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military officer establishes Balhae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발해의 유산 (1)
비암산 구릉지를 넘어서자 시야가 확 트이며,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게 생긴 너른 평원이 나타났다. 또 이 서해란벌 한복판을 유려하게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의 모습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 이렇게 광활한 옥토가 이런 곳에 있다니…….”
송찬황은 눈앞에 펼쳐진 서해란벌 풍경을 보고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동해란평보다 훨씬 넓은 것 같지 않나?”
태건이 장수들에게 물었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서해란벌의 존재를 알았을까요?”
제1연대장 강대구가 물었다.
“알았겠지. 답사까지 했는지는 모르나, 아치랑귀 부락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한심합니다. 광명벌과 해란벌을 차지하면 육진은 물론이고 함경도 전체가 식량 걱정 안 하고 살았을 것을.”
“이제 와 한탄한들 무엇하리.”
송찬황이 웃으며 말했다.
서해란벌의 동서 길이는 대략 25㎞에 달해, 동해란평에 비해 훨씬 컸고, 남북의 폭도 더 넓었다. 더구나 남쪽과 북쪽에 산재한, 여러 계곡의 초입에 펼쳐진 평야 또한 꽤 넓은데다, 수량도 풍부해 곡창지대로 육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태건 군은 장사진을 이룬 채 구릉지를 넘어 서해란평으로 진입했다.
현재 태건이 이끄는 제1군은, 소속 병력이 모두 합류해 무려 8천에 이르렀다. 또다시 신병을 받아 2개 대대가 늘어난 제2군이 광명진과 흥안성, 달리령 등지에 수비대를 배치해 준 덕분에, 그곳을 지키던 병력까지 모두 합류했기 때문이다.
태건 군이 여진족 마을에 이를 때마다 아치랑귀 세력권에 속한 마을의 추장과 촌장들이 나와 태건 군을 맞아 주었다. 태건은 이들과 함께 아치랑귀 부락 본거지로 향했다.
“오! 저기가 아치랑귀 본읍 같은데요?”
송찬황이 감탄사를 터트리며 물었다.
“맞는 것 같군. 김캉나이가 마중 나온 걸 보니.”
송찬황뿐만이 아니라 지휘관 모두가 아치랑귀 부락 본거지와 주변 지세를 보며 몹시 놀랐다.
아치랑귀 부락은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해란강은 물론이고, 서쪽의 장인하와 남쪽의 복동하 등 여러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대평원의 북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은 후세의 화룡시 두도진이란 곳이다.
“만약 아치랑귀 주민들이 논농사를 지을 줄 알았다면 여길 기반으로 충분히 나라까지 세울 수 있었겠어.”
“그러게요. 어휴! 저 넓은 평야를 그냥 놔두고 밭농사나 짓고 있으니.”
태건의 평가에 송찬황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김캉나이와 함께 대추장 김도을, 이응거 부락의 야탄 추장도 잰걸음으로 태건에게 다가왔다.
두 추장은 태건 군 병력 규모를 보고 대경했다. 그래서 태건이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광명평과 동해란평의 여러 추장들이 태건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던 모습을 지켜본 김캉나이와 아하가 족장들에게 미리 알려 준 탓이다. 태건은 깜짝 놀라며 이들을 차례로 부축해 일으켰다.
“왜 무릎을 꿇으시오? 우린 그런 절차가 필요 없는데. 과한 예의올시다.”
“예? 아니, 다른 데서 그런다고…….”
김도을이 당황한 표정으로 김캉나이를 바라보았다.
“거긴 우리와 전쟁을 치른 곳입니다.”
“아…….”
김도을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김캉나이를 째려보았다.
“자자! 들어가시지요.”
김캉나이가 멋쩍게 웃으며 태건에게 목책 안으로 들어가길 권했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어서.”
태건이 송찬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송찬황은 세 연대장에게 주변 들판에 숙영지를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지정된 자리로 이동해 임시 진지와 군영을 세우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본 김도을은 크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들어갈까요?”
병력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태건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도을에게 말했다.
태건은 호위를 겸하게 될 1군 사령부 병력과 주요 지휘관들을 이끌고 목책 내부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치랑귀와 이응거 부락 세력권에 속한 여러 추장과 촌장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서서 태건 일행을 맞아 주었다. 이들은 태건에게 정식으로 귀부를 요청하고자 미리 모여 있었다.
김도을의 집무실에서 태건이 상석에 앉자, 추장들이 차례로 나와 태건에게 자신을 알리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귀부 절차였다. 서기를 맡은 박민 부령은 부락 명칭과 추장의 이름을 서류에 받아 적었고, 경현호는 지도에 부락의 위치를 표시해 나갔다.
수인사 절차가 끝나자 송찬황이 나서서 귀부에 따른 후속 절차에 대해 알려 줬다. 뒤이어 박민 부령이 앞으로 지켜야 할 동해부 법의 골자를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김도을과 야탄 등은 동해부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동해부 법을 지키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제 귀부 절차가 끝난 셈인가?”
“예.”
태건이 묻자 송찬황이 바로 답했다.
“번거로운 거 싫어하신다더니, 정말 그러네요. 허허허!”
대추장 김도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다.
사실상 항복하는 상황이라 비통해해야 정상이나, 태건의 군세를 보고 불가항력이란 사실을 깨달은 데다 귀부 조건이 생각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김도을 대추장은 경흥으로 가서 우리 관리들과 인사를 나누고, 현령직을 수행하기 위한 도움과 조언을 받으시지요.”
송찬황의 권유에 김도을은 공손히 사의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절 현령으로 임명하신다니……. 덕분에 제가 건사해야 할 땅이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수년간 군정을 통해 안정화 단계를 거친 후에야 현령으로 정식 임명되고, 현령이란 직분은 후대로 계승되지 않으니 명심하시오.”
“예.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현의 명칭은 아치랑귀에서 두 글자를 따서 아랑현으로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예. 매우 좋습니다.”
태건은 서해란평과 남부 산악 지대를 아랑현으로 묶고, 현청이 자리하게 될 아치랑귀 부락 자리를 아치랑진이라 명명했다.
태건이 김도을을 현령으로 내정한 이유는 훈춘현의 첨터허의 사례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데다, 가치가 높은 땅을 보유한 상태로 귀부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태건은 이응거 부락 추장 야탄을 아랑현 내 이응사의 사감으로 내정했다. 태건의 이러한 조치를 보며 추장들은 중간 규모의 부락 하나가 ‘사’로 재편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 *
함경도 덕원부의 진석령 고개.
여민단의 우군장 강경우가 이끄는 의병 부대는 그새 영흥과 고원, 문천에 이어 마침내 덕원까지 진출했다.
그간 이들이 보인 행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나 다름없었다. 무려 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할 길이 없자, 각 고을 관아를 지키던 관리들은 도주하기에 바빠 작은 전투조차 치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이렇게 임시로 함경도 감영이 들어선 안변부 바로 코앞에 자리한 덕원까지 쉽게 진출한 것이다.
그새 여민단 단장 이붕은 강경우에게 병력 오백을 더 보내 주었다. 여민단에 가입하는 의병의 수가 계속 늘어 벌써 총병력이 3천 5백에 이르자, 증원군을 보낼 여력이 생긴 것이다.
이로써 강경우 휘하 병력은 모두 2천에 달하게 되었다. 강경우는 이들 중 절반을 중간에 있는 고을마다 조금씩 나눠 배치해 치안 유지와 보급선 관리, 이주민 구제 등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남은 2개 대대를 덕원에 배치했다.
강경우는 정평에서 합류한, 윤영을 처단한 무사 셋 중 오혼을 신임 대대장으로, 지수정과 최형을 중대장으로 임명했다. 사람됨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나 중용하게 된 것이다.
강경우는 병력 대부분을 이곳 진석령에 배치했다. 안변과 덕원 중간에 자리한 이 고개가 바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설정한 가상의 적은 왜군이 아닌, 안변에 주둔 중인 남부군이었다.
“마음이 아파 차마 못 보겠네.”
고개를 지나는 이주민의 행색은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하나같이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보였다. 이들의 행렬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날씨가 벌써 초여름에 접어들었는데도 대기근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풀이 자라고 나무에 물이 올라와, 백성들이 소위 초근목피라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다 군량까지 바닥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제1대대장 선강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보고했다.
강경우 부대는 아사 직전에 놓인 이주민을 외면할 수가 없어, 밥을 지어 먹이거나 곡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지석령 의병 진지가 이주민에게 첫 번째 구휼소가 된 셈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앞으로 원산포로 식량을 보내 준다고 했으니, 더 일찍 도착하겠지. 더구나 동해부 측이 직접 바닷길로 수송해 준다고 했으니.”
“아, 참! 그 소문 들었습니까? 저번에 우리가 덕원에 도착하기 전, 해변에서 노략질하다가 북쪽으로 간 왜구 말입니다.”
“잘 알지. 그런데 왜?”
“송화상단 사람한테 들은 얘기인데, 단천에서 배째로 포로가 됐답니다.”
“뭐? 하하하! 잘됐네. 잠깐, 설마… 그럼 동해부가 수군까지?”
강경우는 아무 생각 없이 껄껄 웃다가, 배도 나포되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깜짝 놀랐다.
“하하하! 역시 우군장님도 놀라는군요. 맞습니다. 동해부가 수군을 제대로 육성하기 시작했답니다. 판옥선도 꽤 많이 보유하고 있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전선도 건조해 몰고 다닌답니다.”
“잘된 일이군. 그럼 그 배들도 여기로 오겠네?”
“왜구가 출몰한 마당이니 화물 배에 호위를 붙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더 놀라운 소식도 있어요.”
“뭔가?”
“그 동해부 선단의 수군 대장이 글쎄, 여자랍니다.”
“뭐? 여자?”
“태건 장군님의 동생분이라던데…….”
“허허! 놀랄 일이로고. 그 젊은 여동생이 수군 대장을 하다니. 그럼 이번에 큰 공을 세운 수군 장수가 바로 여동생분?”
“그렇지요.”
“허허! 참으로 동해부는 재미있는 곳이로고.”
선강은 임시 감영이 설치된 남쪽 안변부 쪽을 살피다, 생각난 게 있어 다시 강경우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번에 원희 장군이 관찰사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네. 정문부 남평사는 남병사로 승진했고.”
“만약… 조정이 저들에게 병력을 보태 주면 이곳으로 치고 들어올까요?”
“당연하지. 그러면 우린 맞서 싸워야 하고.”
“조금 찜찜합니다. 그래도 예전에 우리 상관이었는데.”
“후후! 예전의 상관? 그런 게 어디 있나? 저들은 그저 조선 조정의 관리일 뿐이네. 미쳐 버린 국왕 놈의 사냥개 말일세. 그러니 그런 나약한 소린 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들이 유민을 통과시켜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건 그렇습니다. 전 통행을 막을까 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이곳으로 보내 줘야 그들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지. 사람이 늘어나야 우리 동해부의 힘도 강해지지.”
강경우는 스스로 동해부 소속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당이 동해부 군 간부인 장호를 만나 밀담을 나누고 돌아온 이후,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실제로 그 이후 동해부에서 엄청난 양의 식량이 지원되고 있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