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zo RAW novel - Chapter 4
4
이것도 소야에게 늘 해주던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는다. 크게 비명을 지르면 소야가 들을 것이고, 그러면 가슴이 찢어질 것이기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러 참는다.
쒜엑! 퍽퍽퍽!
잘 익은 고구마를 부지깽이로 짓쑤시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풀썩!
두 무릎이 수수깡처럼 꺾였다. 몸이 머리에서 떨어져나간 것처럼 제멋대로 뒤틀렸다.
척!
무인은 땅에 쓰러진 그를, 그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다.
“살려줄 수 있다.”
복면인의 음성이 달콤하게 들려왔다.
‘크큿!’
엽사는 속으로 웃었다.
복면인의 말을 듣고 있다면 정말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강렬한 욕구가 치솟고, 이자들이라면 살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허나 그는 곧 웃고 말았다.
두 발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검에 맞았는데, 아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피가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바람에 현기증이 극심하게 치밀고 있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다.
무인의 검이 척추를 끊어버렸다.
아주 고도의 수법이면서 치명적이다.
이런 검에 당하면 살 수 없다.
‘다…… 끝났군.’
그의 얼굴이 암울해졌다.
자신은 죽는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소야다. 늑대 굴로 피하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검을 쓰는 자들이라면 소야 또한 금방 찾아낼 것이다.
“말만 해라. 치료를 해주마.”
또 유혹! 절대로 살 수 없게 검을 써놓고 살려준단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유혹에 당장 말려든다. 몸이 엉망으로 짓이겨지고, 정신이 혼몽해져서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귀에 들리는 소리가 천음(天音)이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허나 그는 속지 않는다.
자신의 몸 상태도 모르고 있을 바보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군지 알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을 텐데.
엽사로 살면서 엽사의 모든 것을 배웠다.
엽사로써 몸을 관찰해보자.
맹수와 겨뤄서 이길 만한 몸인가? 맹수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나? 정신은 굳건한가? 마음속에 맹수를 대하는 일 외에 또 다른 잡념이 깃들어 있지는 않나?
맹수는 빠르다. 강하다. 한순간의 잡념이 죽음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늘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상태까지 두루 살펴야 한다.
진정한 엽사라면 몸을 살피는 일이 거의 습관화되어 있다.
지금 이들이 하는 말은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 어떤 엽사에게도 씨가 먹히지 않는 소리다.
지금 몸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래도 그는 말했다.
“사, 살려만 주시면…….”
얼굴에 비굴한 표정을 가득 떠올렸다. 복면인들이 원하는 게 이런 것이니까.
“뭘 잡으려고 왔지?”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허나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아주 잘해야 한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 그저 꿩이나 몇 마리…… 이 산에는…… 맹수가…… 살지 않…….”
엽사의 음성이 덜덜 떨려나왔다.
죽음…… 죽음이 느껴진다.
복면인이 그의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갔다.
소야가 낚아챈 매다.
“내용을 살폈군.”
전통 안에 전서가 없으니 당연한 물음이다.
왜 그랬을까? 왜 전통에서 전서를 꺼내 소야 품에 찔러 넣었을까? 전통에 전서가 없으면 이들이 의심할 텐데. 소야에게 위험을 심어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본능에 이끌려서 무조건 소야의 품에 찔러넣었다. 전서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짓을 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
허나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후회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쇠, 쇤네는 까막눈이라…… 매…… 매를 가질 욕심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안에 든 것은…… 저…… 쪽에…….”
그는 사력을 다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자식이 매를 잡은 곳이다.
그리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가 세상에서 내뱉은 마지막 숨이다.
***
“냄새가 지독해.”
그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늑대 굴을 한두 번 이용한 게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버지는 이 굴을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성백산에만 오면 이 굴에서 쉬어갔다.
그는 이 굴이 싫다.
매번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선 냄새가 너무 지독하다.
아버지는 늑대의 노린내라고 했다.
늑대의 노린내…… 아주 지독하다. 마치 머리카락을 불에 태운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숨이라도 크게 쉴 것 같으면 폐까지 노린내로 물드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
또 뼈다귀가 많은 것도 귀찮다.
굴에는 들쥐의 뼈에서부터 황소의 넓적다리뼈까지 다양한 뼈가 널려 있다.
늑대 굴이니 뼈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뼈들이 살을 발라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다. 어떤 뼈에는 살점이 남아 있을 때도 있다.
버려진 굴이 아니라 임자가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그런 점을 전혀 상관하지 않으셨다.
-늑대 굴이니 늑대가 임자 아니겠냐. 까짓것 나타나면 잡아버리지 뭐. 엽사가 늑대를 무서워해서야 쓰나. 늑대가 사냥꾼을 무서워해야지. 안 그러냐, 이놈아!
그런데 용케도 늑대를 만나지 않았다.
활이란 게 무엇인지 알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산을 탔으니…… 굴을 이용한 게 한 삼사 년쯤 됐나? 일 년에 열댓 번은 굴을 썼는데, 용케도 굴 임자와 마주치지 않았다.
-늑대는 떼로 다니잖아요.
-그래서 무섭냐?
-누가 무섭대나. 몇 놈이나 잡아야 하나 그걸 생각한 거지. 여기는 몇 마리나 살아요?
-글쎄? 한 스무 마리 살려나?
-피이! 이 조그만 굴에 무슨 스무 마리. 기껏해야 네 마리? 많아야 다섯 마리 정도 살겠다.
솔직히 말하면 늑대가 무섭다.
굴에 번져 있는 늑대의 노린내로 미루어서 보통 늑대는 아닐 것 같다. 크기는 황소만 하고, 사납기는 호랑이도 물어버릴 정도로 대단한 놈일 게다.
그래서 늑대 굴에만 오면 긴장을 풀지 못한다.
아버지를 믿지만…… 혹시 아는가? 잠 잘 때 살며시 다가와서 쏙 물어갈지.
작년까지만 해도 늑대 굴이 참 무섭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처럼 겁먹지 않는다.
아버지처럼 까짓 것 나타나면 잡아버리지 하고 대범하게 생각할 정도는 되었다.
어쨌든 폭우가 쏟아지거나 한풍(寒風)이 너무 거세서 걸음을 떼어놓기 힘들 때는 어김없이 이 굴로 온다. 솔직히 주변에 이만한 피신처도 없고.
늑대 굴은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찾아왔고, 불쑥 들어섰다.
역시 노린내가 진동한다. 이번에는 노루를 잡아먹었는지, 노루 뿔도 보인다.
“이제는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까지 하다니까.”
그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맹수도 한 손으로 때려잡는 분이니 그까짓 사람쯤이야 간단하게 따돌리셨을 텐데…… 문득,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불길해진다.
‘사흘간 꼼짝하지 말라고? 뭣 때문에 그렇게 겁먹으셨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었나?’
아버지는 그 말을 하실 때 얼굴이 파랗게 질리셨다.
그때는 무엇인가 커다란 잘못을 한 것 같아서 정신없이 듣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다급해 보이셨다. 호랑이 두 마리에게 쫓길 때보다 더 급해 보이셨다.
아버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사흘간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그리고 낙촌으로 하산해라. 하산하거든 옷을 바꿔 입어라.
전부 다 평소에 하지 않으시던 말이다.
옷을 바꿔 입어?
그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개미굴처럼 번잡해졌다.
정말 뭐가 잘못된 건가? 아버지에게 위험이 닥친 건가? 아버지조차 해결할 수 없는 일인가?
‘이대로 있을 수 없어!’
그는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의 엄명은 늑대 굴에서 사흘 동안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뭔가 아버지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헌데,
그르릉! 그르르…… 릉!
별빛만 가득 쏟아지던 동굴 입구에 노란 불빛 두 개가 번뜩였다.
“웃!”
그는 깜짝 놀라 몸을 낮췄다. 그리고 재빨리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하필이면 이때…….”
아주 난감했다.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야 하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쫓아다녀도 만나지지 않던 늑대가 하필이면 이때 나타났다. 마음이 아주 급할 때.
그러나 그는 엽사의 아들이다.
맹수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온 생각을 오직 싸움에만 집중해야 한다. 지금 당장 옆에서 부모님이 죽어가더라도 눈길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오직 맹수, 맹수만 쳐다봐야 한다. 내가 살아야 죽어가는 부모도 구한다.
“이 자식! 너 운이 없는 줄 알아!”
그는 최대한 빠른 승부를 생각했다.
한가하게 이런 늑대와 노닥거리고 있을 정신이 없다.
아버지가 이상한 사람들을 너끈히 따돌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괜히 번잡스럽게 해드린 것 같아서 미안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와라!”
맹수와 싸울 때, 맹수가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을 때…… 이럴 때는 후수(後手)를 노려야 한다. 놈이 먼저 움직이게 하고, 뒤따라 움직인다.
물론 선수를 빼앗겨서도 안 된다.
맹수의 공격에 휘둘리면 반격은커녕 도망 다니기 급급하다가 잡혀 먹힌다.
냉정하게 보고 틈을 잡아서 바로 쳐야 한다.
“어서 와!”
그는 눈에 혈기(血氣)를 담았다.
강한 눈빛은 동물을 불안케 한다. 성품이 순한 놈도 이런 눈길을 받으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하물며 맹수일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헌데 늑대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르…… 르르릉!
늑대는 쉽게 달려들지 않는다. 낮게 그렁거리기만 한다. 그렇다고 틈을 내주는 것도 아니다.
노려보는 눈빛이 매우 매섭다.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든다.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을 했다가는 당장 목줄을 물어뜯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거 보통 놈이 아니네.’
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를 쫓아다니면서 사나운 맹수를 많이 접해봤지만, 이놈처럼 신중한 놈은 없었다.
창끝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별빛에 드러났다.
그는 꼼짝하지 못했다.
늑대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섣불리 움직이면 바로 당한다.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늑대는 떼로 다니는데…… 이러다가 떼거리라도 나타나면 꼼짝없이 당하겠어.’
긴장 때문에 이마에서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닦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쳐다봐야 한다. 쳐다봐야 한다. 눈을 떼서는 안 된다.
한 명을 놓쳤다는 것은 두 명을 놓쳤다는 말도 된다.
복면인들은 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정상에서부터 절곡까지, 또 절곡에서 정상으로…… 사람이 숨거나 은신할 만한 곳은 샅샅이 뒤져나갔다.
그들이 뒤지지 않은 곳은 딱 한 군데, 늑대 십여 마리나 어슬렁거리고 있는 바위굴뿐이다.
늑대 몇 마리가 바위굴 앞에서 장난을 친다.
굴 앞에서만 장난치는 게 아니다. 굴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명령은 냉혹했다.
“뒤져!”
수색명령이 떨어졌다.
복면인 두 명이 검을 뽑아 들고 걸어갔다.
으르릉! 그르릉!
늑대들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갈기를 뾰족하게 곤두세우고, 잿빛 눈에는 죽음을 담았다.
가라.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다.
늑대들은 공격해 오지 않고 위협만 했다.
복면인들은 늑대들의 반응은 털끝만큼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빨을 드러내건, 갈기를 곤두세우건…… 그들은 앞으로 걸어갔고, 드디어 공격권 안으로 들어섰다.
크릉!
바위 위에서 두 사람을 노려보던 늑대가 제일 먼저 도약했다. 허나,
쒜엑!
허공에 빛살이 흘렀다. 그리고 붉은 피가 확 번졌다.
공격해 오던 늑대는 몸통이 반 토막으로 끊어졌다. 허리가 싹둑 잘리며 핏물을 폭죽처럼 터트렸다.
늑대는 오장육부를 흩뿌리며 떨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빠른 검이다. 헌데,
끄릉! 그르릉!
늑대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늑대들이 서둘지 않는다. 이빨을 드러내며 일어서기는 하는데, 아주 천천히 일어선다. 전혀 급한 모습이 아니다. 동료가 반 토막으로 갈라져서 죽었는데도 흥분하지 않는다.
“뭐야, 이거!”
늑대를 양단한 복면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