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in the Smoke Gods RAW novel - Chapter 55
55화
“이게 제 번호에요.”
서하린의 말에 한성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스마트폰에 서하린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조금 더 고민하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급하게 결정을 내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네.”
“아. 그리고 이건 대본인데, 한번 읽어 보세요.”
한성태는 그녀에게 자신이 가져온 대본을 건네주었다.
그가 적은 메모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대본을 보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작품에 대해 결정하려면, 그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대본을 보면 그만큼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도 수월할 테고.
“제가 이걸 받아도 될지.”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면 문제가 생기기는 할 텐데, 하린 씨가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꼭 저 혼자 볼게요.”
대본을 꽉 붙잡으며 다짐하듯이 말하는 서하린의 모습에 그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중에 연락 주세요.”
“네.”
“부담 갖지는 마시고. 하린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녀가 연기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다.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성태는 그녀와 인사를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 대본 안 가져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정작 대본 실에서 가져온 대본이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흘렸다.
다시 소속사에 갔다 와야 하는 생각도 순간 들었지만.
‘그냥 있는 거로 연습하지, 뭐.’
다양하게 연습하고 싶었을 뿐이지, 꼭 새 대본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김민석에게 받은 대본을 연습하자 생각하며 한성태는 의자에 앉았다.
“민석이한테도 알려줘야 하려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대본을 빤히 내려다보다 옆에 있는 스마트폰을 잡았다.
몇 차례의 신호음과 함께 달칵하고 김민석이 전화를 받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 무슨 일이야?
“별건 아니고. 오늘 하린 씨 만나고 온 거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그래? 뭐라고 하는데?
서하린을 만나고 왔다는 말에 김민석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아무래도 한성태가 직접 같이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결정 내리기 힘들다고 하네. 나중에 생각해 보고 연락 준다고 했어. 내가 따로 번호도 받아냈고.”
―잘했네. 음…… 당장 결정해주면 좋긴 하겠는데. 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알았어. 수고했네.
그저 의견을 물었을 뿐인데 수고라고 할 것까지 있을까.
―영화야, 뭐, 천천히 하면 되고. 너 뮤지컬은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는 주연 함 해야지.
“내가 주연을 어떻게 해. 그냥 남는 거 하는 거지.”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주연 안 하면 누가 주연하냐. 너 이제 현역이야. 선배라고. 작품도 두 개나 찍은 놈이 주연해야지.
“상황 보고.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한성태라고 주연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아무 배역이라도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주연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한성태는 자신이 주연을 하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긴 한데…… 나는 모르겠다.
김민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성태는 이상보다 현실을 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신입생 데리고 MT 간다고 하는데. 너, 갈 거야?
“MT?”
―어, 과대 말로는 2학년부터는 자유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가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해. 3, 4학년 선배들도 온다고 하니까.
굳이 나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김민석의 말에 한성태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회 나가면 안 보게 될 텐데. 뭐 하러 그래.’
연극영화과를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배우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인맥이야 연기만 잘하고 처신만 잘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굳이 가고 싶지는 않네. 의무가 아니라면, 난 안 갈 것 같아.”
―그래? 뭐. 알았어. 과대한테 말해놓을게.
김민석의 말에 한성태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대본을 슬쩍 내려다봤다.
그에게는 대학교 MT보다 연기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한성태는 김민석과 대화를 적당히 주고받고는 전화를 끊었다.
[‘천의 얼굴’이 사이코패스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생각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연기의 신이 주는 조언에 맞춰 한성태는 ‘살인마에게서 살아남아라(가제)’의 배역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
―오늘 1화 방영한다는데, 약속 없으면 같이 볼까?
‘레이스 스타트’의 1화 방영 날이 다가왔다.
* * *
꾹. 꾸욱.
침대에 누운 한 남자가 리모컨의 버튼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TV 화면이 그의 손길에 휙휙 바뀌었다.
“…….”
계속해서 버튼을 누르는 남자의 얼굴에는 따분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뭐 볼 만한 거 없나.”
이불을 옆구리에 낀 채 누운 그는 볼만 한 게 있는지 한참을 찾다가 이내 포기한 채 스마트폰을 들었다.
익숙하게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이리저리 뒤적이던 그의 시야에 게시물 하나가 보였다.
[오늘 레이스 스타트 방영한다!]제목을 살펴본 그의 얼굴에 아주 작은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조석정이 주연이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근에 커뮤니티를 조금 떠들썩하게 만든 드라마 하나가 있었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추격신은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본 그에게도 제법 강한 흥미를 안겨줬다.
“9시라고 했었지.”
현재 시간을 확인한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J, TV 채널에 접속했다.
때마침 ‘레이스 스타트’의 1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부디 저 드라마가 따분함을 지워주면 좋을 텐데.
탕, 타앙!
드라마는 총을 쏘는 것으로 1화가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총격신이라니, 괜찮네.’
러시아의 마피아와 일본의 야쿠자가 서로를 향해 마구 총을 쏘고 있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살아 있는 사람이 몇 남지 않았을 때.
저벅저벅.
피를 밟으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검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장례식장에 온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 넌 또 뭐야!
야쿠자 중 하나가 사내를 향해 일본어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사내는 힐끔 그를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야쿠자를 겨눴다.
타앙!
야쿠자의 머리가 뻥 뚫리고 피가 바닥을 적시는 광경에도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검은색 007 가방을 들고는 자리를 떠났다.
―코노야로! 당장 가서 잡아!
―저 새끼가 가져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도 사내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차에 가방을 싣는다.
부아앙!
바로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묵직한 엔진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이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TV 속 사내가 탄 차는 뒤쫓아오는 차를 따돌리고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경찰조차 따돌리는 사내의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건드렸다.
푸욱.
1화의 마지막에 사내가 칼에 찔려 죽었을 때는 탄식마저 나왔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한숨과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스마트폰을 든 그의 손이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 * *
[레이스 스타트의 순조로운 스타트.] [1화 시청률 3.2%를 달성한 레이스 스타트. 이름 그대로 계속 달려갈 수 있을 것인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엄청난 추격신. 사람들 열광하다.]‘레이스 스타트’의 기록은 매우 좋았다.
항상 1, 2%를 오가던 J, TV 드라마가 무려 3%나 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뒤에 방영된 2화 역시 3.32%를 기록한 걸 보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석정과 이민성의 연기도 좋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건 그 두 사람이 아닌 마약 운반책을 맡은 한성태였다.
「[레이스 스타트 본 사람 있냐?]
내가 미드도 아니고 한드 보면서 긴장하기는 또 처음이네.
추격신은 미드랑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음.
보는 내내 스릴 있더라.
그런데 1화에 나온 마약 운반책 누구임?
처음 보는 배우인데, 연기 장난 없던데?
조석정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던데, 누군지 아는 사람 있어?」
―마카롱은달아: 에이, 조석정에 비교하는 건 선 넘었지. 그래도 연기 잘하는 건 인정.
―마우스가망가졌어요: 그 정도면 금방 뜨겠던데? 연기 좋더라. 운전도 지렸고. 그런데, 저거 직접 운전한 거 아니겠지?
―그만해: 내가 레이스 스타트 촬영팀에 아는 사람 있는데. 추격신 배우가 직접 운전한 거래.
―금새사라진다: ㄹㅇ임?
―그만해: ㅇㅇ. 저거 촬영할 때 현장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고 했음. 내 지인이 방송 업계 사람이라 확실함.
―금새사라진다: 와, 미쳤네.
―용기만땅: 그래서, 누군데. 아는 사람 있으면 좀 풀어봐. 저 정도 연기하는 애가 신인일 리가 없잖아.
―가라: 아직 아는 사람 없는 거 보면 신인인 거 아님? 내가 한드만 파는 놈인데도 처음 보는 얼굴임.
―귀에서물이뚝뚝: 그럼 진짜 신인임?
한성태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곧 그의 이름도 떠돌아다니기 시작하겠지.
‘시작이 좋네.’
단역으로서 이 정도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성태는 감회가 새로웠다.
전생에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반응을 얻기 힘들었는데.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가 빨리 화면을 내려보라고 재촉합니다.] [‘비극 속에서 웃음을 만든 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난다며 웃습니다.]이제는 이런 상황에도 익숙해져야겠지.
앞으로는 더 큰 관심을 받게 될 테니까.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한성태는 웃음을 흘리며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우웅.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바로 잘 수 있었을 텐데.
벌떡 일어난 한성태는 스마트폰을 살펴봤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서하린.’
그녀의 이름이 보였다.
* * *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
카페 안.
김민석이 긴장했는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 모습에 한성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늘 오시기로 한 거 맞지?”
“어, 맞아.”
“와……. 내가 배우랑 미팅하기는 또 처음이네.”
“아직 배우는 아니지 않을까?”
“아, 그런가? 그렇겠네.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했으니까.”
김민석과 대화를 나누던 한성태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성태와 마주치고 후다닥, 달려왔다.
김민석과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한성태는 웃음을 흘렸다.
“아, 안녕하세요.”
“네, 네. 어서 오세요! 하린 씨.”
서하린과 마주한 김민석이 어색한 몸동작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죄송은요. 성태한테 다 들었습니다.”
“네…….”
한성태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는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한 거지,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었다.
‘나도 배우니까. 이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문제지.’
서하린에게 전화를 받았을 시점부터, 한성태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대본을 제작하고 연출을 하는 것, 그리고 편집하는 것까지 전부 김민석이 하니까.
작품에 대한 결정권은 김민석에게 있었다.
‘커피가 맛이 좋네.’
커피를 마시며 지켜보는 한성태의 시선 속에서 김민석과 서하린을 대화를 이어갔다.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고.”
“네, 감독님이라고 들어서요. 감독님한테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김민석이 힐끔 한성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게 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김민석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