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in the Smoke Gods RAW novel - Chapter 91
91화
“이제는 진짜 여름이네.”
길거리를 걷던 한성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찡그렸다.
화창한 날씨.
내리쬐고 있는 햇살이 따듯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를 것 같은 햇살과 뜨거운 공기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여름 패션도 좋지만, 역시 많은 패션을 소화할 수 있는 가을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한성태도 여름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추우면 껴입으면 되지만, 더워도 다 벗을 수가 없었으니까.
‘벗어도 더운 건 똑같고.’
빨리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쪽이었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성태는 저 멀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김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가 김리나를 보며 눈을 반짝입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김리나가 단조로워질 수 있는 색을 잘 살려냈다고 중얼거립니다.]김리나는 배이지 계열의 와이셔츠와 바지를 톤온톤으로 입고 있었다.
허리에 찬 갈색 가죽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단색의 옷.
밋밋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패션이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한 그 느낌은 이것이 ‘새내기다’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전에도 김리나를 본 적이 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예쁘네.”
훨씬 매력적이었다.
‘……어?’
그녀의 패션을 살펴보던 한성태는 문득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법한 말.
“…….”
김리나를 바라보니 그녀의 표정이 멍해져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는 듯한 얼굴.
[‘영원한 젊음의 배우’가 요즘 애들은 진도가 빠르다며 웃음을 흘립니다.]김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반응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짓궂네, 짓궂어.’
장난을 걸어오는 신들의 메시지에 한성태는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옷이 예쁘네요. 이런 옷 소화하기 힘들 텐데. 센스가 좋네요.”
“……아.”
이어지는 한성태의 말에 김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도 패션에 조금 관심이 있거든요.”
“아, 그런 거 같아요. 선배님이 옷을 너무 잘 입으셔서 볼 때마다 놀랐거든요.”
“좋게 봐줘서 고맙네요. 들어갈까요?”
“네!”
김리나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한성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방금 한성태가 한 말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으면 많이 곤란해졌겠지.
카페에 들어간 한성태는 2층에 있는 작은 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우선 대본부터 볼까요? 대본 가지고 오셨죠?”
“네! 여기요.”
한성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가방에서 대본을 하나 꺼내 책상에 올렸다.
‘동네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녀가 꺼낸 대본의 제목을 본 한성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대본은 한성태도 잘 알고 있는 작품의 것이었으니까.
철거 예정 중인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과거, 한성태도 이 작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맡았던 역은 대사도 몇 줄 없는 비중 없는 역할이었지만, 한성태는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었다.
한성태는 대본을 들어 빠르게 훑어보았다.
[‘천의 얼굴’이 익숙한 스토리라고 중얼거립니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는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며 눈을 반짝입니다.]직접 해본 적이 있는 작품이었고 훌륭한 스승들도 옆에 있었다.
조언해줄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
“여기서 리나 씨가 맡은 역할이 뭔가요?”
“저는 엘리사요.”
재능이 있는 사람은 떡잎부터 다르다는 걸까.
1학년 때부터 주연을 맡는 그녀가 조금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좋은 배역을 얻었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오늘은 가볍게 리나 씨 연기가 어떤지 확인만 해볼게요. 아.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 일주일 2회 정도밖에 봐주지 못할 것 같은데 괜찮나요?”
“아……. 2번 밖에 못 봐주시나요?”
한성태의 말에 그녀가 조금 실망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죠. 선배님 촬영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저한테 시간을 내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엄청 감사해요!”
언제 실망했냐는 듯이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성태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연습 장소는 학교 연습실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네, 물론이죠!”
“좋아요. 그럼 연습 시간은…… 보통 지금 같은 시간에 할 것 같기는 한데. 저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따로 일이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네!”
이 정도면 다 설명한 것 같은데.
한성태는 슬슬 자리를 옮겨 김리나의 상태를 보고 싶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연기를 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조금 더 정확한 조언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리나 씨. 우리 이제 자리 옮길까요?”
“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성태를 김리나가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한성태가 살짝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죠?”
“편하게 말 놓아주세요. 선배님이시고 제 선생님이시잖아요.”
“음……. 그러면 편하게 말할게?”
“네, 이름도 편하게 불러주셔도 돼요. 리나라고.”
“그건…… 천천히 해볼게.”
“네, 선배님!”
원래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과거, 한성태는 김리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않았고 친분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까지 밝은 사람이라는 걸 잘 모르고 있었다.
‘이제라도 알면 되는 거니까.’
모르는 것은 앞으로 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한성태는 웃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선배님. 저녁 안 드셨으면, 제가 사드릴게요!”
“……어?”
“저 연기도 가르쳐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과외비도 안 받으신다고 하셨는데.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습니다!”
굳센 의지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한성태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밥 정도는 얻어먹어도 되지 않을까.
“알았어. 감사히 얻어먹을게. 일단 네 연기부터 보자. 밥은 연습 끝나고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선배님!”
한성태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힘차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한성태는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갔다.
* * *
“다행히 하나 비어 있네. 들어가자.”
한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학생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연습실.
평소에는 꽉 차 있던 연습실 중 하나가 운이 좋게도 텅 비어 있었다.
“연습한 거 있어?”
“전부 연습해 봤어요.”
“그럼 그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어떤 거야?”
“저는 이거요.”
김리나가 대본을 넘겨 한 부분을 가리켰다.
챕터 2. 야반도주.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밤에 몰래 도망치려는 장면.
선택, 집중, 후회, 두려움, 기쁨 등의 복잡한 감정을 담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라 높은 난도를 자랑했다.
김리나는 지금 그런 걸 자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단 보면 알겠지.’
한성태는 그녀의 선택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연기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어려운 연기일수록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
한성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습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그의 앞으로 김리나가 대본을 들고 섰다.
“바로 시작할게요?”
“어.”
한성태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녀가 크게 심호흡하며 배역에 집중하는 게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집중력 하나만큼은 좋다니까.’
혁명의 시간을 공연했을 때 김리나의 연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녀의 집중력에 감탄했었다.
“우리 함께 떠나요.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한성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애절해졌다.
간절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는 자신의 연기를 이어갔다.
“제가 말했죠.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고.”
그녀가 한 걸음 옮긴다.
김리나가 가까워졌고 연기는 금방 하이라이트로 치달았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녀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가 음색이 좋은 게 뮤지컬과 잘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천의 얼굴’이 감정을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김리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합니다.]김리나의 연기를 본 신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신들이 그녀의 연기를 칭찬하는 가운데, 한성태는 작게 감탄하고 있었다.
‘몰입감이 상당하네. 딕션도 좋고.’
김리나의 연기는 연습을 많이 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자신이 맡은 인물을 분석하고 고민한 흔적이 보였고 그렇게 분석한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든 노력이 엿보였다.
확실히 좋았고 1학년 들 중에서 그녀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았어. 그런데 여기 이 부분, 사랑한다는 걸 고백하는 이 부분에서는 조금 더 애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좋았지만, 좋은 만큼 단점도 분명히 보였다.
한성태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러한 것들을 지적하고 고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게 전부였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는 함께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속도에 살고 속도에 죽는 자’는 사소한 표정 변화로도 많은 걸 드러낼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그게 한성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까 보니까. 리을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던데. 그것도 고칠 수 있으면 고치는 게 좋을 것 같네.”
“네!”
그녀의 연기를 봐주고 도움을 줄수록, 한성태는 그녀와 조금은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한성태는 편의점에서 사 온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리나의 연습을 도와주고 촬영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백년초’의 방영 날이 다가왔다.
―정두식: 두 시간 뒤에 방영하는데 기분이 어때?
기분이 어떻냐니, 당연히 가슴이 떨린다.
회귀하고 조연으로서 처음 찍은 드라마.
많은 비중이 있었기에, 그만큼 더 기대가 되었다.
―정두식: 아, 시작한다. 이따 드라마 끝나고 연락 줘.
―네. 형, 이따가 연락 드릴게요.
정두식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놓은 한성태는 어느덧 시작한 드라마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 ‘백년초’의 1화.
숲을 뛰어다니는 구미호의 모습을 시작으로 유예나를 만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1화도 끝이 날 무렵.
―요물 네가 왜 여기 있지?
한성태가 연기한 지연우의 모습이 보였다.
지연우가 백연의 멱살을 붙잡는 것으로 1화가 끝이 났다.
“…….”
한성태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우웅, 우우우우웅!
한성태의 스마트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