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zo RAW novel - Chapter 32
32
“누구 말입니까?”
수하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쳐들었다.
뜬금없이 다짜고짜 ‘놈’을 거론하니 무슨 수로 알아듣겠는가.
그는 수하의 어리둥절한 표정에도 개의치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무심히 말했다.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까지 가물거리는군.”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후후후! 성백산…… 성백산에서 사라졌던 꼬마 말이야. 대단했어. 십점의 눈길을 따돌리고 사라지기까지 하고 말이야.”
“아! 소야요.”
수하가 비로소 누군지 알았다는 듯 반색했다.
“소야…… 맞아. 이름이 소야였지. 후후후!”
그는 웃었다.
사실, 소야라는 이름…… 성백산을 말할 때 기억이 났다. 수하가 ‘소야’라는 말을 언급하기 전에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이름이 되살아났다.
이름이 소야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름인가.
대막의 사수(死手)를 피해내고, 검부의 추적망도 따돌리고, 십점의 눈길마저 떨궈버린 꼬마.
“소야. 소야…….”
그는 미소를 머금고 소야를 되뇌였다.
한 장의 밀지에서 소야의 비린내가 풍긴다.
놈이 송아지만 한 개를 데리고 다닌다는 글귀를 읽는 순간, 퍼뜩 꼬마의 영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금빛 눈을 가진 회색 늑대, 금안(金眼)을 가진 회랑(灰狼), 금안회랑(金眼灰狼)…… 차랑(唓狼)!
이 세상에 금안회랑은 오직 차랑밖에 없다.
엄밀히 말하면 낭야가 데리고 있던 차랑은 금안이 아니었다. 검은 동공, 흑안이었다. 금안회랑은 차랑 중에서도 지극히 영특해서 백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는 영물이다.
금안회랑을 데리고 다니는 엽사.
그놈 소야 이외에 또 누구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는 급히 일어나 대청을 질주하고 싶었다. 검부(劍溥)에게 어서 빨리 움직이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아니다. 대막에게 달려가서 드디어 꼬마 놈을 찾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냐. 안 돼! 흥분하면…… 안 돼.’
그는 그러지 않았다.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앉혔다.
놈은 무려 오 년 동안이나 잠적해 있었다.
한 곳에 둥지를 틀고 숨어있었던 것도 아니다. 놈은 무려 오천 리나 이동했다. 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서 말이다.
개방 거지들이 놈을 찾지 못했다.
산에서 사는 심마니, 약초꾼들이 놈을 발견하지 못했다.
길이라면 세상 모든 길을 꿰뚫어 보고 있는 마부들과 수로연맹조차도 놈을 잡지 못했다.
놈은 그야말로 증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졌었다.
한 번 그랬던 놈은 또 그럴 수 있다.
누군가가 뒤를 밟는다고 느낀 순간, 먼저처럼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어.’
지극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다.
시람원주인 그가 벌떡 일어나지도 못하고 의자 손잡이를 꾹 눌러 잡아야 하는 이유다.
그는 차분해진 음성으로 명했다.
“십점을 모두 모아라.”
“십점…… 모두 말입니까?”
수하가 짐짓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래의 무림은 십점이 모두 힘을 합칠 만큼 중요한 사단이 없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하품이 쏟아질 지경이다.
시람원주는 눈을 감았다.
생각 같아서는 되물어오는 수하에게 일갈을 내지르고 싶다. ‘멍청한 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하고 쏘아붙이고 싶다.
그런 마음조차도 차분하게 가다듬는다.
“십점을 모두 모아서 장성에 집중시켜라.”
“장성입니까?”
그는 수하의 되물음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소야의 행적을 쫓는 데 부심했다.
놈은 지금 백등산(白登山)에 있다.
놈의 움직임으로 볼 때, 수로를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러니 백등산 옆으로 흐르는 합하(合河)는 고려하지 않는다. 관도(官道) 역시 제외한다.
놈은 산으로, 논둑길로…… 사람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움직이는 놈을 잡을 수는 없다.
물론 다른 놈이라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도대체 가만히 있을 때만 잡으라는 법이 있기라도 하던가. 움직이고 말고와는 하등 상관없이 어떤 놈이든 낚아챌 수 있다.
하지만 놈이다. 소야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놈이 사라졌던 성백산과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백등산을 일직선으로 쭉 그었다. 그러자 놈이 앞으로 나아갈 행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놈은 장성을 넘어 몽고(蒙古)로 들어갈 생각이다.
이 정도로 동선을 파악했다면, 생포는 시간문제다. 놈이 백등산에서 움치고 뛰어봐야 사방 백여 리,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형성하면 백중백 잡는다.
하지만…… 역시 놈이다.
무려 오 년 동안이나 흔적 없이 사라졌었던 놈이다. 그것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 꼬마 놈이 그런 짓을 했는데, 지금은 머리통이 굵어지기까지 했다.
신중하게 지도를 들여다본다.
‘장성을 넘으려면 진천보(鎭川堡)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니, 놈은 사람 사는 마을로 들어서지 않아. 금안회랑까지 데리고 있으니 들어서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겠지. 당장 눈에 띄니까. 이 길! 합하와 진천보 사이를 가로지를 거야.’
놈이 갈 길을 짐작해냈다.
‘강을 타고 걸어간다…… 그러면 마주칠 곳은 방산(方山)!’
백등산에서 장성을 넘는 가장 빠른 길, 그리고 가장 은밀한 길!
그는 흥분된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차분차분하게 말했다.
“방산, 십점을 방산에 밀집시켜라.”
“방산. 알겠습니다.”
수하도 이번에는 되묻지 않았다. 즉시 명한 바를 복창했다.
시람원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눈치코치라면 절에서도 고기를 얻어먹을 정도다. 그러니 원주의 신색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사태의 중대함을 모를 리 없다.
원주가 소야를 거론했다.
원주가 지도를 보면서 숙고한다. 십점을 모르라는 명도 내렸다.
이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 채지 못한다면 시람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
‘방산…… 방산에서 잡는다.’
그는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수하가 명을 이행하기 위해 떠났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방산의 다른 말은 북무당산(北武當山)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다. 봉(峰)이 일흔두 개에 애(崖)가 서른여섯 개다. 동(洞)도 스물두 개나 된다.
방산은 다른 말도 가지고 있다. 삼진제일명산(三晉第一名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곳에서 놈을 잡는 일…… 매우 흥미진진한 살전(殺戰)이 될 것이다.
그는 놈을 잡는 일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꼬마를 계속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놈이 왜 몽골 땅으로 들어서느냐 하는 점이 궁금해서다.
오 년이면 무공을 배웠어도 한참 배웠을 시간이다.
웬만한 무골이라면 기본공 정도는 숙달했을 것이고, 조금 더 나은 근골이라면 고수 반열에 들어설 수도 있다. 놈처럼 원한에 사무친 놈이라면 꽤 높은 수준일 게다.
놈이 무공을 배웠다고 생각해야 한다.
호랑이 네 마리를 잡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기본만 갖춘 무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는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데 주목했다.
숨던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웬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쯤 잊어버렸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경우인데…… 그렇다면 놈은 멍청이다. 무림이라는 곳을 너무 가볍게 본 처사다.
놈은 무공을 수련했다.
허면 놈의 칼날은 당연히 무림을 향했어야 한다. 낭야를 죽인 자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 부심해야 한다.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녀야 한다. 그게 당연한 행동이지 않나.
만약 그랬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으리라.
놈은 그러지 않았다. 원수를 찾는 대신에 몽골로 들어선다. 원한을 뒤로 하고 낯선 땅을 찾아간다. 한참 혈기방장해서 물불 가리지 않을 나이에. 왜?
‘무림오괴!’
퍼뜩 스쳐지나가는 생각이다.
사실 무림오괴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낭야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성백산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했으면 검부가 치지 못하고 대막이 손을 써야만 했을까.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무림오괴의 기행은 워낙 독특하다. 그래서 사람 눈에 띄기만 하면 당장 감지된다.
생각해 보라. 낭야가 늑대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누가 모를 수 있겠나. 꼭 사람 사는 마을에 나타날 필요도 없다.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결코 모를 수 없다.
‘그렇군. 놈이 낭야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토록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던 게야.’
그는 피식 웃었다.
낭야가 백성산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머지 무림사괴가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무림오괴는 ‘사람은 반드시 종적을 드러낸다’는 그의 신념을 깨고 숨어버린 자들이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몽골 땅에 있는 건 아닐까?
‘혹…… 검부라면 알고 있을지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검부에게는 야복이 네 마리 있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성백산에서 죽었고, 또 한 마리는 행방이 묘연한다. 딱 그때…… 성백산 사건 때부터 종적을 감췄다.
‘인주…… 맞아. 인주가 행방을 감췄어.’
인주가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무려 오 년 동안이나.
인주의 실종과 소야의 몽골행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곧 알게 되겠지. 모두 다.’
그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푹푹 내리쬐는 열기 속에서 진한 비린내가…… 기분 좋게 맡아진다.
스으읏!
어둠이 밀려간다. 그러자 거무칙칙하던 벽이 약간 밝은 색을 띈다.
‘드디어!’
무려 오 년을 기다렸다.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지만…… 죽은 대망의 복수를 한다 싶으니 참을 만했다. 또 꼬마 놈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 년이란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십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그렇다. 오 년이면 오히려 짧다.
시람원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방산! 방산을 주시해! 빨리빨리!
그 한 마디면 족하다. 충분한 대답이 된다. 그 한 마디로 시람원을 주시한 대가는 얻었다.
시람원은 방산에 십점을 모두 집결시킬 생각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중원의 모든 눈을 방산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시람원은 예전에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는 노력의 보람도 없이 실패했다. 소야는 빠져나갔고, 십점은 닭 쫓던 개 모양 지붕만 쳐다봤다.
‘방산이면 장성. 십점이 눈길을 열기 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 하루. 그렇다면…….’
놈은 하루 거리에 있다.
하루 만에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십점이 모두 방산으로 달려갈 수는 없다. 십점 중에 몇몇은 빠른 말을 타고 달려도 서너 달은 걸려야 할 곳이 있다.
‘십점을 모두 모은다’는 것은 이목집중을 의미한다.
조직적인 형태의 눈길을 방산에 집중시킨다는 뜻이다.
그 속에는 개방의 눈이 있다. 하오문의 눈, 수로연맹의 눈, 산적과 비적들의 눈길까지 포함되어 있다. 장성을 지키는 관군이나 장병들도 눈길을 희번덕거릴 것이다.
모든 눈이 장성으로 향한다.
그 일에 걸리는 시간이 하루다.
최근거리에서 전서구가 날아간다고 해도 하루 동안에 눈길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런 조직망을 구성해 놓은 시람원도 대단하기는 하다.
‘방산에서 하루 거리라면…… 미타산(彌陀山)? 아냐. 미타산이라면 곧바로 거간보(居間堡)로 넘어갈 거야. 방산에 들릴 이유가 없어. 뇌공산(雷公山)? 뇌공산이라면 거간보로도 방산의 딱 중간이니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을 것…… 시람원은 방산에 집중했다. 그쪽으로 간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백등산! 백등산이다!’
그는 눈빛을 반짝였다.
대망의 시신을 거두며 맹세했다. 네 복수는 내가 해주겠다고.
그는 검부가 머물고 있는 전각을 바라보면서 두 손 모아 포권했다.
“용서를…… 이 죄는 나중에. 이 갈어(渴魚), 대망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한잠도 잘 수 없으니. 검부, 부디 강녕하시기를.”
스스스스슷!
그의 신형이 다시 어둠 속에 묻혔다.
약간 밝은 색을 띈 벽은 두 번 다시 짙어지지 않았다.
열사(熱沙)의 땅을 지나 동토(凍土)로 들어선다.
그는 노도광창이 일러준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몽골을 도보로 횡단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다.
몽골 너머에 있는 동토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쑥 발을 들여놓으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얼어 죽는다.
북해(北海) 사림(死林)으로 가는 길!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죽음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중원을 벗어나는 장성에서부터 시작된다.
허나 그 길을 가야만 복수가 이루어진다.
사림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노도광창이 무조건 가라고 하니 갈 뿐이다. 하지만 사림에 당도해야만 복수의 첫 자락을 움켜잡을 것이라는 건 안다.
그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고 본다.
그는 아직도 노도광창이 놀라던 모습을 기억한다.
복면인의 무공, 단주비천을 펼쳐보이자 노도광창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얼굴색이 붉어지고, 손발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