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303
302
“……해서, 용사 에녹과 시그너스 길드의 활약으로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답니다.”
타냐가 마지막 장에 다다른 동화책을 덮었다.
검은색 양장 가죽으로 된 표지에 라는 제목이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매일 밤 최고급 가죽이 다 해지도록 읽고 또 읽은 타냐는 이젠 눈을 감고도 그 내용을 전부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올해로 마흔이 된 그녀가 애들이나 읽는 동화에 이토록 열정을 쏟는 이유는, 이것이 저택의 작은 도련님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
“또 중간에 잠드셨구나.”
비록, 그 책을 읽어 달라고 조른 사람은 마지막 장에 다다를 때까지 깨어 있던 적은 없지만.
따뜻한 조명이 일렁이는 침대는 이미 곤한 숨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하긴, 이제 겨우 여덟 살이 된 어린아이가 버티기에 밤은 너무나 고된 시간이었다.
내일 또 읽어 달라고 하시겠군.
눈에 훤한 내일의 일과를 중얼거린 타냐가 다정한 손길로 작은 도련님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며 독서 등의 전원을 내렸다.
작은 도련님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오자, 마침 복도를 지나던 젊은 하녀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타냐. 작은 도련님은요?”
“지금 막 잠드셨어.”
타냐의 일은 이 집의 작은 도련님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 말인즉,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하녀가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으며 애절한 표정으로 타냐를 올려 보았다.
“그럼 연회장 일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로니가 몸살에 걸려서 일손이 모자라거든요.”
뺨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를 발견한 순간, 타냐는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사라. 분명 얼마 전에 저택으로 들어온 아이였다. 아직 타냐와는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는 사이였는데, 붙임성이 좋은지 종종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응. 그러마.”
“하아, 살았다. 고마워요. 타냐!”
대부분 일을 도와달라는 어리광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타냐라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녀는 이런 부탁을 대부분 거절하지 않았다. 타냐는 하녀장 다음으로 저택에서의 세월이 긴 축이었고, 그래서 웬만한 이들보다 일 처리가 빨랐다.
타냐는 사라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곧 자정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연회장은 내일 있을 연회를 준비하는 사용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뭐든지 최고급으로만 이루어진 파티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보기만 해도 눈 호강이 되는 광경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 안을 채우는 사용인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건 자정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 탓이 아니었다.
“이번 생일이 지나면, 약혼식을 올리겠죠……?”
바로, 첫째 도련님의 스무 번째 생일 뒤에 딸려 올 약혼식 때문이었다.
타냐의 곁에서 커트러리를 세팅하던 사라가 아련한 눈을 하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냐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때의 생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눈동자 속에는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그렇겠지. 이제 도련님도 성인이 되셨으니까…….”
타냐는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차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이 될 도련님은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답게 어렸을 때부터 혼처가 정해져 있었다. 타냐의 입장에서는 고작 스무 살이었지만, 다른 명문가 후계자들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약혼이었다.
주인어른께서 차일피일 식을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제 학위도 받으셨고, 사업도 물려받으셨으니…. 더 이상은 미룰 명분이 없잖니.”
혼담 자체는 도련님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루어졌으나, 소년의 아버지이자 타냐의 고용주인 주인어른께서 온갖 핑계를 대며 오늘까지 식을 끌었다. 마치 영원히 두 가문이 성사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가문의 수준이 너무나도 차이가 난 탓이다. 광활한 평야가 대부분인 임페리얼 글렌에서 처음으로 열차 산업을 시작해 대륙 교통의 중심국으로 발전시켜 훈장까지 받은 울프번 가문과는 달리, 고리대금업으로 큰돈을 번 디켈슨 가문은 사라의 말대로 잘 쳐 줘 봐야 졸부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결코 성사되지 않았을 이 혼담이 이루어진 데에는 전적으로 장차 약혼녀가 될 디켈슨가의 적녀 때문이었다.
그 아가씨가 어느 날 우연히 천사처럼 아름다운 제 도련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 바람에, 울프번 가문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악명 높은 디켈슨 가문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욕심 많은 디켈슨은 두 가문의 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에 손을 썼다. 그들이 수상을 찾은 바로 다음 날, 수상이 울프번의 열차 산업을 위해 빌려주었던 국채 상환을 앞당기라는 고지서를 보내왔다. 하여 평화롭게 살아가던 울프번은 졸지에 터무니없이 짧은 기한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상환액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에는 대륙 전역에 유행하는 전염병으로 인해 울프번의 열차 산업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던 터라, 그만한 규모의 현금을 끌어오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그때는 열차 사업권의 시세도 많이 떨어진 시기라서, 한적한 도시의 사업권을 팔아도 막대한 빚을 틀어막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원래라면 그렇게까지 큰 금액을 내놓을 일이 없었겠으나, 무슨무슨 법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짤막한 설명이 전부였다. 이 또한 배후에 디켈슨 가문이 있다는 게 합리적 의심이었다.
모두가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디켈슨을 의심하는 증거는 따로 있었다.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앉은 울프번이 파산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 순간, 디켈슨 가가 저택을 찾아왔다. 초대장도 친분도 없는 상황에서 대뜸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들은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래를 요청해왔다.
자신들이 대신해서 국채를 상환해 줄 테니, 이 가문의 후계자를 제 딸과 혼인시키라고 말이다.
진노한 주인어른께서는 차라리 망하겠다며 디켈슨의 가주를 쫓아 보내려 했으나, 도련님이 말렸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던 첫째 도련님은 자신의 혼담으로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국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족하다며 기꺼이 디켈슨의 혼담을 받아들였다.
‘흐흐흐. 아들은 말이 좀 통하는구만.’
원하는 답을 얻어 낸 디켈슨 가주의 눈빛이 어찌나 탐욕스럽던지….
그로부터 8년.
다행히 울프번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아무래도 금지옥엽 귀하게 키운 도련님이 돈에 팔려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의 일로 디켈슨에 앙심을 품은 주인어른께서는 댈 수 있는 모든 핑계와 명분을 동원하여 약혼식을 미루고 또 미뤘다. 자녀의 나이가 어리다는 건 이럴 때 유리했다.
학업에 정진하느라 약혼을 하지 못한다. 유학을 가야 해서 약혼을 하지 못한다.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서 약혼을 하지 못한다. 원래 뼈대 있는 가문일수록 혼인이 늦는 법이다…….
온갖 핑계를 댄 주인어른께서는 도련님과 디켈슨 사이의 연결 고리를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나중에는 언제 쓰인 건지도 모를 고서 하나를 발굴해 와, 원래 이 나라는 혼인을 하기 전까지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봐선 안 되는 전통이 있다며 디켈슨을 애태웠다.
누가 봐도 대놓고 약혼하기 싫어서 부리는 잔꾀였으나, 디켈슨이 그 모든 것을 8년씩이나 기다려 준 건 의외였다. 듣자 하니 그동안 정부와 손을 잡고 무슨 은행 사업을 구상하느라 바빴다고 했다.
자금의 재분배라는 명목은 좋지만 복리 이자니, 대출이니 하는 말들은 아무리 들어도 거국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약혼식이 끝나면, 1년 안에 결혼식도 올리게 될걸….”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주인어른께서는 약탈당하듯 성사된 약혼을 무르는 데에 실패했다. 울프번과 디켈슨의 혼인은 이제 와서는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 현실이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주인어른께서는 화병을 얻어 몸져눕기까지 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 사실이 도련님의 생일을 맞은 저택을 끝없는 우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울프번에 드리워질 디켈슨의 마수를 떠올린 사라가 연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탐탁지 않은 혼사라 하더라도, 일개 사용인이 이렇게까지 근심에 젖은 이유는 달리 있었다.
“도련님이 너무 가여워요.”
그들의 꽃 같은 도련님의 곁에 서기엔 디켈슨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그분처럼 아름다운 분이 두꺼비 같은 여자와 평생을 사셔야 하다니…….”
못생겼기 때문이다.
아직 디켈슨의 적녀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세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 아비와 아주 판박이라고 했었다. 살이 뒤룩뒤룩 찐 두꺼비 같은 얼굴을 떠올린 타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얼른 정신을 다잡고 무엄한 발언을 일삼는 사라에게 단호하게 주의를 주었다.
“말조심하렴. 사라. 도련님의 짝이 되실 분이다. 외모가 조금… 아름답지 않다 한들 그것이 어떻게 흠이 될 수 있겠니. 그래도 그 집 아가씨는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하는 데 가문의 돈을 쏟아붓고 계신다던데. 얼마나 훌륭한 분이야.”
애써서 찾아낸 디켈슨의 훌륭한 점을 찬양한 타냐가 이제 그만 일을 하러 가는 게 어떻겠느냐며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슬픔에 잠긴 사라는 물색없이 고스란히 마음의 소리를 읊어 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참한 아가씨가 나타나서 사랑의 도피라도 해 주었으면…….”
누군가 근심에 잠긴 하녀의 혼잣말에 대꾸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랬다간 이 저택이 풍비박산 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