 나와야 돼요.”
-네.
“문제 있으면 연락하세요. 바로 날아갈 테니. 아니, 문제가 생길 여지만 있어도 연락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마십시오.
“믿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휘는 객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나타샤가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어차피 아버지 통해서 들을 이야긴데.”
“그럼 직접 얘기해줘요.”
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판의 은닉자산이 있습니다.”
“은닉자산…?”
나타샤는 아차 싶었다.
“하긴, 없을 리가 없겠죠. 블라디미르 총리도 그렇게 많이 삼켰는데.”
“그가 망명했다는 소식을 벌써 알아낼 정보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우리 측 사람들을 제외하면 전무 할 겁니다.”
“찾겠네요. 파나마를 다 뒤져서라도. 주인 없는 돈을, 그것도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니까.”
“맞아요. 그들이 김정판과 장문택을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놈들의 은닉자산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을 살려둔 이유가 또 있었네요. 감쪽같이 숨겼고요.”
이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물어봤으니까요.”
“은닉자산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타당해요.”
나타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찾죠? 누구도 정확한 액수를 모른다는 건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는 건데.”
“적당히 호사를 누릴만한 장소와 자금을 마련해줬지만 만족스럽지 않을 겁니다. 딱 감질날 정도예요. 그리고 근처에, 컨티넨탈 호텔에서 리조트를 만드는 중입니다. 절반쯤 완성됐는데 카지노부터 오픈했습니다. 공식적인 건 아니고 비공식적인 초대인원들만 드나들 수 있도록 했죠.”
“호텔, 리조트… 모든 건 당신이 계획한 거고요?”
“이건 제법 지난 이야깁니다. 아무튼, `특별손님`들만 드나들 수 있는 VIP 카지노에 관련된 정보를 흘릴 거예요.”
“김정판이 찾아가겠네요.”
“아마도.”
“의심하지 않겠어요?”
“그곳 손님들은 우리가 섭외한 게 아닙니다. 의심할 것 없죠. 다만 그중에 우리가 섭외한 친구가 섞여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마원. 중국 기업 알리의 오너죠.”
그사이, 이미 알리는 1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전자상거래 업체가 됐기에 나타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휘와 연관성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당신… 대체 끝이 어디에요? 알리의 CEO랑은 어떻게 알아요?”
“우리 파트리아펀드의 고객이자, 제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입니다.”
“맙소사.”
나타샤는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대주주라고요? 당신이 알리의?”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많긴 하지만 본론만 하죠.”
“전세계를 뒤흔들만한 얘길 해놓고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나타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지만 이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본론은 김정판에 대한 겁니다.”
“그래요, 어디… 그래서. 알리의 마원을 당신이 심었다. 그 다음은요?”
“김정판은 자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이런 상황에 누가 돕겠습니까? 아니, 어느 나라가 도울 수 있을까요?”
“중국?”
“맞습니다. 중국이 망명한 김정판을 돕고, 비자금 대부분을 받아낸다. 김정판 곁에는 장문성도 있으니 본인들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건 알 겁니다. 의지할 곳을 찾을 수밖에 없죠.”
“그 기업가를 통해서 접근하려는 거군요. 비자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맞아요. 중국은 기업을 쥐고 흔듭니다. 제 시나리오는 이래요.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중국 정부에서 마원을 그곳에 보냈다. 마원도 슬슬 정부의 간섭을 받고 있고, 중국 정부에 이쁨을 받기 위해 그 일을 맡았다.”
“여기까진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원이란 사람까지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말했듯 김정판을 찾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텐데 누구 하나라도 찾아내는 날에는….”
“그래서 김정판과 장성문은 얼굴을 모르는 우리 측 요원들을 보낸 겁니다.”
미사일 시설을 폭파하고 김정판을 암살하려 했던 A팀 저격조. 김정판과 장성문을 잡을 때 몰래 숨어들어 저격포인트를 잡고 있던 A팀의 책임자, UDU 백성범 팀장이 마원을 지켜주는 이상 그는 안전할 것이다.
“하긴. 어련히 잘 대비했으려고요.”
나타샤는 의외로 쉽게 수긍하며 이어 물었다.
“신뢰를 주고 비자금을 스스로 꺼내게 만들려는 속셈이군요. 근데 CIA에 넘긴다고 하지 않았어요? CIA 정보력은 세계 최고예요. 아무리 숨기려 해도 김정판이 어딨는지 금방 찾아낼걸요? 그럴 자신이 있으니까 지금 휘한테 연락해서 물어보지 않는 거고.”
“김정판을 찾는 암살자들과 CIA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요?”
“…?”
“CIA는 김정판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
“그래서요?”
“김정판이 죽을 일만 없다면, 심리적으로 몰릴수록 좋아요. 그래야 비자금과 더 빠르게 가까워질 테니까.”
“하… 일부러 CIA한테 정보를 줄 생각이군요. 당분간, 당신이 보낸 사람들은 CIA로부터 김정판을 지켜줄 테고. 그사이에 신뢰가 쌓일 테고요? 심지어 CIA가 붙어 있으면 암살자들도 쉽게 일을 저지르지 못하겠죠.”
“역시 똑똑해요.”
“…그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모든 일을 계획한 휘한테 들으니까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데요?”
“진심입니다.”
“저도 진심이에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타샤가 갑자기 도발했다.
“진짜 섹시해요.”
“뭐가요?”
“엄청 위험해보이고, 흑막 같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그런 남자 멋지거든요. 서로 아는 사람들로 굳이 비유하자면, 난 우리 아버지 같은 스타일보다는 블라디미르 총리 같은 스타일이 더 취향에 맞아요.”
이 녀석이 큰일 날 소릴.
하기야,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느끼겠지.
블라디미르 총리 같은 놈들과 엮이면 인생 고단해진다는 것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이휘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나타샤가 물었다.
“어디가요?”
“얘기해 줄 거 다 얘기했으니까 가서 자려고요.”
“그냥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이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사지 멀쩡하고 혈기왕성한 남자한테 할 소립니까?”
“뭐가요? 이상한 거 하자는 얘기 아닌데.”
“그게 더 문제에요. 내가 무슨 스님도 아니고….”
“휘도 남자는 남자네요.”
나타샤가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이 아찔해서 이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타샤 같은 여자 옆에서 아무 짓도 안 하고 편히 잠들 수 있는 남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안 돼요.”
“뭐가요?”
“횡단 열차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여기선 노상강도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강도 들면 그때 오겠습니다.”
이휘가 매정하게 나가려 하는데 그녀가 소매를 잡았다. 소매가 뜯어져 나갈 만큼 꽉 잡은 것도 아닌데 씨름선수한테 잡힌 것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한숨을 내쉰 이휘는 의자에 기대 앉으며 말했다.
“자! 잡시다.”
“그러고 자게요?”
“누워있다가 반격하는 것보다 앉아있다가 반격하는 편이 빠릅니다. 노상강도 들면.”
“풉.”
웃음을 터뜨린 나타샤는 냉큼 자리를 펴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창문을 통해 아스라이 부서지며 들어오는 달빛이 얼굴을 비추자, 더 아름다웠다.
이휘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망연히 바라봤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타샤는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그가 먼저 잠에서 깬 것은, 거슬리는 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위기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시.’
몇 번째 똑같은 걸음걸이를 가진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는 누군가 두 사람이 탄 객실 문 앞을 오가며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접근을 통제하려 움직이고 있거나. 의심 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면 살짝 열린 객실 문틈으로 향수 향기나 담배 냄새, 알코올 냄새 따위가 그중 하나라도 들어와야 하는데 전혀 없다.
이휘는 곤히 잠든 나타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주 속편하다.
‘말 대로 된다더니.’
한숨을 내쉰 그는 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수리 중` 팻말을 달아놓고 커튼까지 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너무 시끄러웠나?”
이휘는 경박하게 이죽거리는 남자의 행색을 훑었다. 가벼운 언사와 달리 탄탄한 체격을 가졌다. 적절하게 무기를 지닌 것만 봐도 전문 킬러의 냄새가 나는데, 왜 김정판이 아닌 자신을 찾아왔을까?
“원하는 게 뭐지?”
이휘가 차분하게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듣던 것과 다른데.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아니었나?”
“누가 그래? 나랑 피볼 정도로 가까웠던 놈들은 몇 없는 것 같은데.”
이휘가 머리를 굴려서 두 놈을 끄집어냈다.
“블라디미르. 유리 다예프. 어느 쪽이지?”
남자가 킬킬 웃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뭐, 우리 중 한 명은 죽을 텐데 숨길 것 뭐 있겠나? 유리는 내 동료였네. 군 시절에도 함께했고 그 후에도 같은 업종에서 좋은 파트너가 됐지.”
이휘가 경멸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
“설마 복수, 뭐 이런 건가?”
“아니, 아니. 그런 유치한 감정으로 접근하면 안 되지. 내가 그렇게 착해 보이나?”
이휘가 뺨을 긁적였다.
“하긴 그렇지. 유리 다예프는 내 실력을 보자마자 죽었는데. 널 보낸 놈은 따로 있겠군. 유리와 너의 관계를 알고, 내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심지어 김정판과 관련된 일의 내막까지 잘 아는 놈.”
이휘가 하얗게 웃었다.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반드시 누군지 알아내야 한다. 정체 모르는 적이 있다고 해서 조금도 당황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났어야 할 일이 마침내 일어난 것뿐. 차라리 먼저 꼬리를 드러내 준 걸 고마워해야 할 판이다.
그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시종일관 차가웠던 눈빛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서 싸늘한 기운을 풀풀 풍겼다.
“날 아주 호구로 보는 모양이군. 손맛을 봐야겠어.”
어차피 이 거리면 총을 뽑아 쏘는 것보다 서로에게 접근하는 게 더 빠르다. 그럼에도 이 거리를 내줬다는 것은 총이든 칼이든, 무기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나이프를 꺼냈다.
반면 이휘는 얼마 전 김정판의 경호부장과 한바탕 싸움을 치른 것 때문에 완전히 건재한 상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잔챙이인 줄 알았는데, 칼 잡은 자세만 봐도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