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304
303
“……!”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사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의 뒤에는 어느새 퇴근하여 저택에 돌아온 도련님이 버젓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그만 입방정을…….”
졸지에 당사자 앞에서 뒷이야기를 하게 된 꼴이 된 젊은 하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의 뒤로 노련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타냐가 반갑게 후계자를 맞았다.
“오셨어요. 에녹 도련님.”
정든 하녀의 인사에 다정한 도련님이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다녀왔어. 타냐. 침실로 차 한 잔만 가져다줄래?”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결 좋은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붉은 머리칼, 페리도트를 닮은 아름다운 초목의 눈동자.
화려한 장미를 쏙 빼닮은 아름다운 울프번의 후계자는 동화 속에 나오는 영웅의 이름을 따 에녹 울프번이라 불렸다.
한때는 타냐의 품에 안고 길렀으나,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된 그는 또래보다 월등히 자라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비죽 솟아 나올 정도였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봐도 봐도 흐뭇한 도련님의 자태에 정중히 고개를 숙인 타냐가 아직도 얼이 빠져 허둥대는 사라의 손목을 붙잡고 얼른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에녹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올라 제 방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아까부터 함께 있던 비서가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내뱉었다.
“자르겠습니다.”
방금 전 연회장에서 보았던 하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입단속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니,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저택에서 내보내겠다는 뜻이었다.
그에 에녹이 냉혈한을 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있게 추천서는 잘 챙겨 줘.”
다정한 배려였으나, 그렇다고 사라의 해고를 물러 주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도련님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다소 쌀쌀한 복도와는 달리, 후계자의방은 언제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봄을 가져다 놓은 듯한 훈풍을 타고, 겨울 한복판에서 짙은 장미 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올해도 어마어마하군요. 한겨울에 장미라니. 도련님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르는군요.”
휘유-.
방 안을 가득 채운 장미꽃들을 본 비서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체 다들 어디서 이렇게 구해 오는지, 울프번의 후계자를 찬양하는 무리들이 매년 이날이 되면 앞다투어 장미꽃을 보내와 저택이 온통 꽃향기에 물들 지경이었다.
비서는 사람이 묻혀 죽어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장미의 향연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제가 모시는 도련님을 향한 광기 어린 사랑을 읽어 냈다. 그것을 질린 듯이 들여다보던 남자가 제 상사를 향해 대뜸 질문을 던졌다.
“정말, 생각 없으세요?”
“뭐가?”
“사랑의 도피.”
하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답습한 비서가 내심 궁금한 눈으로 도련님의 답을 기다렸다. 에녹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약혼녀가 있는데?”
“무늬만요. 그분한테 별 관심도 없지 않습니까.”
임자 있는 몸이라는 대답에도 비서는 뻔한 거짓말 따위 하지 말라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의리는 개뿔,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약혼녀를 위해 정절을 지켜 줄 만큼 그의 도련님은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련님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명문가 아가씨들이 좋다 달려들 텐데. 그 좋은 미모를 제대로 쓰지도 않으시고 매번 일만 하는 게 정상입니까?”
생긴 건 온 세상 여자들을 전부 홀리고 다니게 생긴 주제에, 에녹 울프번은 미련할 정도로 여자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개 미인은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내버려 두질 않는 법이니까. 제이드는 군중의 힘을 믿었다. 하지만 웬걸. 임페리얼 로드의 아가씨들은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린 건지 누구 하나 울프번의 후계자에게 대시하는 법이 없었다.
아카데미를 다닐 적에야 몇 번 고백을 받은 모양이지만 그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도련님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에녹 울프번은 그토록 멀쩡한 허우대를 가지고도 아직까지 동정이었다. 신사들 사이에서 우스갯거리로 전락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나 본인은 그 사실을 딱히 유감스러워하지 않았다.
이토록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니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는 제이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혹시나….
“도련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뭘.”
“혹시… 저, 좋아하세요?”
가문의 후계자가 남자인 자신을 마음에 둔 것은 아닌지.
“…….”
에녹이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제 비서를 바라보았다. 훈훈하던 방 안의 기온이 금세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깥처럼 뚝 떨어졌다.
아, 아니구나.
자연스럽게 진실을 깨우친 제이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난 호색한이 아니고, 남색가는 더더욱 아니야.”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본 에녹이 단호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그냥, 타인한테 별 흥미가 없을 뿐이지.”
그러니 제발 이상한 오해 좀 하지 말라고 일갈하고는 방과 연결된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찬바람이 묻어 나오는 옷을 벗고 간단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손이 빠른 타냐가 그새 두고 간 차가 그를 반겼다.
소파에 앉은 에녹이 찻잔을 들이켜자, 제이드가 얼른 그가 봐야 하는 서류를 건넸다. 이번에 가문에서 새로이 확장하는 타국과의 철로 사업에 관한 계약서였다.
계약서를 읽는 둥 마는 둥 휙휙 넘겨 본 에녹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수정이 필요한 곳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제이드는 방금 전의 헛발질을 만회하고 싶은 것처럼 열정적으로 회의에 임했으나 에녹은 이미 그의 실수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딱히 그가 믿음직한 비서여서라기보다는, 에녹이 워낙 타인에게 무감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낳고 키워 준 부모님에게도, 나이 어린 동생에게도, 그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비슷한 집안의 후계자들,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 오던 동급생, 제 방 한가득 장미로 채워 주는 이들,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비서, 하다못해 곧 결혼하게 될 약혼녀조차도.
그들의 위치에 맞게 존중하고 배려해 줄 생각은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끈끈한 정을 느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기실 그것은 에녹 울프번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고독이었다. 그는 제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다가도 문득 자신의 삶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항상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보고 싶을 정도로 깊이 정을 준 사람도 없으면서, 언제나 까닭 없는 그리움에 시달렸다.
그리움.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 숨 막히는 감정에 가만히 묻혀 있으면 무언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른거리다가 결국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았다.
그런 날이면 눈물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깼다.
에녹은 태어나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텅 빈 방 하나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 방은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채워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제 약혼녀가 두꺼비를 닮았든 개구리를 닮았든 그와는 하등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이 갈증을 해결해 줄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곁에 서든 에녹이 알 바 아니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 회의가 한창인 에녹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을 정도로 다급한 용무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에녹이 문밖의 존재에게 들어와도 좋다고 답했다. 문고리가 돌아가며 마호가니로 만든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도련님. 약혼녀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 야심한 시간에 에녹을 찾은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약혼녀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보낸 선물이지만 말이다.
“……이 시간에?”
“예. 그게 저도 참 놀라운데요…….”
꼭 이 시간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다네요.
그다지 반기지 않는 에녹의 반응에 선물을 받아 왔을 뿐인 고용인이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에 에녹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약혼녀 또한 에녹의 생일마다 매년 선물을 보내왔다. 그들이 강제로 약혼한 12살 때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쭈욱.
누군가의 마음을 사려면 황금과 보석으로 꼬여 내면 된다고 했던가. 에녹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약혼녀는 숨겨 놓은 애첩에 푹 빠진 나이 많은 부호처럼 굴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주제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순금 대신 금이 나오는 광산을, 보석 대신 보석상을 안겨 주었다. 획기적인 돈 자랑이었으나 에녹은 그중 무엇도 받지 않았다.
그걸 모조리 받았다간, 울프번이 디켈슨에 팔려 간다는 루머에 날개를 달아 주는 꼴이었을 거다.
“……이번엔 뭘 보냈지?”
이번에는 또 무엇으로 그의 골치를 썩이려나.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 에녹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심부름꾼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냥, 꽃다발 하납니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아니요. 놀랍게도, 진짜 꽃입니다.”
“원래는 다른 것이었는데?”
“아니요. 처음부터…….”
“…….”
심부름꾼은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면서도, 꽃 한 다발만 가져온 스스로가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할 이유도 없었기에 에녹도 올해만큼은 약혼녀의 선물을 거절하지 못했다.
“받아 와.”
그가 제이드에게 꽃다발을 받아 올 것을 명하자, 심부름꾼과 비서 사이에 희비가 교차했다. 떨떠름한 낯으로 선물을 받아 온 제이드가 에녹의 앞에 그것을 놓아 주었다. 디켈슨이 보낸 꽃다발이라기에 무식하게 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테이블에 올라온 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꽃다발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장미가 아니라는 거였다.
“장미가 아니네요. 다들 도련님 생일에는 앞다퉈서 장미를 갖다 바치려고 난리인데.”
제이드가 그 점을 지적했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방 안에 홀로 피어난 새하얀 꽃 무더기에서는 잔잔한 들판의 향기가 났다. 손수 뜯어 보낸 게 분명한 그 꽃은 심지어 제대로 품종을 개량해서 피워 낸 명품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들꽃 같았다.
하도 열렬하기에 저 사이에 러브 레터라도 끼워 넣은 건가 싶어 열심히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저 꽃만 왔다.
메시지도 없이, 대충 꺾어 뭉친 꽃이라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선물에 충성스러운 비서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한 소리 하려던 참이었다.
“자기 안 만나 준다고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너무 예의에 어긋나는-.”
“…….”
“…도련님?”
도련님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계약서 위에 올려진 새하얀 꽃다발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드처럼 모욕적인 선물에 화가 나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뭐랄까. 좀 더…….
“제이드. 이 꽃-.”
이름이……?
숨소리조차 죽인 에녹이 들꽃의 이름을 물었다. 그 눈빛이 지금 당장 그것을 알아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간절해 보였다.
“…….”
그래서 제이드는 차마 모른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덩달아 숨을 죽였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에녹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꽃을 향해 돌아갔다.
새하얀 꽃잎. 잔잔한 들판의 냄새. 서툰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꽃다발.
울프번의 후계자로 태어나 언제나 명품으로 개량된 꽃들만 보고 자란 그의 눈에는 한없이 조잡한 조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묘한 기시감이 에녹의 기억을 간지럽혔다.
꼭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이런 꽃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또다. 또 이 느낌이다.
별안간 원인 모를 그리움에 잠기게 된 에녹이 깊이 침잠했다. 술렁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른 그가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테라스와 연결된 커다란 창 너머로, 눈이 내려앉은 정원이 보였다.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순결의 설원 위로 따스한 빛의 조명이 드문드문 길을 밝히고 있었다. 눈이 오는 데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정원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야 했다.
“……?”
하지만 저 멀리, 그림자 하나가 정원 끄트머리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설원을 걸어간 가느다란 인영이 막 별관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던 그때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면서 여인의 머리칼이 길게 나부꼈다.
그리하여, 코너를 돌아 아스라이 사라지는 밤하늘을 바라본 순간.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녹이 돌연 그것을 쫓아 달렸다.
도련님! 설원을 향해 뛰쳐나가는 그의 등 뒤로 경악에 찬 제이드의 외침이 빠르게 멀어졌다.
테라스를 그대로 뛰어넘은 에녹은 미친 듯이 정원을 가로질렀다. 눈 때문에 미끄러져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내가 왜 달리고 있지?
그토록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에녹은 사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분명 그럴진대, 바로 다음 순간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답을 돌려주었다.
누군가를 봤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에녹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나의 의문을 해소한 그가 홀린 듯이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 사람이 누군데……?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가 항상 그리워하던 사람.
……누굴 그리워하고 있었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기이한 문답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저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던 감각이 급격히 수면을 향해 비상했다. 막힘없이 대답해 주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단번에 답을 내뱉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서성였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오래도록 맴돌던 목소리가 잦아든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넘지 못하던 감각이 수면 위로 솟구치고-.
에녹의 머릿속에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너는 나처럼 되지 말고, 훌륭한 사람 돼.’
에녹이 기다리던 그 사람은.
모두가 그를 외면할 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해 준 사람이다.
‘다 지겨워. 너도. 세상도.’
그러면서 자신은 쓸쓸하게 말라 죽어가던 사람이다.
최악만은 면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제 손으로 세상에서 떠나보낸 이였다. 그러고 나서도 오래도록 잊지 못해 그리워하던 이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살려 주실 수 있나요?’
그러다 그 그리움에 잠겨 죽어 버릴 것 같을 즈음.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와 준 사람이다.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어, 잊고 있던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 준 사람이다.
‘지켜요. 당신은 지키는 사람이잖아.’
그녀는 겉으로는 강인하고 흔들림 없어 보이지만.
‘너 하나 잃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싫어.’
사실은 누구보다 무서운 게 많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생일 축하해. 에녹 소서.’
그 서툰 손으로 새하얀 꽃을 꺾어 그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자신을 향해 건네던 미소. 그 날의 햇살, 바람, 자신을 바라보던 그 사람의 눈빛.
망각의 바다 아래 잠들어 있던 그 모든 기억들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원을 내달리는 에녹의 다리가 한층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어두운 길의 저 끝에 그 사람이 있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리운 이를 생각했다.
‘사랑해.’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지금 하는 일, 다 끝나고 나면 나랑…… 멀리 가서 살래?’
우리는 가족이 될 예정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둘만 떠나 사랑만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기억의 파도 속으로, 생의 마지막 장면이 스쳤다. 추락하는 재앙, 그 아래 짓눌린 그 사람. 자신은 그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간절했던 그 날의 기억 너머로, 영원히 잊지 못할 목소리가 그를 향해 속삭였다.
‘사랑해. 에녹 소서.’
그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녀가, 자신의 첫사랑이, 그의 유일한 그리움이.
세라 로젠바움은 에녹 소서를 사랑했다.
에녹은 새카만 문을 넘기 전에 분명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돌아와! 돌아와 에녹 소서! 그토록 처절한 세라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생 에녹을 괴롭히던 조급증이 다시 덮쳐들었다.
“허억….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찬 에녹이 더는 달리지 못하고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쉰 그가 허탈한 눈으로 정원을 돌아보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는 어느새 맨발인 채였다.
그를 내달리게 했던 여인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설원에는 에녹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놓쳐 버린 것이다.
“…….”
눈이 내리는 설원이 고요하게 가라앉았지만, 그는 여전히 해일의 한가운데였다. 쫓아야 할 대상을 잃은 에녹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닫자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멈춰 선 에녹은 그 후로 오래도록 일어서지 못했다. 아플 정도로 사랑하던 이를 기억해 냈으나 그와 동시에 찾아온 지독한 상실감이 그를 영영 설원에 주저앉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송이가 얇은 실내복만 걸치고 있는 어깨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녹이 눈에 잠겨 가던 순간.
드르륵.
에녹의 정면에 있던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밝은 조명이 설원에 쏟아지고, 봄을 닮은 훈풍이 에녹을 감싸 안았다. 서서히 다가온 그림자가 에녹을 뒤덮는다.
그리고, 말을 건다.
“왜 그러고 있어?”
목소리.
얼어붙은 에녹의 손끝이 움찔 반응을 보였다.
“…….”
설원을 향해 처박혀 있던 고개가 앞을 향해 움직였다. 온통 하얗기만 하던 시야가 열린 문을 지나, 자그마한 두 발,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밤하늘을 닮은 구불구불한 머리칼에 닿아 멈춰 섰다.
“…….”
에녹이 꾸욱, 입술을 사리물었다.
눈밭을 굴러도 생기를 잃지 않은 붉은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깨끗하던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 너머로 흐리게 번진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뜬다.
다시 깨끗해진 시야에 비로소 상대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군청색의 머리카락.
밤하늘을 닮은 자수정 빛 눈동자.
조금은 앳된 얼굴.
하지만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은 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밤에 맨발로 설원을 헤매는 그를 걱정하듯 내려다보던 상대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이렇게 말했다.
“들어올래?”
“……!”
그와 동시에, 에녹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라스를 넘어 단숨에 여자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어린 짐승이 어미의 품을 찾듯 그악스럽게 가녀린 품에 안겨 들었다.
“어어…!”
제 품을 파고드는 힘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러다 끝내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중심을 잃은 순간, 에녹이 득달같이 쫓아와 제 품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 기세가 하도 맹렬하여, 세라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초면인데 너무 화끈한 거 아닌가요? 울프번?”
그러면서 괜히, 모르는 사이인 척 목소리를 높이니 품에 안긴 에녹이 그러지 말라는 듯 사납게 칭얼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 안 칠게.”
어깨가 미친 듯이 축축해지고 있었으므로, 세라는 씨근덕대는 에녹의 등을 다정히 다독여 주었다. 혼자서 여유로운 척은 다 하고 있지만, 애써 밝은 척 미소 짓는 입꼬리가 에녹과 마찬가지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에녹의 앞에 나타났지만, 그녀라고 해서 여기까지 오는 게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왕 주실 거면 그런 거 말고 좀 더 실용적이고 좋은 걸로 주세요.’
이미 한번 끊어져 버린 그들의 인연을 다시 이어 놓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른 거라니…?’
‘기억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음 생만 만나는 거 말고 앞으로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다 무조건.’
‘……뭐?’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운명이니 시련이니 하는 거 없이 그냥 만나게 해 주세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세라는 아이러니 하게도 뻔뻔해져야 했다. 그녀는 신이 자신을 괘씸죄로 다시 지옥에 처넣어도 하는 수 없다는 마음으로 터무니없이 파격적인 포상을 요구했다.
그녀가 감히 영원을 입에 담았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신의 눈빛이 얼마나 싸늘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라도 이판사판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었다. 신은 지금 당장 손을 놓쳐도 운명의 흐름과 함께하는 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했었지만 그녀는 고작 그런 것에 만족하기엔 너무나도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뭐? 운명의 흐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돼?
전부 개소리였다. 지금 당장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어느 세월에.
그녀는 불확실한 기약보다 확실한 계약을 원했다.
‘대신, 조건이 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시 지옥 불에서 고통받아야 한대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라를 향해, 신이 영원의 대가를 속삭여 주었다.
‘착하게 살거라. 세라 로젠바움.’
‘…….’
그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마냥 쉽지만은 않은 조건이었다.
‘네. 그럴게요.’
하지만 세라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로젠바움의 이름을 벗고 디켈슨이 되었다.
그리고, 찾아냈다.
‘아빠. 나 쟤랑 결혼할래.’
자신을 잊고 홀로 남겨진 에녹 울프번을.
하지만 찾는다고 다가 아니었다.
이번 생에도 쓸데없이 고귀하게 태어난 에녹의 옆자리는 한낱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외동딸이 차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에녹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세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태어난 디켈슨을 뜯어 고치는 것이었다. 신과 착하게 살겠다고 약속했는데,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딸로 떵떵거리며 살아서야 안 될 일이었다.
과연 다섯 살 난 아이의 말을 따라줄 부모가 있을까 싶었으나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다.
‘네가, 우리 가문의 희망이다!’
두꺼비를 닮은 외모 때문에 한 평생 설움을 당했던 그는 제 아내만을 쏙 빼닮은 외동딸에게 껌뻑 죽었다. 그런 딸이 가난한 사람들 등골이나 빼먹는 짓거리는 그만둬야 한다며 그가 평생 걸어온 길을 비난했을 때에도-.
‘어떻게 해! 우리 딸이 천잰가 봐!’
오히려 어린 게 따박따박 맞는 말만 한다며 호들갑을 떨면서, 세라가 원하는 디켈슨을 만들어주겠다 흔쾌히 맹세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냥, 뒷골목 생활을 오래 해서 말투가 험하고 두꺼비를 닮았을 뿐.
가주만 설득하면 쉬울 줄 알았는데, 그 다음부터가 진짜였다. 세라가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이미 낙인처럼 찍힌 나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합법적으로 대금업을 하려고 하니 자본이 모이는 속도가 미친 듯이 떨어졌다.
돈이 모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이 떠나니 힘이 사라졌다. 힘이 사라지니 디켈슨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놈들이 제집인양 저택에 들이닥쳐 복수를 하려 들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또 돈이 모이지 않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세라는 어떻게든 했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디켈슨의 악명이 그나마 덜한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갖고 있는 모든 돈을 기업에 투자해 수익을 내고, 그 경험을 선전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들에게 돈을 받고 자문을 해주거나 부족한 자금을 빌려주고 다달이 이자를 받았다.
물론 그 모든 일은 그녀의 아빠이자 디켈슨의 가주가 대행해 주었다. 돈을 만지는 사람들에게 까마득하게 어린 아이가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면 신뢰를 주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다 보니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몰랐는데, 세라는 제법 돈을 불리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아빠를 닮았나?
새로운 가족과의 닮은 점을 찾아보려 거울 앞에 서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라는 두꺼비를 닮은 아빠 대신 장미를 닮은 소년을 떠올렸다.
지금쯤 너는 몇 살일까.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너에게 친절하겠지. 네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디 소문대로 좋은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면 세라는 어김없이 앓아누웠다. 몸에 영향을 줄 정도로 독처럼 쌓인 그리움에 허덕이며 울어야 했다. 그러다 털고 일어나면, 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세라가 죽도록 노력한 덕분에, 디켈슨은 죽어 마땅한 깡패 집안에서 돈 하나는 썩어 넘치도록 많은 깡패 집안이 되었다.
그렇다. 그 정도로는 과거의 악명을 완전히 떨쳐내기엔 턱도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세라는 정부가 울프번 가문을 도산시키려는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 배은망덕한 놈들은 이자도 받지 않겠다던 국채에 터무니없는 이유를 붙여 상환액을 늘리고, 에녹의 집안이 파산하면 빚을 받아낸다는 명목으로 그들이 고이 키워낸 열차 산업을 홀랑 잡아먹을 심보였다.
그래서, 세라는 아주 조금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는 정부에게 공식으로 인정받아 은행 사업에 성공하고 난 뒤 에녹을 만나러 가려고 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거리에 나앉으면 안 되니 어떻게든 디켈슨과 엮어 두기로 했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그 이야기만 늘어놓아도 사흘 밤을 지새울 수 있다. 나중에 은행사업이 성공하면, 자신의 일대기를 적은 위인전을 내도 좋을 정도였다.
“왜…. 왜 이제야 왔어.”
에녹의 울음 섞인 부름이 그녀를 눈물 겨운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어느새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그는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스무 해가 되도록 자신을 만나러 와 주지 않을 수 있느냐며 세라를 원망했다. 기다렸는데, 까닭 모를 그리움과 외로움에 파묻히면서도 계속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느냐고.
“미안.”
세라는 온몸으로 그리움을 표현하는 그를 힘주어 끌어안아 주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그녀가 실로 오랜만에 연인의 어깨에 뺨을 묻으며 속삭였다.
“착하게 오느라. 조금 늦었어.”
뎅-. 뎅-.
때마침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반짝, 두 눈을 뜬 세라가 우느라 엉망으로 젖어 버린 에녹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스무 번째 생일 축하해. 에녹 울프번.”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애태우고 나랑 약혼 좀 해 줄래?”
그리고 예전에 그리했던 것처럼. 박력 있게 청혼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가족이 되어 달라고.
드디어 하고픈 말을 전하게 된 세라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에녹은 꽃망울처럼 터지는 그 웃음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더 이상 외로움도 불행도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에녹만이 담긴 밤하늘에는 넘치는 사랑으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응. 응. 그럴게.”
에녹은 그 눈 부신 빛에 다시 한번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또 확신했다.
자신은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버석하게 메말라 있던 심장에 봄이 찾아 들었다. 텅 비어 버린 검은 방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태양이 자리를 채웠다. 마침내 안식을 찾은 영웅이 자신의 구원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해. 세라 디켈슨.”
겨울의 한복판.
장미처럼 아름다운 에녹 울프번의 스무 번째 생일.
새하얀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에, 첫사랑이 그를 데리러 왔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에녹의 등 뒤로 갑자기 사라진 도련님을 애타게 찾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맨발로 뛰쳐나왔으니 그가 저토록 열심히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라가 에녹의 앞에 새 신발을 놓아주었다. 그 안에 발을 끼워 넣은 에녹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은 세라가 에녹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나랑 같이 가도 돼? 너희 아버지가 아시면 엄청 화낼 것 같은데.”
“상관없어.”
“저 비서도 싫어할 것 같은데.”
“자를까?”
“야. 사람 함부로 자르지 마. 그거 엄청 나쁜 짓이야.”
“…….”
“뭐야, 누구 잘랐어?”
“아직 아닐걸…?”
눈이 쌓인 정원으로 내려 선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올해도 생일 선물로 장미 받았어?”
“응.”
“많이?”
“보여줄까? 방에 엄청 많은데.”
“짜증난다.”
“버릴까?”
“미쳤어? 그런 거 함부로 버리지 마. 그거 엄청 나쁜 짓이야.”
“……버리길 원하는 거야 간직하길 원하는 거야?”
물 흐르듯 매끄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지난 스무 해 동안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시답잖은 것으로 투닥거리다가도, 결국에는 소리 내어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내쉬는 숨, 바라보는 눈빛, 맞잡은 손, 그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이미 말하고 있었으니까.
정원에 몰아치던 눈보라는 어느새 깨끗하게 그쳐 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같은 보폭으로 걷는 두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자국을 남겼다. 에녹은 문득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언젠가, 그가 바랐던 대로 에녹은 세라와 함께 설원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란히 발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대로 늙어 이번 생을 다 하고 나서도.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그들은 행복할 운명이었다.
기적처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