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regressed RAW novel - Chapter 97
나는 회귀했다 97
먼저 공격한 쪽은 상대 남자였다. 칼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쉬익― 턱!
이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손목을 반대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상대는 마치 묘기를 부리듯 칼을 그대로 떨어뜨리며 반대 손으로 받아서 내지른다.
지이익!
티셔츠 옆구리가 잘려나가며 맨살이 드러났다. 공격이 빗나간 남자는 칼을 좌우로 휘두르며 갈지(之)자를 그렸다.
치이익! 치직!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연신 물러나던 이휘의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와 함께 탄탄한 복근 위로 미세한 혈선이 그려진다.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창자를 쏟으며 쓰러졌으리라.
등허리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돋는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남자가 킬킬 웃었다.
“왜 이래? 제대로 싸우자구.”
“후우.”
짧게 심호흡한 이휘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느낌을 받고 몸을 휘리릭 돌렸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자신을 겨누었던 총구가 따라온다.
퓩, 퓩-!
소음기를 통해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됐다. 한 발은 이휘의 뺨을 스쳐지나가서 벽에 총알구멍을 냈지만 나머지 한 발은….
쿵.
이휘가 옆구리를 쥔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손가락 틈으로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것이다.
으드득.
이휘는 이빨을 깨물며, 망설일 틈도 없이 앞구르기를 했다. 뒤에서 달려든 놈의 발이 `콰앙!` 벽을 때리고, 같은 편이 맞을까봐 다시 재 조준을 하던 놈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휘를 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휘가 총구를 밀치며 칼을 뽑았다.
촤악!
총을 든 손목의 동맥이 잘려나가며 피가 튀었다. 고래가 물 뿜듯이 피가 새나오는 손목을 부여잡은 총잡이가 총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휘가 바닥을 쓸 듯 총을 잡으려는 순간, 뒤에 있던 칼잡이가 나이프를 휘둘렀다.
서억!
이휘는 다시 한 번 바닥을 굴러서 피했지만 목덜미가 깊게 베이고 말았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출혈량이 만만찮다. 심지어 옆구리의 관통상에서도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씨발….”
욕지거리를 뱉은 총잡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발로 걷어차 버리곤 칼을 뽑았다.
차라리 총격전이 벌어지면 그걸 이용해서 둘 중 한 놈이라도 처치할 텐데 이렇게 되면 한 손으로 두 손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진다.
이휘는 호흡을 골랐다.
‘이보다 더한 상황도 겪었다.’
사람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그 끝을 시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허무하리만치 단숨에 끊어지는 것이 사람 목숨이라지만, 이미 최고조로 단련된 이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활로를 찾아왔다.
이휘가 양쪽에서 접근하는 두 사람을 견제하며 칼을 거꾸로 감아쥐었다.
“후우.”
호흡을 고르게 다지자마자, 그가 먼저 움직인다. 첫 목표는 발목을 베인 총잡이였다. 놈은 이휘가 달려들자 나이프를 휘둘렀다. 이휘는 피하지 않고 더 밀고 들어가며 가랑이 안쪽을 걷어찼다.
설마 목 줄기를 노린 칼끝을 향해 달려들지 상상도 못 했던 놈의 자세가 무너지며 휘두르던 칼끝의 목표 역시 바뀌었다. 이휘는 어깨를 살짝 비틀며 내줬다.
푸욱!
깊게 박힌 칼을 뽑으려는 순간 이휘가 그를 껴안으며 목에 자신이 든 칼날을 깊게 박아넣었다.
푸욱-!
“커헉….”
총잡이이가 묵직한 체중으로 기댄다. 이휘는 총잡이를 밀치는 대신, 놈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뒤로 돌아갔다. 그사이 등허리에서 섬뜩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지독하게 따라 붙는 칼잡이.
이휘는 반쯤 시체가 된 총잡이를 놈을 향해 밀쳤다. 그러자 칼잡이가 유연하게 상체를 틀며 자신을 덮치는 총잡이를 피하더니, 그대로 들어왔다.
푸욱!
이번에는 가슴을 내줬다. 심장이 비껴나간 걸 느끼며, 그를 일부러 끌어들인 이휘 역시 목을 노리고 우회한 칼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지독하게 반사 신경이 뛰어난 칼잡이는 이휘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이휘는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도 상대 옆구리에 칼날을 쑤셔 박았다.
푹-그극.
“이 개 같은 새끼가….”
놈이 이휘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내려 했으나, 이휘는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박치기로 놈의 인중을 쪼갰다.
빠악!
“커헉!”
놈이 칼을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칼잡이도 이휘의 숨이 아직까지 여유 있게 붙어있는 걸 보고 심장에 들어갔어야 할 칼이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이휘가 마지막 순간 몸을 비튼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임에는 틀림없었다.
이휘는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눈동자를 들어 칼잡이를 노려봤다.
아직도 서슬 퍼런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다.
칼잡이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이휘가 간신히 말을 씹어뱉었다.
“복부….”
“뭐…?”
“복부동맥….”
“…!”
칼잡이가 눈을 부릅떴다. 고개를 내리자 벌써 흥건하게 젖은 상의가 보인다.
“이 개 같은….”
그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발을 헛디뎌 무너지고 말았다.
콰당!
“으으으으.”
고통이 몰려온다.
뒷일은 안 봐도 빤했다.
이대로 두면 배가 부풀어 오를 테고 장기들이 괴사하며 과다출혈로 사망할 것이다.
“이런 씨발….”
말투나 칼이 들어간 위치를 보면 그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휘는 치명상을 피했고, 그 찰나의 순간 칼잡이의 복부동맥을 정확히 잘라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현기증이 와버린 칼잡이는 정신을 못 차렸다. 눈이 풀리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이휘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치명상은 피했다 해도, 당장 치료 받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상처도 많고 출혈이 심했다.
그때, 칼잡이가 마지막 숨결을 내뱉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끝이… 아니야.”
그걸 끝으로 고개를 떨군다.
반면 이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끝이 아니라니.
블라디보스토크까지만 가면 되는데, 그곳에서 체육관 관장, 흥신소 관장이 모아온 PMC 대원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어떤 놈인지 몰라도 귀신같이 계획을 세우고 들이닥친 것 같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주먹이 으스러져라 말아 쥐었다.
매번 목숨 건 작전을 수행하며 각오했던 일이지만,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이 땅에 남겨두고 간다는 사실이 원통했다.
그 때문에 모든 계획이 무산된다는 것에서 오는 허탈함이었다.
나타샤는 살 수 있을까?
러시아 대통령 영애이니 쉽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
이휘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타샤가 객실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이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정신없이 다가와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명 때문에 들리지 않지만, 그녀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더 거지 같은 건.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적인 게 분명한 누군가가 커튼을 들추고 복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조심….”
이휘가 중얼거리자 나타샤가 말했다.
“좀 쉬고 있어요. 반드시 구해줄게요.”
너나 조심해, 그 말을 차마 뱉지 못한 이휘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휘는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간신히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나타샤.”
속삭임에 그를 간호하던 나타샤가 눈을 떴다. 졸린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엽다.
이휘가 스스로 생존을 확인한 이 순간마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살아남은 거 축하해요.”
“이승입니까?”
“무슨 소리에요?”
“내 예측대로라면 나는 죽고, 당신도 죽거나 인질로 잡혀갔어야 하는데….”
“그 예측, 틀릴 때도 다 있네요?”
나타샤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뒤늦게 밖에서 싸움이 벌어진 걸 알고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안에 있었어요. 사실 당신이 다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요. 그저 노상강도겠지, 했거든요.”
“잘했습니다.”
만약 그런 자들과의 싸움에 나타샤가 개입했다면 이휘는 더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하는 싸움은 두 배 세 배 힘든 법이니까.
나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도울 걸 그랬어요.”
“…?”
“휘 만큼은 아니지만 저, 어렸을 때부터 호신술 정도는 배웠거든요. 상대를 순식간에 해치거나 하진 못해도 방심을 유도하면 순식간에 제압하는 정도는 해낼 수 있어요.”
하긴, 일반인도 호신술 정도는 배울 수 있는데.
존재조차 숨긴 러시아 대통령의 영애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끊임없이 혼란에 휩싸인 나라고. 권력쟁탈이 벌어지던 곳이니 이해가 갔다.
“그래서 그때 마지막으로 본 놈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이겼어요.”
“…진짜로? 아무 도움 없이?”
이휘는 쉽사리 믿기지가 않았다. 그전에 왔던 두 놈을 상대해보건대, 마지막에 들어온 놈도 그리 쉬운 상대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영애는 여자고, 무술을 오래 연마한 것 같은 체형도 아니었다.
그동안은 유심히 뜯어보기 뭐해서 자세히 탐색하진 못했는데, 이제 보니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대로 훈련 받은 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나타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진짜 세다구요!”
“….”
“휴.”
한숨을 내쉰 나타샤가 이실직고 했다.
“사실, 그자가 당황했어요. 제가 호신술을 익힌 것까진 몰랐던 모양이더라고요.”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 호신술이, 자기가 익힌 것과 같은 걸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주짓수처럼 큰 힘 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어디서 배운 겁니까?”
“역시 날카롭네요. 블라디미르 총리. 아버지와 친분이 깊던 시절에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거든요. 과거에 특수부대를 제대하고 스파이 활동도 했던 분이라서 직접 호신술을 알려주셨어요. 무엇보다 제 얼굴을 아는 사람 자체가 몇 없기도 했고.”
“그럼 그자가….”
“맞아요. 그래서 추측해봤죠.”
나타샤가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은 더 효율적이고 공격적인 무술을 익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결국 블라디미르 총리가 복무하던 시절에 같은 부대 에 있었던 사람들만 아는 무술이란 거죠. 그중에, 이런 짓을 저지를만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한 명뿐입니까?”
“블라디미르 총리는 자길 따르지 않는 동료들을 모조리 숙청했거든요. 나머지는 아버지가 해결했고, 딱 한 명 남아요. 블라디미르 총리 전에 세 사람이 만든 모임에서 쫓겨났던 사람.”
“그게 누굽니까?”
“이름은 모르고 군 시절 쓰던 코드네임은 `화이트`랬어요. 중국과 손잡고 미국과 싸우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 생각을 꺾지 않아서 망명했다고 알고 있고요.”
이빨을 숨기고 있던 이리가 이빨을 드러냈다. 이빨을 숨기는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회가 오길 기다렸겠는가? 심지어 블라디미르 총리가 죽어 나갈 때도 꼼짝없던 자가 움직였다.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다. 지금은 때가 왔다는 건데, 이런 자들이 가장 위험하다.
“시체는 어떻게 했습니까?”
“제가 쓰러뜨린 사람은 죽지 않았어요. 죽은 사람 둘과 함께 기차 밖으로 던졌고요. 그땐… 너무 무서워서.”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지 나타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여자다.
이휘가 물었다.
“핏자국은?”
“기관장이 도와줬어요. 아버지랑 통화했거든요. 그리고 이번 역에서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합류해요.”
이휘 역시 경호 인력을 배치해둔 상태다. 그제야 한숨을 내쉰 이휘가 말했다.
“고생했습니다.”
나타샤는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