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46
447화. 종남검성(終南劍聖) (4)
고진무는 이때에 방도를 정했다.
‘혈륜이 먼저.’
여기서 계속 검세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면 끝이 뻔히 보였다.
대사마의 뒷배가 되어 주고 있는 저 요사한 붉은 수레바퀴가 먼저였다. 그의 속내를 청명검이 이해하였는지 선명하게 울었다.
그렇다면 주저할 게 뭐가 있을까.
청명검이 토해 내는 파산의 창룡음이, 찰나였지만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
이를 갈아대던 대사마의 손끝이 주춤했다.
고진무는 당연히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흠!”
대사마는 버티어 내는 고진무를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혈륜이 맴돌면서 든든히 힘을 더해 주고 있었건만, 강렬한 불안감이 가슴을 크게 흔들었다.
혈륜이 더욱 세차게 맴돌면서 자신에게 혈기를 밀어주었다.
몸이 순간적으로 부풀었다. 자칫 다잡지 못하면 이대로 몸이 터져 나갈지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위험한 수를 강행할 정도로, 대사마는 지금을 심상치 않게 여겼다.
천려일실(千慮一失).
자칫하였다가는 지금껏 갖춘 모든 수가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검성의 곧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덜컥 고개를 든 불안이 갈수록 커지고만 있었다.
“혈기를 전력으로!”
다그치기가 무섭게 혈륜이 한층 세차게 돌았다. 광명정을 집어삼킨 혈라금막이 흐려지는 대신, 대사마가 온통 핏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는 힘을 아끼지 않기로 작정했다. 여기서 소모한 힘은 그만큼 보충하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이미 힘을 다한 대사공은 물론이고, 눈앞에 있는 검성을 취하기만 한다면.
대사마는 한층 집중하여서 핏빛의 안광을 번뜩였다.
혈륜의 혈기를 받아서 부풀었던 육신을 다잡자, 그는 이제 천산 성마의 갈래에서 나온 마인으로는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십만 인의 혼백과 피를 제물 삼아서 순수한 혈기로 진원을 이루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육신을 다잡았으니.
이제 그는 ‘교’의 대사마가 아닌, 차라리 혈마(血魔)라고 해도 좋았다.
핏빛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이때 고진무의 손에서 청명검이 크게 울었다.
쩌르렁!
보통의 검명이 아니었다.
법보의 신령한 파사기를 잔뜩 머금고, 맴도는 핏빛의 운무를 한차례 크게 흔들었다. 잠깐의 틈이었지만, 고진무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잔뜩 힘을 집중하는 대사마를 두고서 내처 하늘 높이 청명검을 던졌다.
뜻이 통하였으니, 주저할 바가 아니었다.
검은 흐트러진 혈라금막을 꿰뚫었다. 노리는 것은 너머에서 맴돌고 있는 붉은 수레바퀴, 혈륜이다.
그러자 너머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하, 하핫!”
검을 버리고 자포자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고진무는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결과로 나올 일이었으니까.
청명검이 높이 날았고, 자신은 검결지를 미간 앞에 곧게 세웠다.
“후우우…….”
길게 밀어내는 호흡이 묵직했다.
흐려진 핏빛의 장막 너머로 제대로 집중한 대사마가 핏빛의 마귀 꼴로 서서히 내려섰다.
검성의 이름은 인정하지만, 법보도 없이 홀로 서서 혈기를 완벽하게 갖춘 자신을 어찌 감당하려는 것인가.
대사마는 그리고 혈라금막을 뚫고 솟구친 고검이 상당한 법보라는 건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혈륜을 상하게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쩌릉!
“흣!”
과연, 솟구친 고검이 그대로 혈륜을 노리고 날았지만 한 차례 큰 동요만 일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혈기를 더해 주는 데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사마는 맨손으로 앞에 선 고진무를 노려보면서 이를 드러냈다.
“흐흐, 너무 서둘렀군, 검성.”
대사공은 뒤에서 지켜보면서 숨을 고르다가 눈을 번뜩였다.
‘그래, 저 외법의 결과물을 어찌해야 대사마도 도모할 수 있겠지.’
그러나 고진무는 하나뿐인 검을 높이 던졌다.
나름의 수단이 있겠지만, 당장 지금은 맨손이지 않은가.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심각한 내상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몇 번의 호흡으로 내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서 앞을 막아선 고진무의 뒷모습을 한층 힘주어 바라보았다
‘검성…….’
고진무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맨손을 모아서 검결지를 맺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태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사공은 겨우 다잡은 숨을 꽉 삼키고 휘청하는 무릎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흐음!”
그는 마지막 힘을 내어서 한참 집중하고 있는 고진무를 향해서 몸을 내던지다시피 했다.
고진무는 대사공의 접근에 잠시 당황했지만, 크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암습? 아니, 그건 아니다.’
대사공은 고꾸라질 듯하면서도 기어코 고진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검성, 이 기운을 손끝에 집중하게. 고작 일 푼 남짓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 도움이 될걸세. 허, 허으윽…….”
“대사공…….”
대사공은 말을 다하기가 무섭게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그대로 무릎 꿇었다.
돌아볼 틈은 없었다.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고진무는 어깨 뒤에서 스며든 서늘한 기운을 그대로 이끌었다.
고진무는 어렵지 않게 기운을 이끌어서 검결지로 이끌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백색의 빛줄기가 자연스럽게 맺혔다. 분명 일 푼 정도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 순간 고진무의 검결지는 어느 보검 못지않았다.
더없이 든든한 느낌과 더불어서 더욱 선명하게 검기를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기연이려나.’
고진무는 내심 쓴웃음을 짓고서 바로 검결지를 앞으로 내질렀다.
파팟!
만 장의 검기가 솟구치고, 고진무를 중심으로 일대에 수많은 검기를 품은 검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사마는 그만 허둥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한 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런!”
그야말로 만여 자루에 이르는 검기가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농간인지.
저도 모르게 사술 소리가 울컥 치솟기는 했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사술 중의 사술이라고 할 수 있는 십만 혈의 외법을 펼쳐낸 자신이지 않은가.
“십만의 목숨으로 이룬 혈법이 이렇게 깨질 것 같으냐!”
대신 뻗친 성질을 그대로 터뜨렸다.
붉게 물든 손이 빠르게 좌우로 교차했다.
후웅! 후웅! 후우웅!
공간이 흔들리고, 켜켜이 드리우는 핏빛의 장막이 고진무의 손끝을 막아섰다. 한 장, 한 장이 강기로 자아내다시피 한 막강한 강기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금성철벽이며, 최강의 방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구귀라 한들 지금의 혈라강 한 장에 비할 수나 있을까.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다만 검결지 맺은 두 손가락을 하얗게 물들인 채, 고진무는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대사공에게 받은 소수의 진기를 오직 손끝에 집중하였고, 눈앞에는 만검의 궤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심검경, 만검귀일.”
고진무는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종남노인이 시작했고, 검오가 다시 찾아냈으며, 지금 고진무가 완성한 만검의 한 수였다.
다른 검이 있었다면 고진무의 검심(劍心)에 응하고, 마땅히 앙복하리라. 검이 없다한들 만검의 뜻을 세웠으니, 스치는 바람 한 줄기조차 검기를 품는다.
“흐억!”
대사마는 혈기를 집중한 혈라수를 정신없이 휘저어 대면서 빠르게 물러서다가 덜컥 멈춰 섰다. 뒤가 없는 것도 아니고, 기운이 빠진 것도 아니었다.
핏빛의 공간이 흩어진 자리에 무수한 검의 그림자가 펼쳐지면서, 오직 자신을 향해서 검 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앞에서 혈라강은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그저 갈라지고, 또 갈라져 나갈 뿐이었다.
호응이라도 하듯 높이 솟구친 청명검도 다시금 몸을 떨어 울었다.
청명검이 분명 신령을 품기도 하였지만, 어검을 펼치는 데에 이제 손이나 눈은 필요하지 않았다.
핏빛의 장막을 꿰뚫고서 높이 솟구쳐 오른 청명검을 허공에서 그 신령한 빛을 한껏 뿌렸다.
콰아아아!
어디서 울리는 것인가.
고진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성하락.”
검오의 성명절기이자, 천하검법 검여일성의 최고절기라 할 한 수였다. 그리고 청명검이 다시 울었다.
“놈! 무슨 짓을!”
대사마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대사공이 저렇게 움직일 줄이야.
게다가 청명검이 허공에서 울어 대는 모습마저 한층 위협적으로 울렸다.
자포자기 따위가 아닌 것이다.
대사마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손을 쓰기에는 한참 뒤늦은 일이었다.
아득한 밤하늘을 흐르는 천하의 도도한 물결. 그 앞에서 제아무리 인외의 존재라고 한들, 무슨 도리가 있으랴.
천하검법, 성하락.
하늘 높은 곳, 천하(天河)의 물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꽝! 꽈르르릉!
혈륜은 한 자루 검이 그려 내는 도도한 별빛의 물결 앞에 그대로 침몰했다. 마침 전력으로 돌면서 혈기를 있는 대로 뽑아내던 참이었다.
쏟아지는 별무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을 소진하고 말았다.
끼야아아악!
끄아아아악!
까아아아악!
수십, 수백, 아니 어쩌면 수만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혈륜이 성하락에 휩쓸려서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순간, 수많은 혼백이 내지르는 비명이 광명정을 뒤흔들었다.
사람의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을 만큼 높고, 처절했다.
혈륜은 단순한 신외지물(身外之物) 따위가 아니라, 혼백과 피로 이루어진 마물이기 때문이었다.
막 마지막 소수진기를 전한 탓에 겨우 숨만 이어가던 대사공도 그 소리에 크게 타격을 입을 지경이었다.
“커헉!”
왈칵 핏물이 치솟았다. 그래도 앙상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쥐고 고진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혈륜을 파괴한 지금이 기회였다.
“검성!”
대사공은 등을 떠밀 듯이 힘껏 외쳤다.
고진무 역시 그 소리에 바로 반응했다.
허를 제대로 찔렸다.
홀로 날아오른 고검이 이 정도 신위를 보일 줄이야. 잠깐이지만, 망연함에 처지를 잊은 모양이었다.
대사마는 허, 숨을 삼키고서 멍한 눈으로 흩어지는 혈륜을 빤히 보았다.
“이게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 건데.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인데.”
더듬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세월과 공이 빠르게 눈앞을 스쳤다.
어느 정도라야 분노도 일어난다.
신인으로 드는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고꾸라지다니.
그것도 약간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게 박살나버렸다.
고진무의 기이한 한 수에 붙들린 사이에, 대사마는 그 광경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이, 이게…….”
대사마는 초월경을 넘어선 또 다른 경지를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간신히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여겼거늘,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진경(眞境)의 터럭 한 올에 지나지 않았다.
“흡!”
대사마는 불현듯 몸을 크게 들썩거렸다.
감당 못할 충격이 내부에서 터졌다. 치뜬 눈에서 힘이 풀리고, 초점을 잃었다.
온몸을 다시 이룬 것처럼 이글거리던 혈기가 속절없이 흩어져갔다. 대사마는 남은 기운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그는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고진무의 검결지 맺은 손이 그의 중단에 닿아 있었다.
뻗어낸 손가락이 살짝 닿았을 뿐이다.
딱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사마는 이 손끝에 실린 무시무시한 검기가 자신의 내부를 완전히 파괴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대사마는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허, 허으. 허으. 이건 대체 무슨 검이냐? 대체…… 대체…….”
“…….”
그는 이어갈 수 없는 숨을 억지로 붙잡으면서 물었다.
고진무는 답하지 않았다.
대사마는 답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진무는 검결지 맺은 손을 풀었다.
그 또한 크게 지친 모습이었다. 내공이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심력과 정력 일체를 크게 소진한 탓이었다.
고진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혈륜을 박살 낸 청명검이 우두커니 서 있는 고진무를 호위하듯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혈기가 빠르게 녹아내리고, 광명정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혈륜의 몸부림 탓에 곳곳이 갈라졌고, 무너져 내렸다.
엉망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언제 전체가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했다. 그래도 남은 두 사람은 당장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진무는 두 어깨를 늘어뜨린 채 지친 한숨을 흘렸다.
대사공 역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만 무릎 꿇은 채 고개만 간신히 세우고 있었다.
“허어…….”
“후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숨은 길고도 무거웠다. 문득 대사공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면서 고진무의 지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검인가. 그리고 성마께서도…….’
고진무가 끝에 떨쳐 낸 심검경의 한 수를 보면서, 대사공은 두 초월자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신검과 성마.
고진무가 그들의 전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히 연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후, 후후후. 내가 괜한 짓을 했던 것 같군.”
“예? 어인 말씀이십니까?”
고진무는 문득 마른 웃음을 흘리면서 더듬더듬 말하는 대사공을 돌아보았다.
“소수가 아니어도, 자네라면 대사마의 혈기를 너끈히 파괴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모를 일이지요. 설사 그렇다고 한들, 대사공의 도움을 의미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고진무는 청명검을 납검했다. 검초 속으로 얌전히 돌아가는 청명검은 기운을 크게 잃었는지, 맑은 빛이 처음보다 흐트러졌다.
고진무는 잠깐이지만 검초를 다독이듯이 두드렸다.
“이제야말로 끝이군요.”
“그래, 끝일세. 끝이지.”
느릿느릿 답하면서, 두 사람은 흔들리는 광명정을 한참이고 지켜보았다.
그날 천외루는 사라졌고, ‘교’는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