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zo RAW novel - Chapter 46
46
설아는 한눈에 봐도 혈통이 좋아 보였다.
털이 백설처럼 희다. 골격이 깔끔하고, 눈빛은 초롱초롱하다.
그릉!
흑랑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설아는 움직이지 못했다. 흑랑을 보는 순간 몸이 마비된 듯 꼼짝하지 못하고 발발 떨기만 했다.
“어멋! 얘 무척 사나운데 얌전떠는 거 봐? 가증스럽게 떠는 시늉까지 하네?”
여인이 설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설아는 움직이지 못했다. 짖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주인이 옆에 있는 것도 잊었다. 아주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강풍에 문풍지 떨리듯 떨어댄다.
‘개가 늑대를 만났으니…… 끄응! 떨 만도 하지. 그런데 저놈이 그렇게 무섭나? 아예 짖지를 못하네.’
소야는 여인이 눈치챌까봐 재빨리 말했다.
“우린 저쪽으로 가자. 두 놈이 알아서 할 거야.”
“그럴까?”
여인이 활짝 웃으며 쫓아왔다.
“내 이름은 미사(媄厶). 미사라고 불러. 이름?”
“소야.”
“소야? 문파가 어딘데?”
“문파? 문파 같은 거 없는데…….”
“그럼 부하들은 어디 있어?”
“부하? 저놈?”
그는 흑랑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소야라며? 그럼 부하들이 있을 거 아냐? 작은 주인이라고 불리면서 부하가 없어?”
“부하 같은 거 없고…… 이름이 소야라고.”
“이름이? 무슨 이름이 그러냐? 난 그 이름 싫어. 내가 너를 소야라고 부르면 네가 내 주인이 되잖아. 소야(少爺) 말고 소야(小冶)로 하자. 그럼 소야라고 불러줄게. 싫으면 말고.”
“아니, 괜찮아.”
“나이?”
“나, 나이?”
“몇 살이냐고.”
“열, 열여섯.”
“난 열일곱. 앞으로 내가 누나야. 알았지?”
소야는 눈만 끔뻑거렸다.
이 여자…… 아무래도 사기꾼 같다. 아무리 잘 봐줘도 결코 열일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열다섯이나 열여섯? 한두 살 차이라고 하지만 자신보다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미사가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자. 가서 준비한 것 좀 보자. 우리 동생이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뭘 준비했는지 볼까? 호호호!”
***
이틀 후, 그들은 사막으로 길을 떠났다.
폐가에는 짧은 표식이 남겨졌다. 개방, 그중에서도 섬서개격대만 특별하게 사용하는 밀마(密碼)다.
-미개, 지근감시 시작.
10장 과벽탄(戈壁灘)
[거친 모래와 자갈로 뒤덮인 사막]“여길 건너는데 이틀은 걸릴 거야. 지도를 봤으니까 계획을 세웠겠지? 며칠 잡았어?”
“여기 건너는 데?”
“응.”
“그런데 왜 말 놔?”
“누나잖아! 그런 너는 왜 말 놓냐! 건방지게 누나에게!”
“하!”
“까불지 말고 말이나 해! 여기 건너는 데 며칠이나 예상했어?”
미사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미사의 말투는 다소 거친 구석이 있다. 거친 사내들과 토닥거리면서 살아온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고 그런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소야에게는 오히려 시원해 보인다.
사실, 여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자와의 만남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자와 이야기하고, 밥 먹고, 같이 걷고…… 일상생활을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낯설다.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미사는 그런 부분에서 그를 자유롭게 해줬다.
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되니 무척 편하다. 흑랑을 대하는 것이나 미사를 대하는 것이나 별반 다름없다.
소야는 그답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여길 건너는 데…… 넉넉하게 하루……?”
“하루? 넉넉하게? 호호호!”
미사가 배를 잡고 웃었다.
소야는 그녀의 웃음이 싫기도 하고, 싫지 않기도 했다.
웃음 속에 비웃음이 섞여 있는 것은 싫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웃어주는 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 감정에 호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니 좋다.
아무런 이유 없이 미사가 좋다.
난생 처음 비슷한 나이의 여자를 만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좋은 건데…… 거기에 마음에 쏙 들 만큼 예쁘고 발랄하다.
미사는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좋다.
그녀는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서 동행이 되었다. 흑랑의 씨를 받겠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사막까지 같이 건넌다. 하지만 그는 수상쩍은 우연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흑랑은 개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탐이 난다.
흑랑이 개가 아니라 늑대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기르고 있는 개가 암컷이고, 때가 되었다면 흑랑의 씨를 탐내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또 그녀는 마침 사막을 건널 일이 있다.
노검문에 대한 일이라서 상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 없는데, 가는 길이니 같이 간다. 흑랑의 씨를 건네준 대가로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
소야는 어느 한 부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십분 믿는다. 믿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을 의심할 만한 상식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지 않았나.
예쁜 여인이 생글생글 웃는다.
마음에 쏙 드는 여인이 웃으면서 말을 건네 온다. 가끔 톡 쏘기도 하고, 비웃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게 허허! 웃어버릴 수 있는 일들이다.
미사가 곱디고운 미간에 내천 자를 그리며 말했다.
“여길 하루에 건널 생각을 했어?”
“사람들이 하루면 된다고 하기에…….”
“그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 촌놈이라고 놀려댄 거야. 그 사람들도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걸? 죽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떤 사람이 자기 목숨 달린 일에 남의 말만 믿고 덜컥 뛰어들어?”
“끄응!”
소야는 또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사는 몸이 가냘프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다. 헐렁한 옷에 가려져 있어서 몸매가 드러나지는 않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허리가 개미허리처럼 가늘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그녀가 무공을 수련한 고수라는 점이 깜빡깜빡 잊힌다.
미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 몸 하나는 튼튼한 것 같으니까 네 걱정은 하지 않을게. 가급적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걸어. 급히 걷지 말고. 물은 내가 통제할 거야. 내 말 한 마디라도 안 들으면 당장 우리 약속은 파기야. 난 아쉬운 거 없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과 사막 사이에는 고비가 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양도 먹지 못하는 거친 풀이 듬성듬성 자라 있다.
고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뜨거운 기류가 훅! 몰아친다.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반나절 정도 걸은 후에는 동서남북 사방의 시야가 탁 트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초원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십 리 밖에 사람이 서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다.
언덕도 없고, 바위도 없다. 나무도 없다. 잠시 그늘이 되어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 이거!”
소야는 소매를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실은 땀을 닦는 게 아니라 빗물을 훔치는 중이다. 온몸이 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듯 땀으로 흠씬 젖었다.
“고향이 어디야?”
“고향? 딱히 고향이라고 할 곳은…….”
“어디서 자랐냐고!”
“아! 주로 백성산에서.”
“백성산?”
“저 아래쪽에 그런 산이 있어.”
“산에서 뭐하고 살았는데? 숯 같은 거 구웠어?”
“아니, 사냥.”
소야는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미사는 그에게 호감이 있는 듯 온갖 것을 물어왔다.
부모님이 누구냐? 언제 돌아가셨냐? 어떻게 살아왔냐? 무공은 배웠냐? 산에서 살아? 혼자? 혼자서 어떻게? 외롭지 않았냐?
소야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던 과거를 순순히 말해주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인이지 않나. 외로운 이야기나 괴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눈살을 찌푸려서 동조까지 해준다. 마음의 아픔을 달래준다.
그는 미사가 정말 좋았다.
헌데…… 산과 사막은 정말 다르다. 체력만 믿고 사막으로 들어서면 아주 큰 낭패를 당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직 사막 입구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다.
그는 땀을 연신 훔쳤다. 옷소매로 이마를 쓱 훔치면 대번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더워?”
“덥네.”
“이 정도가 더워?”
“…….”
소야는 억지웃음을 쓸쓸하게 지었다.
미사의 말은 덥냐고 걱정하는 게 아니다. 겨우 이 정도에 더운 티를 내야 하는냐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한탄을 쏟아냈다.
“나 참, 이렇게 사막을 모르면서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건너겠다고…… 아휴! 나도 참 고생길이 훤하다. 내가 왜 이런 약속을 덜컥 해가지고는. 이게 모두 다 쟤 때문이야. 쟤한테 정신이 팔려서 아무 생각이 없었어. 얘, 이리 와.”
미사는 흑랑을 불러서 머리를 긁어주었다.
이상한 것은 흑랑, 이놈이다. 이놈이 어찌된 영문인지 기분 좋게 머리를 내맡긴다. 습관처럼 이를 드러내는 모습도 미사 앞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얄미운 놈!’
“물 좀…….”
“두 모금만 마셔.”
미사가 흑랑을 껴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미사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 말대로 고비를 절반도 건너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건넜는지도 모른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쓸모없는 초원뿐이다. 사막 같은 건 모습을 드러낼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 사막에 들어설 게다.
그는 사막을 모르지만 사막에 근접했다는 느낌은 읽는다.
우선 땅이 달라졌다. 단단한 땅의 느낌이 점점 없어지고, 굵은 모랫길을 걷는 느낌이다.
쓸모없는 잡풀도 듬성해졌다. 대신 모래가 많아졌다.
“잘 준비 안 해?”
미사가 땅에 나무를 박으면서 말했다.
“그냥 누워서 자면 돼.”
소야는 모래나 다름없는 땅을 툭툭 두들겼다.
땅은 한낮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펄펄 끓는다. 그나마 태양의 직사열기를 피할 수 있어서 한결 낫기는 한데, 그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훗! 마음대로 해. 위험하지 않을 때 쓴 맛을 보는 것도 좋아.”
미사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일까?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데?
그는 미사의 눈웃음에 홀려서 말 속에 숨은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
눈웃음…… 미워할 수 없는 눈웃음.
고비의 낮과 밤은 완전히 다르다.
낮에는 살을 푹푹 익히는데, 밤에는 꽁꽁 얼려버린다.
달이 뜨고, 별이 총총 보일 무렵만 해도 밤이 되니 시원하다는 느낌 정도였다. 헌데 자정 무렵을 넘어서자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워졌다.
“후우!”
소야는 잠에서 깨어 몸을 꼭 웅크렸다.
밤에 푹 자야 낮의 더위를 이길 수 있는데…….
미사는 작은 천막을 쳤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끼고, 한 사람이 들어가면 다소 넉넉해 보이는 일인용천막이다.
생각해 보니 마을을 돌아다닐 때 저런 천막을 본 것 같다.
빨랫줄에도 걸려 있고, 장사꾼이 팔기도 했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걸치기만 하면 되는 휴대용 천막인데…… 무슨 필요가 있겠냐 싶었다.
저런 천막은 산사람들도 쓴다. 산에서 밤이슬을 피하기 위해 저런 것들을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
허나 그는 저런 것 없이도 산에서 잘 살아왔다.
밤에 몸을 뉠 수 있는 천막은 엽사나 심마니, 땅꾼들에게는 필수적인 장비다. 허나 그는 큰 바위 밑이나 깊은 굴이면 충분했다. 그런 곳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이겨냈다.
헌데…… 춥다!
‘으…… 되게 춥네. 그런데 저놈은!’
흑랑! 이놈!
이 간사한 놈은 미사를 따라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추워서 잠이 깼는데, 놈은 새근새근 잘도 잔다.
그는 억지로 눈을 붙였다.
‘자야 돼. 내일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아!”
소야는 탄성을 쏟아냈다.
사막은 뜨거운 곳이다. 위험한 곳이다. 죽음이 항상 발밑에 도사리고 있다.
그가 사막에 대해서 들은 소리는 모두 나쁜 소리였다. 헌데,
“멋있다!”
사막을 보자, 진정한 모래사막을 접하자…… 고비가 아닌 모래로만 이루어진 사막을 보자 입에서 탄성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아름답지?”
“응. 멋있어. 아주 멋있어!”
그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곳,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 물도 없고 온전히 모래로만 덮인 땅!
그 땅이 아름답다.
언덕을 형성한 굴곡은 그 어떤 휘어짐보다도 아름답다.
모래 능선이 칼로 깎은 듯 보드랍게 그려져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쭉 뻗어나가다가 휘어진다. 햇볕에 드러난 밝은 부분과 안쪽에 숨은 그늘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발을 딛지 않은 전인미답(全人未踏)의 땅이 고스란히 속살을 내비친다.
“여기는 며칠 예상했어?”
‘보름.’
소야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보름이라고 하면 또 놀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넉넉잡아서 한 달이라고 할까?
“풋!”
미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 웃긴다. 그런 거 말하면서 뭘 골똘히 생각해?”
“생각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 다 보였거든!”
“좋아. 보름. 보름이다. 보름이면 건널 것이라고 생각했어. 자, 이제 비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