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in the Smoke Gods RAW novel - Chapter 3
3화
* * *
단상 위.
한성태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선에 앉은 이혜윤과 그 뒤로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네.’
이십 년이 넘는 시간.
그는 많은 경험을 했고, 그중에는 지금 단상에 올라온 것보다 더 큰 무대에서 연기를 보인 적도 있었다.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을 상대로 긴장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요?”
잠시 강의실을 둘러보는 그를 향해 이혜윤이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에 한성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준비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려오기 전 대본을 훑어보았다.
어떤 연기를 보여야 하는지 알고 있는 상황.
그런데도 그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우…….”
짙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보였고, 그녀의 시선이 보였다.
턱을 괴고 있는 이혜윤은 한성태에게 조금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펜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성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혜윤은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연기를 볼 때면, 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아들에게마저 ‘F’ 점수를 주지 않았던가.
‘내가 맡은 배역은 꽃집 사장님이었지.’
한성태는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대해 생각하며, 어떤 연기를 보여야 할지 감을 잡았다.
[‘천의 얼굴’은 당신이 너무 뜸을 들인다고 말합니다.]그러지 않아도 지금 연기하려고 했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가 확실하게 알고 행동할 수 있는 건 결국 연기였으니까.
“큼.”
작게 몸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그의 손이 포장지가 담겨 있는 서랍을 열었다.
―바스락.
포장지를 집어 들고.
꽃을 가져와 포장한다.
한성태의 모든 움직임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하는 것이었지만.
“…….”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했다.
허공에 대고 꼼지락거리는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천의 얼굴’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한성태는 허공에서 손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는 책상과 서랍, 꽃들이 놓여 있었으니까.
“좋아하시는 분이 계신가 봐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동백꽃을 사시잖아요. 제가 그래도 꽃집 사장인지라, 꽃말도 잘 알고 있죠. 무엇보다 저희 단골이신데 어떻게 모르겠어요.”
한성태는 다정하게 웃었다.
조심스럽게 꽃을 어루만졌고, 꽃에 가장 어울리는 포장을 해주었다.
“이번에는 꼭 선물해주세요.”
그는 응원하며 손님을 보내었다.
손님이 나가고.
한성태는 걸음을 옮겨 동백꽃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모를 수가 없지. 나도 비슷한 사랑을 하고 있는데.”
한성태가 진열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꽃 하나가 걸려 있었다.
흰색의 동백꽃.
그 꽃말의 의미는 ‘비밀스러운 사랑’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돌렸다.
사랑하고 꽃을 간직하고 있으면 뭐하랴.
결국, 그의 꽃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을 텐데.
“내가 조언을 해줄 처지는 아니었네.”
한성태의 낮은 읊조림.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무겁게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성태는 결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작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고.
한숨을 내쉬듯이 말할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극 속에서 웃음을 만든 이’가 당신의 목을 건드립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당신에게 조금 더 배에 힘을 주어야 한다며, 당신의 배를 누릅니다.] [‘천의 얼굴’이 당신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배를 만지고 있었다.
조금 더 명확하게 대사를 전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한성태의 연기는 강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가져왔다.
숨조차 죽인 채 바라보게 만드는 연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성태는 계속해서 자신의 연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연기란 이런 것이라고.
메시지들이 그에게 연기에 대해 얼핏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늘을 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딸랑.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작은 종소리.
한성태는 뒤를 돌아보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고, 흰색의 동백꽃을 간직하게 만든 사람.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성태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다.
“어, 어서…… 오세요. 오늘도 또 오셨네요?”
한성태의 말에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
배우에게 중요한 건 뭐가 있을까.
많은 게 있었다.
발성부터 시작해서 재능과 직결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손에 꼽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상상력이었다.
자신이 맡은 인물이 될 수 있는 상상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사람을 투영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번에는 어떤 꽃을 사시겠어요?”
그는 지금 상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이 좋아하는 여인을 떠올렸고.
그녀를 자신의 앞에 등장시켰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여인이었지만, 연기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한성태는 연기를 통해서 보이는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 * *
움찔.
한성태의 연기를 보고 있던 박창식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째서일까.
박창식은 한성태의 연기가 매우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극영화과의 에이스인 그가,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는 거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저놈 연기 못하는 새끼잖아!’
박창식은 한성태의 연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가 아는 한성태는 의욕만 과한 놈이었다.
노력은 하는데 연기를 못하는 인간.
대학교 면접 때, 직접 한성태의 무대를 보지 않았던가.
연극영화과에 들어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성태는 연기를 못했다.
지난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시선 속에 있는 한성태는 재능 따위는 조금도 없는 인간이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최근에 한성태의 연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한성태는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발성이며, 감정까지.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꽉.
박창식은 주먹에 강한 힘을 주었다.
한성태의 연기는, 지금 강의실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만 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놈이었는데.
“야, 쟤 느낌 있지 않아?”
“어, 느낌 있어. 지리긴 하네. 연기도 연긴데, 집중력이 그냥……. 나랑 같은 사람 맞냐?”
“그런데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박창식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지 않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었구나? 분명 박창식의 연기를 봤는데, 이제는 어떤 연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한성태의 연기를 비웃고 그의 연기를 칭찬했어야 했는데.
‘내 연기가 저런 놈한테 묻힌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국대학교 면접 때에도, 한성태에는 겨우겨우 붙은 인간이었다.
남들의 기대를 받으며 들어온 자신과 비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하하하. 다들 그렇게 말하고는 해요.
한성태의 자연스러운 웃음과 대사.
그 연기를 마주하고 있으니 마냥 부정할 수 없는 것 같…….
“하!”
박창식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했으면, 저것보다는 훨씬 잘했어.’
그는 사람들의 비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성태가 자신보다 연기를 잘한다고?
그건 어디까지 박창식이 제대로 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학년 중, 자신이 가장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에 힘을 빼고 연기했다.
그런 그와 다르게 한성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연기를 보이고 있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던가.
그래도 아주 재능이 없던 건 아니었고.
적당히 그럭저럭의 연기를 할 수 있는 거겠지.
‘운이 좋네. 내가 어제 잠을 제대로 잤으면, 이런 일은 없었었을 텐데.’
한성태는 운이 좋았던 거다.
그래, 운.
한성태의 연기가 좋게 보인 이유는 운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박창식은 팔짱을 꼈다.
조금은 풀린 얼굴로 한성태의 연기를 보는데.
툭.
어디선가 들려오는 펜을 떨구는 소리.
이혜윤이 한성태의 연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 *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혜윤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한성태를 알고 있었다.
아들의 친구이자, 노력은 열심히 하지만 재능이 없는 아이.
이혜윤이 한성태를 보는 시선은, 그저 불쌍하다는 게 전부였다.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
하지만, 어릴 때부터 꿈을 쫓아온 기특한 아이.
다만, 노력과는 별개로 재능이 없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나도 참 멍청하지. 내가 이런다고 그 사람이 나를 돌아봐 줄 것도 아닌데.
한성태의 연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이혜윤의 생각이 변했다.
분명 면접 때만 해도 형편없는 연기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한성태의 연기를 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게 되었다.
깊이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잠깐에 불과했지만.
한성태가 보이는 연기에서는 그녀로서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연륜이 담겨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에게 십 년 이상 업계의 바닥을 구른 배우의 깊이가 느껴진다니.
툭툭.
그녀는 바닥에 떨궜던 펜을 주워들며 책상을 두드렸다.
한성태의 연기는 그녀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한성태가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노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있다.
면접 때와 비교한다면, 한성태의 연기는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이혜윤은 그의 연기에서 대배우의 품격을 보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연극영화과 1학년이 대배우의 연기를 보여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
그녀의 착각일 게 분명했고, 다른 학생들로 인해 그녀의 눈이 낮아졌기 때문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재미있네.”
한성태를 단순히 노력만 하는 재능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혜윤은 한성태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